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39)
로판 속 공무원 739화(740/945)
칼 크라시우스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간 지도 어언 10년. 그 10년 동안 요즘만큼 눈칫밥을 먹은 적은 단언컨대 없었다.
“아주버님. 혹시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괜찮아. 이보다 편할 수가 없어.”
“다행이에요. 그래도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주세요.”
“그래…”
현시점에서는 에리히의 유일한 아내, 나의 유일한 제수기에 임신한 몸으로도 나를 살뜰히 대하는 제노비아.
“오빠가 물고기를 잔뜩 잡아오셔서 주방장도 기뻐하고 있어요. 하나같이 살이 통통하다고 하던데요?”
“좋은 것만 잡아오기는 했지.”
“좋은 재료에 부끄럽지 않은 좋은 요리로 대접할게요!”
“고맙다…”
아직 정식 부부가 아니라 나를 오빠라고 부르지만, 제노비아와 함께 온갖 편의를 살피는 중인 세라.
민망하다. 제노비아는 신혼 중이고, 세라는 결혼식이 코앞이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있던 일도 없애줘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아주버님이라는 놈이 동생 부부의 저택에 며칠째 눌러앉아 배나 벅벅 긁고 있다. 뒤에서 욕을 먹는 건 물론, 면전에서 뺨을 맞아도 할 말이 없는 만행이다.
‘죽고 싶다.’
살면서 이렇게 수치심을 느낀 적이 있던가. 제노비아와 세라가 괜찮다고 해도 나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더욱 비참한 건 이곳이 아니면 몸을 의탁할 곳이 없다는 거지. 막말로 황궁에 가서 ‘실례가 아니라면 궁 하나만 빌려주십시오.’ 라고 할 수는 없잖아. 황제라면 순순히 궁을 내어주겠지만, 나가는 날은 내가 결정하지 못할 터.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저 데려온 건 사도님이잖아요.”
둘 곳이 없어서 대충 꽃병에 꽂아둔 리시안느를 바라보자, 리시안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반박했다.
맞는 말이지만 본능적인 분노가 솟구쳤다. 리시안느가 불사만 아니었어도 내가 들고 다녔겠냐고. 적당히 처리해서 시체까지 불로 태웠지.
그런데 장생이가 남긴 파편을 저 녀석이 주워 먹을 줄, 파편의 효과가 이렇게 강력할 줄 누가 알았을까.
“누가 사도야.”
아무튼 분노와 씁쓸함을 억누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네가 데리고 다니는 거지 내가 따라다니는 거냐?’ 라는 말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니 별 의미도 없는 호칭에 태클을 걸 수밖에.
“죽음과 가장 가까운 분인 건 맞잖아요. 한 번 사도님은 영원한 사도님이에요.”
“내가 걔 주인처럼 지내는 거 못 봤어?”
“그, 그건! 죽음께서 봉인을 풀어준 사도님을 높게 평가하신 거예요! 사도님의 공이 크니 너그럽게 대하는 거라고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이이익…!”
얼굴이 붉게 물든 채 파르르 떠는 리시안느를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놀랍게도 장생이를 모욕하는 건 리시안느의 발작 버튼으로 유효하다.
그렇게 숭배하던 죽음이 장생이로 전락한 것도, 사도인 줄 알았던 내가 주인이라는 것도 리시안느에게 큰 충격일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신도라면 그 자리에서 죽음에 대한 신앙을 잃었을 터.
허나 리시안느는 여명 교단의 추기경이면서 사왕의 길을 택한 광인이다.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자신의 후배를 기다리며, 기약 없는 침묵에 빠지기를 택한 광신도다. 장생이의 아담한 모습과 눈물겨운 추태도 리시안느의 신앙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무서운 신앙이다.’
조금 섬뜩하기는 하다. 저 괴물 같은 신앙이 장생이가 아니라 전성기 시절 죽음과 결합됐다면? 하다못해 장생이가 신격을 잃고 전락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세상에 둘도 없을 끔찍한 조합이다. 에넨조차 완전히 소멸시키지 못한 악신과 그 악신을 숭배하는 시체 군단이라니. 마왕이 따로 없어.
“형.”
“어엉?”
장생이와 리시안느가 시간 차로 부활한 것에 안도할 무렵, 에리히의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봤다.
“미안한데 이제 나가줘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정중하고 직설적인 추방령에 몸이 굳고 말았다.
결국 이날이 오고 말았다. 하루 이틀 정도야 에리히도 형제의 정이 있으니 받아줬지만, 역시 사흘, 나흘 이상 끌고 가는 건 무리였다.
“좀 오래 있기는 했지?”
“아니, 뭐, 나는 더 있어도 괜찮긴 한데…”
뒷머리를 긁적이는 에리히의 모습에 감동하고 말았다.
형이 상처를 받을까 봐 애써 좋게 말해주는 동생. 이 얼마나 아름다운 형제애인가. 그동안 눈치 없는 머저리라 생각한 게 미안해질 정─
“형 여기 있는 거 형수들한테 들켰어. 계속 데리고 있지 말고 내보내래.”
“아.”
그 말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그래도 형수들이 이제야 알았을 리는 없잖아. 형이 걱정돼서 며칠은 쉬게 하고, 이제 받아줄 생각이니 내보내라고 한 거겠지.”
에리히치고는 정상적인 위로라 쓴웃음이 나왔다.
얘가 형제애도 형제애지만, 곧 결혼을 앞둔 새신랑이라 그런지 언변이나 자비심이 급격히 늘어난 것 같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동안 재워줘서 고맙다.”
“됐어. 애초에 여기 크라시우스 가문 저택이잖아. 소유권은 가주인 형한테 있는데 새삼스레.”
