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59)
로판 속 공무원 759화(760/945)
아카데미 인근에 나타난 꽃밭은 아카데미 학생과 교직원들은 물론, 귀족들도 친히 행차하는 명소로 부상하였다.
물론 아카데미는 동아리 박람회 같은 행사가 아닌 이상 외부인에게 개방되지 않으나, 꽃밭의 위치는 아카데미 부지 내부가 아닌 도시 바깥이었다. 아무리 아카데미가 넓어도 거대한 꽃밭이 부지 내부에 생기는 건 곤란하지.
그래도 거리를 보면 아카데미의 부속 시설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들판을 뒤덮은 형형색색의 꽃들과 그 위를 배회하는 정령들은 빠르게 아카데미의 상징이 되었고,
– 칼. 잠깐 성으로 와줄 수 있겠니?
“괜찮습니다만,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 그으, 정령들이 성에 나타나기 시작했단다.
“…예?”
그 상징의 일부를 챙긴 대가인지, 타일글레헨 백작성에서 이변이 생겼다.
무려 정령들이 성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정신 나간 이변이.
‘그게 뭔.’
충격적인 소식이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콘스탄티나가 만든 꽃밭에서 정령들이 나타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번에 생긴 꽃밭은 세계수처럼 콘스탄티나의 힘이 듬뿍 깃든 장소이니, 세계수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꽃밭의 일부가─ 많아봤자 20송이도 되지 않는 꽃마저 정령들의 터전 역할을 한다고? 그게 가능한 건가?
‘나만 가져간 게 아닌데?’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꽃을 가져간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라 황제, 교육성 장관, 국토성 장관, 교장도 있다. 만약 그 사람들의 집이나 모친의 무덤 앞에 정령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면? 제국 곳곳에 정령들이 배회하기 시작한다면?
‘안 될 건 없나?’
생각해 보니 딱히 문제 될 건 없는 것 같다. 정령들은 불멸의 존재라서 인간들이 해를 끼칠 수도 없고, 꽃을 불태워도 세계수로 도망치면 그만이다.
오히려 난데없이 정령과의 동거를 하게 될 사람들이 걱정이지. 하급 정령들은 반딧불이처럼 빛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라, 밤이 되면 저택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이게 심하게 밝은 빛은 아니지만 자려고 하면 은근 거슬려.
게다가 간혹 화장실에서 마주치면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나를 비롯한 저택 사람들이 그렇게 지내고 있잖아.
“금방 가겠습니다.”
마침 내 근처를 지나가던 하급 정령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백작성에 정령이 얼마나 나타났는지, 나타났다면 어떤 등급의 정령들이 나타났는지 파악하는 게 먼저다.
하급 정령만 수백 마리가 나타났다면 당분간 부모님과 사용인들이 잠을 못 잘 수도 있다.
성에 도착하자마자 활기차게 뛰어노는 테레사가 눈에 들어왔다.
“빤짝이! 가치가!”
“처, 천천히 뛰어라! 그러다 넘어진다!”
정확히는 정령들을 쫓아 달리는 테레사, 그 뒤를 바짝 따라붙어 달리고 있는 평화가 보였다.
우리 평화. 분명 멋지게 생긴 푸른색 호랑이지만, 애석하게도 덩치는 새끼 호랑이 수준에 불과하다. 덕분에 테레사가 작정하고 달리면 따라붙는 것도 힘들어하지. 쟤도 어서 자라야 몸이 편해질 텐데.
“웅? 오빠?”
“주인?”
“응. 나 왔어.”
아무튼 신나게 달리던 테레사는 나를 발견하더니, 활짝 웃으며 나에게 달려왔다.
“오빠! 안아져!”
정령과 노는 걸 포기하고 오빠의 품을 택한 테레사.
너무 기특하고 귀여워서 기꺼이 테레사를 안아줬다.
“뼝화도 안아져!”
그 와중에 자기와 함께 놀던 평화도 잊지 않고 챙기는 센스를 보였다.
정작 평화는 테레사가 내 품에 안기자마자 슬금슬금 도망치려 했지만, 뭐 어쩌겠나. 우리 테레사가 원한다면 평화도 내가 안고 있어야 한다.
