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54)
로판 속 공무원 754화(755/945)
마르의 부드럽고 따뜻한 충고 덕에 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외출은 멈추지 않았다. 마르의 충고를 들은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에도 여전히 저택을 나섰다.
이미 각 부서의 신참들과 만나겠다고 약속을 잡아뒀으니까. 이미 적지 않은 숫자의 부서들을 방문했으니까. 내가 먼저 약속을 잡고, 앞서 여러 부서들을 방문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캔슬 한다? 졸지에 바람맞은 장관들이나 실무자들에게 무슨 욕을 처먹으려고.
물론 욕을 처먹으면서 평판이 떨어지고, 평판이 떨어져서 퇴직까지 간다면 고려해 볼 만한데─ 황제라면 ‘네 업보는 열심히 일하면서 갚아라.’ 라고 하겠지. 안 봐도 뻔하다.
‘망할 새끼.’
황제를 떠올리니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그 새끼, 내가 맛이 간 상태라는 걸 알았음에도 고치기는커녕 좋다고 박수만 쳤다. 우리 개새끼가 아니라 느그 개새끼였어.
측근 중의 측근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위로도 해주고, 빈말로라도 휴가를 연장시켜주고, 때가 되면 은퇴시켜주겠다는 말 좀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내가 당장 은퇴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 은퇴할 수 있다는 희망 하나 가지는 게 그렇게 문제야?
‘문제기는 하지.’
머리가 차갑게 식고 나니 객관적인 시야를 가지게 됐다.
사실 26살 먹고 은퇴를 꿈꾸는 게 정상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황제에게 ‘나 은퇴 준비할 거니까 나보다 나이 많은 당신도 양위나 준비하쇼.’ 라고 말하는 수준이니까.
그래도 한 번 솟구친 분노는 도로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튼 황제가 개새끼인 건 변함이 없으니.
‘다시 태어나면 꼭 너 같은 상사 만나라.’
덤으로 나 같은 관운을 가진 채 태어나고. 그럼 인생이 아주 재미있을 거야.
오늘은 마도성 뉴비들과 만나기로 했다.
“어서 오십시오, 장관. 하디네르 남작의 결혼식 이후로 처음 뵙는군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그리고 마도성 청사로 다가가니, 무려 마도성 장관이 정문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상상도 하지 못한 화려한 대접이라 잠깐 움찔하고 말았다.마도성의 서열이 감찰성보다 아래기는 하지만, 같은 장관인데다 나보다 오래 관료 생활을 한 사람이지 않나. 이렇게 과도한 예의를 보일 필요는 없다.
“물론입니다. 저야 신혼을 즐기며 편히 쉬고 있으니 못 지낼 게 어디 있겠습니까? 오히려 장관께서 제국과 마법계의 발전을 위하여 분주히 움직이고 계시니, 제가 장관의 안부를 물어야겠지요.”
“하하, 참으로 민망하고 과분한 말씀입니다.”
과분이라는 단어까지 튀어나와버려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트릭시의 후광이 찬란하구나…’
마도성 장관이 정중을 넘어 저자세 수준인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트릭시의 남편이라는 간단하지만 명확한 이유 때문이었다.
트릭시는 대륙 마법계의 정점이자 원로. 아무리 행정부서인 마도성이지만, 마법과 관련된 만큼 마도성 인원 대다수가 마법을 익힌 자들이다. 그 수장인 마도성 장관은 말할 것도 없지.
덕분에 마도성 장관은 나를 동료 장관이 아니라 존경하는 업계 최고봉의 가족으로 대하고 있다. 뿌듯하면서도 민망한, 부담스러우면서도 기쁜 일이다.
‘우리 아이들도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10년이나 20년 정도가 지나 우리 아이들이 사회에 나서고, 그때도 내가 현직으로 구르고 있으면 우리 아이들도 내 후광을 받지 않을까?
이 아빠 덕분에 가는 곳마다 대우를 받고, 그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는 그런 인생을.
‘좋네.’
짧은 상상이었지만 괜히 흐뭇해졌다. 내가 걸어온 길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큼 보람찬 것은 없다.
“자,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장관께서 오신다는 말씀에 저를 비롯한 모든 관료들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오늘을 기다렸습니다.”
“갑작스레 무리한 요구를 한 놈에게 이리 신경을 써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무리라니요. 오히려 저희가 감사하지요. 막 마도성에 들어온 신참들은 마법사의 정체성이 강한 편인데, 장관께서 친히 격려와 조언을 주신다면 다들 영광으로 여길 겁니다.”
진심이 가득한 말이라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양심이 따끔거렸다. 마도성 장관은 내 방문을 이렇게 반기는데, 정작 나는 은퇴 각을 잡기 위해 간담회를 하자고 졸라댔다.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어.
“트릭시가 비록 마탑 소속이나, 마도성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도성은 마탑과 함께 제국 마법계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 아닙니까? 그래서 트릭시도 마도성의 미래들에게 좋은 말을 해달라 부탁했습니다.”
그렇기에 내 양심을 위하여 애써 듣기 좋은 말을 꺼냈다.
다행히 100% 거짓말은 아니다. 트릭시가 행정부서 중 마도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사실이니까. 그 관심이 업무적 관심인지, 아니면 사적인 관심인지 알 수 없을 뿐.
“그, 그렇습니까?”
그래도 뭐 어떤가. 듣는 사람이 좋아하면 그만이지 않겠나.
“마종공 각하께서 친히 관심을 가져주시다니. 그분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 가는 후배로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실제로 마도성 장관은 트릭시─ 를 앞세운 내 관심과 배려에 감동했는지, 묘하게 촉촉해진 목소리를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마치 지금의 감동을 조용하게 느끼고 싶은 것처럼.