그렇게 말한 에리히는 잠시 리시안느를 바라보더니, 금방 시선을 거두었다.
리시안느의 정체가 궁금하지만 굳이 묻지 않는 자제심. 아무래도 물어봤자 좋은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한 모양이다.
“그럼 결혼식 때 보자.”
“그때도 호수에 있을 것 같으면 미리 말하고. 일 생겨서 출장 갔다고 말해둘게.”
“고맙다.”
미묘한 배려에 픽 웃음을 흘리며 다시 제도를 떠돌기 시작했고,
“반성은 충분히 했니?”
“앞으로는 주워오기 전에 상의부터 할게…”
“그래. 그러면 충분하단다.”
다행히 해가 떨어지기 전에는 저택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지즈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높이도 날아올랐다가 떨어졌다.
***
결혼식 직전에 형이 저택에 눌러앉는 사건이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형의 방문은 오히려 세라의 긴장을 풀어주었다.당장 눈앞에 예비 아주버님이 있는데 결혼으로 긴장할 새가 어디 있었을까.
물론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결혼식보다 아주버님이 더 큰 부담일 수 있다. 결혼은 찰나의 행사로 끝나지만 아주버님은 평생 볼 가족이니까.
하지만 세라와 형은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처음 보는 타인도 아닌데 세라가 긴장할 필요는 없었지.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형 덕분에 살았어.
‘본인이 쫓겨난 대가로 예비 제수를 달래다니.’
나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형이 저택에서 쫓겨─ 아니, 호수에서 노숙… 아니, 제도에서 방랑 생활을 한 덕분에 세라가 웃을 수 있었다. 동생과 제수를 위해 그 한 몸 불사르는 형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래도 나는 형 같은 가장이 되지 말자.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녀야 며칠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가는 건데. 솔직히 형수들은 형에게 일곱 번째 부인이 생겨도 ‘올 게 왔구나.’ 라며 넘어갈 텐데 말이야.
‘사왕 토벌전 때 팔이라도 떨어졌나?’
확실히 형수들이 예민하게 반응할 사안이면 형과 조카들의 안위 관련 문제다. 마침 형은 토벌전에 다녀온 입장이니 부상을 입었어도 이상하지 않고.
만약 부상 때문에 쫓겨난 거라면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형도 휴가 중에 종군한 입장이니 얼마나 서글펐겠나. 그런데 재수 없게 다치기도 해서 형수들의 분노와 걱정을 샀으니 서글픈 걸 넘어 서러웠겠지.
‘…난 쫓겨날 일은 없겠네.’
나는 형처럼 대륙 제일 검이 아니라 다행이다. 역시 사람은 적당히 유능해야 돼.
“하디네르 남작.”
“아, 이드라펜 후작 각하.”
앞으로도 적당히 유능하고 적당히 무능한 사람으로 살아갈 다짐을 하는 사이, 아인테르가 부인과 함께 찾아왔다.
근처에 다른 하객들도 있어서 평소처럼 말을 놓지는 못했지만, 말을 높이는 것 정도야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카데미에서 쌓은 인연은 말 좀 높인다고 사라질 수준이 아니니까.
“결혼 축하드립니다. 언제 세라 영애와 결혼하나 초조하게 지켜본 것이 얼마 전 일 같은데, 드디어 부원들의 염원이 이루어졌군요.”
“몇 년 전 일을 언급하시면 부끄럽습니다.”
“후후, 그러라고 한 거였습니다. 너무 티 났습니까?”
아인테르 나름의 농담에 나도 아인테르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민망하지만 아인테르의 말은 농담일지언정 틀린 말은 아니다. 나와 세라가 제과 동아리에 있을 때, 형이랑 부원들이 우리를 보고 얼마나 답답해했던가. 자기들도 연애 관련으로 잘난 편은 아니면서.
“그보다 남작과 세라 영애의 결혼식이 끝나면… 크라시우스 가문의 경사도 당분간 멈추겠군요.”
“예. 저도 가주님도 새로운 인연을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요. 테레사가 장성할 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아인테르의 말에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레사가 아카데미 졸업 직후 바로 결혼한다고 쳐도 18년은 지나야 한다. 4년 동안 쉬지 않고 몰아치던 결혼식을 18년이나 쉬면 조금 허전하고 섭섭할 수도 있겠어.
“음? 테레사 영애보다 소가주의 나이가 더 많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라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페디가 테레사보다 1살 더 많으니, 같은 나이에 결혼한다고 치면 페디의 결혼식이 더 빠를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나 같은 나이에 한다면 말이다.
“가주님의 피를 진하게 이었다면 순탄하게 결혼할 것 같지는 않아서…”
“하하! 그도 그렇군요!”
내 말에 아인테르는 하객들의 이목을 끌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심지어 아인테르 옆에서 침묵을 지키던 후작부인마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부디 형의 피를 덜 물려받았기를.’
그런 아인테르와 후작부인을 보다가 속으로 기도를 했다.
제발 우리 첫째 조카가 형보다는 첫째 형수를 더 닮았기를. 설령형을 닮더라도 기가 막힌 여성 관계만은 닮지 않기를.
크라시우스 가문이 결혼계의 샛별이 되는 건 나와 형으로도 족하다.
“우리 왔다.”
“우리 와써!”
‘아.’
기도를 하기 무섭게 페디를 품에 안은 형이 털레털레 걸어왔다.
그리고 나란히 다가오는 형과 페디를 보니, 내가 한 기도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거푸집으로 찍어냈나…’
둘이 부자 관계니까 막연히 닮았다고 생각은 했는데, 지금 보니 닮았다는 말도 부족할 만큼 흡사했다.
페디가 형의 여성 관계를 닮지 않으면 그게 더 기적일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