“주인. 난 내 발로 걷는 게 편한데, 바닥에 있으면 안 되겠나?”
“안대!”
“안 된대.”
“슬픈 일이로군…”
착잡하게 중얼거린 평화는 모든 걸 포기한 표정으로 내 품에 안겼다.
그리고 평화가 옆으로 오자, 테레사는 정성을 다해 평화를 조몰락거리기 시작했다. 과장 좀 보태면 평화로 떡을 만들 기세였다.
“가치 안기니 죠치?”
“그래. 좋다…”
“히히, 나두 죠아!”
테레사의 말에 평화는 귀와 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도 아까까지 네 발로 걸어 다니던 걸 보면 저택에 있을 때보다는 덜 힘든 모양이다. 저택에서 우리 아이들과 놀아줄 때는 바닥에 늘어져 있던 시간이 더 길었지.
역시 성수들을 주기적으로 휴가 보내는 건 옳은 선택이었다. 이 주인의 자비에 늘 감사해라.
“마따, 오빠! 반쨕이들 따라가져!”
“쟤네들?”
“웅!”
정령들을 가리키는 테레사를 보다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오빠는 엄마부터 만나야 돼.”
“히잉…”
“엄마 만나면 엄마까지 셋이서 같이 놀까?”
“와! 죠아!”
실망했다가 바로 기뻐하는 테레사의 모습에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테레사도 나이만 보면 우리 아이들과 다를 것이 없으나, 우리 아이들과는 다른 귀여움이 있다. 말로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동생이라 더 가까운 건가?’
부모-자식의 관계보다는 오빠-동생의 관계가 더 가볍고 가까울 수밖에 없긴 하다.
“테레사.”
“웅?”
“저 반짝이들이 생기니 어때? 괜찮아?”
“웅!”
내 질문에 테레사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테레사 입장에서는 새로운 놀 거리 겸 친구가 생겼으니 기쁘겠지. 물어볼 상대를 잘못 정했어.
“반짝이들 자아아안-뜩 있어! 자꾸자꾸 늘어나!”
“…늘어나?”
심상치 않은 말이라 잠깐 움찔하고 말았다.
어린아이 입장에서는 열만 넘어가도 많은 숫자지만, 저 자꾸자꾸 늘어난다는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진짜다. 1시간 정도 전까지는 스물이 좀 넘었는데, 지금은 쉰이 넘게 저택에 있을 거다.”
“허어.”
심지어 연신 귀를 주물럭 당하고 있던 평화도 테레사의 말에 신뢰성을 얹어줬다.
1시간 사이에 무려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러면 오늘 하루가 끝날 때 즈음이면 얼마나 늘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 백은 우습게 넘어갈 수도 있어.
‘여기도 저택 꼴이 되는 건가.’
무심코 눈을 감자 정령들과의 동거가 저절로 떠올랐다.
잠을 자려던 사용인들에게 눈뽕을 하던 정령들. 밤에 복도를 지나가다가 도깨비불처럼 등장하던 정령들. 급하게 화장실에 들어가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정령들.
그 기가 막힌 경험들을 부모님과 테레사, 사용인들도 겪게 될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오묘했다.
***
칼이 선물로 주었던 데이지를 바라봤다.
칼에게 처음으로 받아보는 꽃 선물. 빌리에게도 몇 번 받아보지 못한 꽃 선물.
‘이렇게 예쁜 꽃이 세상에 또 있을까.’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이 서툰 남자들이 꽃을 선물로 준비하는 건 상당한 정성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나도 한 아버지의 딸이자, 한 남편의 아내이자, 두 아들의 어미로서 잘 알고 있다. 그냥 선물과 꽃 선물은 매우 다른 존재다.
그럼에도 칼은 이렇게 예쁜 꽃들을 주었다. 그것도 평범한 꽃이 아닌, 신이 만들었다는 신성한 꽃을.
‘어떤 보물이 이것보다 귀할까.’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꽃병에 정성스레 꽂아둔 데이지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 어떤 보물보다도 이 꽃이 더 귀하다. 화려한 권세를 상징하는 귀족의 인장도,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도, 장인의 열정에 담긴 장신구도 이 꽃보다 못하다. 그만큼 칼이 나에게 준 선물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 마음에 든 것 같아서 다행이네.