마도성 장관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대회의실.
“저, 장관?”
“예. 말씀하시지요.”
“왜 장관께서도, 자리에 앉으시는…?”
“부끄럽게도 제가 나이만 많은 놈인지라, 요즘 젊은 친구들의 마음은 제대로 헤아리지 못합니다. 헌데 장관께서 신입들의 마음을 친히 달래주신다고 하니, 저도 귀한 가르침을 가까이서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참 간담회가 졸지에 두 장관이 주재하는 간담회로 돌변하였다.
말로는 가르침이니 뭐니 하지만, 아무래도 트릭시가 좋은 말을 부탁했다는 하얀 거짓말이 마도성 장관을 자극한 듯하다. 좋은 말을 같이 듣고 싶은 모양이지.
‘어쩌지 이거.’
심지어 이미 대회의실에는 신입들이 가득 앉아있음에도, 복도 너머에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장관만 난입하는 게 아닌 건가.’
어쩌면 부장과 과장급 인사들도 참여할 수 있는 상황.
저택으로 돌아가면 마도성 장관한테 덕담이나 보내 달라고 트릭시한테 부탁하자.
***
본인 부서에도 출근하지 않던 감찰성 장관이 모든 행정부서에 방문하는 건 실로 유쾌한 일이었다. 오죽하면 내 명을 받고 감찰 중 아니냐는 소문이 관료들 사이에서 돌겠나.
허나 장관의 유쾌한 기행은 내 명령이 아닌 자발적 선택이었다. 그래서 더 재밌는 것이지. 내 손이 닿지 않아도 알아서 즐거움을 주는 신하라니.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그러다 마도성에 방문한 장관이 마도성 장관을 비롯한 부장, 과장급 간부들과도 간담회를 진행했다는 보고가 올라올 때, 장관의 한계가 어디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이러다 모든 장관들을 상대로 강의라도 하는 거 아닌가? 주제는 대충 ‘인간이 예술적으로 미치는 법’ 같은 거면 적당하겠어. 아니면 ‘부질없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법’도 괜찮고.
…
‘하필 마도성인가.’
짧은 비웃음을 끝내고 살며시 미간을 짚었다.
안 그래도 마종공과 결혼하여 마법사들에 대한 영향력이 상승한 장관이다. 그런 상황에서 하필 마도성 수뇌부와 만남을 가지다니. 이건 장관이 의도한 게 아니라도 파벌 결성으로 나아갈 확률이 높다.
고작 만남을 가졌다는 것 자체로도 암암리에 파벌이 형성되는 경우도 있다. 마종공의 부군과 마도성 수뇌부가 만남을 가졌다면 누가 봐도 마종공의 승인하에 이루어진 회동이니까. 이제 장관은 마도성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장관. 요즘 바쁘게 돌아다니더군.”
그래서 통신구로 장관에게 연락을 걸었다. 너무 바쁘게 돌아다녀서 태양전까지 부르기는 미안할 정도니까.
– 예, 폐하. 혈기 넘치는 신참들을 보니 소신도 사그라들었던 의욕이 다시 생기는 기분이라, 다소 무리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 말에 픽 웃음이 나왔다. 이 세상 어느 신하가 황제 앞에서 의욕이 사그라들었다는 말을 당당히 하겠나.
“언제부터 짐도 모르는 사이에 마도성 장관이 신참이 된 건가?”
– 아.
아무튼 웃는 얼굴로 용건을 말하자 장관은 나지막한 탄식을 흘렸다.
“혹시 마도성 장관도 개를 키우고 있었나? 아니면 고양이?”
– …뱀을 몇 마리 기른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저런. 티티의 짝이 되기는 어렵겠어.”
통신구 너머로 보이는 장관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 폐하.
“말하게.”
– 폐하께옵서 염려하시는 건 소신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기에 소신이 먼저 파벌을 구성할 생각은 없사오며, 문화성과 해양성을 방문한 후로는 다시 저택에서만 지낼 예정입니다.
“음?”
장관의 선포에 잠깐 놀랐다. 저렇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대외 활동을 멈추겠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
‘원래대로 돌아왔군.’
맛이 갔던 장관이 결국 제정신을 차렸다. 확실히 지금 보니 눈동자에도 광기 대신에 표독함이 깃들었어.
아쉬운 노릇이다. 미친 장관이 굴러다니는 걸 보는 것도 즐거웠거늘. 그 즐거움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장관이 그렇게 말하니 믿음직스럽군. 그래, 그동안 관료들을 직접 다독이느라 노고가 많았네. 남은 일정도 무사히 처리하고, 푹 쉬도록.”
– 예, 폐하.
고개를 숙이는 장관을 보며 연락을 종료했다.
‘고생이 많기는 했지.’
장관은 문화성과 해양성 방문을 마지막 일정으로 삼았다.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고, 그냥 남은 부서가 그 둘밖에 없었다.
황제인 나조차 단기간 내에 모든 부서를 방문하지는 않는데, 휴가 중인 놈이 저러고 다니는 걸 보면 참.
‘난 저렇게 미치지 말아야지.’
사람은 몸이 튼튼한 것보다 마음이 건강한 게 우선 같다.
***
빛을 잃은 통신구를 조용히 품속에 넣었다.
망할 느그 개새끼. 나한테 이성이 있다는 걸 파악하자마자 놀리는 걸 멈췄어. 역시 내가 맛이 간 걸 알면서도 고의로 방치했다는 거잖아.
“개새끼.”
– 멍?
간담회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중, 우연히 퇴근길이 겹친 티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말고 다른 애 얘기하는 거야.”
그런 티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티티도, 그 새끼도 털이 노란데… 왜 우리 티티랑 달리 그놈은 그 모양일까.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