“아, 네.”
다만 이 선물이 예상외의 손님도 불러들일 줄은 몰랐다.
허공을 날아다니는 노란색 뱀. 가까이 있으면 어째서인지 포근한 느낌을 주는 뱀.
과거 엘프 주거 지구에 갔을 때, 그곳에서 본 땅의 정령왕이라는 분이었다.
– 콘스탄티나가 신경 써서 만든 꽃이니 사막에 내던져도 멀쩡하겠지만, 그래도 정성스레 돌봐줘. 그 꽃 덕분에 내가 세계수가 아닌 다른 곳에도 올 수 있는 거거든.
마치 헤엄을 치는 것처럼 허공을 누빈 땅의 정령왕은 꽃병 근처로 내려오더니, 똬리를 틀며 나를 바라봤다.
– 세계수도 좋지만 너무 자주 봐서 지겨워. 이렇게 다른 곳도 구경해야 여유가 생기는 거지. 안 그래?
“맞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포근한 곳이라도 평생 그곳에만 지낼 수는 없지요.”
– 음. 역시 은인을 낳은 사람이라 그런지 말이 잘 통해.
내 대답에 땅의 정령왕은 흡족하다는 듯 꼬리를 살랑거렸다.
‘이게 무슨 일인지.’
얼굴은 미소를 유지하면서도 머리는 바쁘게 돌아갔다.
오늘 아침, 데이지가 빛을 내뿜더니 그 근처에서 작은 정령들이 하나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데이지를 통해 다른 곳에서 넘어오는 것처럼.
그렇게 늘어나기 시작하던 정령들은 수십에 이르더니, 방금 전에는 땅의 정령왕도 모습을 보였다. 작은 정령들뿐만 아니라 왕도 이 데이지를 통해 이동할 수 있는 거다.
‘땅만 올 수 있는 것도 아닐 거야.’
정령왕은 총 넷. 아직 불과 물, 바람의 정령왕이 남아있다.
어쩌면 네 정령왕이 전부 넘어올 수도 있다. 오면 안 될 이유는 없지만, 신의 친우라는 정령왕들이 일개 귀족의 성에 모이는 건… 과연 정상적인 일일까?
– 똑똑.
“어머니. 저 왔습니다.”
그런 고민을 하던 중, 노크 소리와 함께 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들어오렴.”
– 오. 은인도 왔네?
내 대답과 동시에 하품을 하던 땅의 정령왕이 스르륵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날아갔다.
– 은인. 여기서 보니 반가아아아악─!
“와! 뱀! 절째랑 똑같태!”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온 칼─ 정확히는 칼의 품에 있던 테레사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우리 테레사. 며칠 사이에 손이 더 빨라졌구나.
***
테레사의 손에 잡혀 비명을 내지르는 땅의 정령왕.
하급 정령이 아닌 정령왕도 나타났다는 사실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게 말이 되나.’
어이가 없다. 불의 정령왕이 꽃밭에 나타난 거는 이해할 수 있는데, 고작 꽃 몇 송이가 정령왕을 불렀다고? 내가 하급 정령까지는 어떻게든 넘어가려 했지만 왕은 선 넘었잖아.
‘대체 무슨 일이지?’
어머니 옆에 있던 꽃병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이 이변은 우리 성에서만 생긴 것 같다. 황제와 두 장관, 교장이 가져간 꽃에서도 정령왕이 등장했다면 절대 지금까지 조용할 리가 없다. 이미 황제의 부름이 있었겠지.
내 추측이 맞는다면 다행이면서도 복잡한 일이다. 일단 정령들이 여기저기 등장하는 건 피했으니 다행인 일이고,
‘왜 저 꽃만 반응하는지 알아야 한다.’
꽃밭을 벗어난 꽃 중에 저것만 정령들의 출입구가 된 이유를 파악해야 하니, 끔찍할 정도로 복잡한 일이다.
– 으, 은인! 나 좀 꺼내줘…!
“아, 예.”
땅의 정령왕의 애절한 부탁에 테레사의 손을 토닥였다.
세계수에서는 요정들한테 털리더니, 우리 성에서는 테레사한테 털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