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6)
보야르에 머문지도 며칠이나 지났다. 그동안 식사도 괜찮았고 숙소도 훌륭했다. 휴양지로 이름 높은 보야르기에 볼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온다고 했으면서.’
하지만 다른 이유로 기분이 좋지 못해 애꿎은 방문만 째려봤다. 왜 열리지 않는 거야. 기껏 방이 어딘지도 말해줬는데, 기껏 용기 내서 말한 건데. 놀러 오겠다고 약속 했으면서.
‘시간도 많으면서.’
점점 커지는 야속한 마음에 안고 있던 베개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차라리 칼이 바쁘다면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것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속이 좁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칼은 첫날과 둘째 날을 제외하면 리조트에만 머물고 있었다. 가끔 제과 동아리와 같이 인근 관광지를 다녀오는 걸 제외하면 방 밖으로 나오는 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분명 시간이 되면 오겠다고 해서 그 말만 믿고 기다렸는데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다.
‘너무해.’
치사하게 사람을 기대하게 해놓고 이렇게 방치하다니. 카지노에 가지 않겠다는 약속은 잘 지키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왜 이 약속은 지키지 않지? 그때도 손가락을 걸었어야 했나? 역시 약속은 증거를 남겨야 해.
‘정말 먼저 가야 하나?’
순간 떠오른 생각을 애써 고개를 저으며 털어냈다.
먼저 칼의 방으로 찾아가고 싶은 욕구는 이미 몇 번이나 치솟았었다. 하지만 참아야 해. 레이디가 방까지 찾아가는 건 보기 좋지 않으니까. 너무 안달 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밀고 당기는 게 중요하니까.
응, 정말 중요하니까.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언니들이랑 유모도 그렇게 말했어. 확실히, 확실히 이렇게 하는 게 맞아.
– 똑똑
그리고 기약 없는 인내는 마침내 꽃을 피웠다. 결국 칼이 먼저 왔잖아. 칼도 나를 잠시 밀려고 한 것 같지만 어림도 없지. 역시 칼은 내 옆에 올 수밖에 없다.
야속함과 서운함은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만족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네, 들어오세요.”
“선배. 저예요.”
그리고 금방 가라앉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칼이 아닌 루이제 영애였으니까.
“아, 루이제 영애.”
실망스러웠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나에게 용무가 있어 찾아온 손님이고, 루이제 영애는 그럭저럭 괜찮은 후배니까.
“어서 와요. 아침부터 무슨 일이죠?”
“저희끼리 사파이어 해변에 가려는데, 선배도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실래요?”
조심스레 묻는 루이제 영애의 말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루이제 영애가 말하는 저희라면 제과 동아리, 제과 동아리라면 당연히 칼도 포함.
그리고 장소는 둘째 날에 가려다가 실패한 해변. 에메랄드가 아닌 사파이어 해변이라는 아주 사소한 차이점이 있지만, 그건 정말 사소한 문제기에 전혀 상관없다.
“오라버니도 전에 같이 못 가서 아쉽다고 꼭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 말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조금은 무뚝뚝한 칼이 그런 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칼도 해변에 같이 간다는 확답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칼에게 공을 돌리는 루이제 영애의 모습도 썩 마음에 들었다.
“좋아요. 같이 가도록 해요.”
기껏 사두고 꺼내지도 못한 수영복을 꺼낼 기회가 왔다.
드레스 때도 아름답다고 해줬어. 이것도 마음에 들어할 거야. 분명 그럴 거야.
***
자다가 루이제에게 소환당했다. 이번에는 바다를 가자고 한다.
“마르게타 선배도 같이 가기로 했어요. 오라버니도 같이 가면 좋아할 것 같은데…”
바다까지 가는 건 조금 귀찮아서 거절할까 했지만, 하필 마르게타가 간다고 해서 거절하지도 못했다. 이미 크라켄 토벌 때문에 마르게타의 제안을 거절한 전적이 있어서 마음이 영 좋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불참하기는 좀.
한 번은 그저 시간이 안 맞았다고 생각해도 두 번이나 어긋나면 괜히 자신을 피한다고 오해할지도 모른다. 은근히 마음 여린 마르게타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니까. 다행히 크라켄을 찾느라 지겹게 본 녹조 바다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하고.
푸르게 빛나는 사파이어 같아서 사파이어 해변이라 불리는 곳. 그런데 바다는 원래 푸르지 않나?
‘초록색보다는 낫겠지.’
뭐, 이름이 어떻든 무슨 상관일까. 바다는 보기 좋으면 그만이다.
“여기가 더 좋은 것 같은데?”
“에메랄드 해변은 바다라기보다 작품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청량한 느낌은 푸른색이 더 잘 주는군요.”
실제로 사파이어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녀석들의 반응도 괜찮았다. 괜히 특이한 색의 바다여도 처음 볼 때나 신기하지, 결국 익숙한 푸른색으로 돌아오는 법이다.
“명성만큼 멋진 곳이네요. 칼 영식은 마음에 드나요?”
지들끼리 숙덕거리다가 아인테르를 바다에 집어 던지는 부원들을 보는 사이, 등 뒤에서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스스로는 담담하게 말하려고 하지만 묘한 긴장감이 담겨있는 목소리.
뒤를 돌아보자 언제나처럼 당당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어딘가 빳빳하게 굳은 마르게타가 보였다.
‘본인이 제일 부끄러워하네.’
그런 모습에 슬쩍 입꼬리가 올라갔다. 박람회 연회 때도 느낀 거지만 마르게타는 자의로 해놓고도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나아가는 용기는 정말 대단하지만.
“예, 마음에 듭니다.”
“후후, 다행이네요. 푸른빛이 예쁘기는 하죠?”
“전 붉은 게 마음에 든다고 한 겁니다.”
“녯?”
마르게타의 머리와 어울리는 붉은 수영복. 심지어 언제나 품위를 지키는 공녀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과감한 비키니.
그 모습을 보고 가감 없이 마르게타를 칭찬하니 금방 얼굴이 붉어져 발음이 뭉개진 말만 새어 나왔다. 바다 얘기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자신에게 꽂히니 많이 놀란 모양.
“정말 예쁩니다, 마르.”
“그, 그, 그으…”
“보지 못했다면 후회했을 정도군요.”
푹 찌르면 터질 것 같다는 말이 왜 생겼는지 알 수 있었다. 더 빨개질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얼굴이 붉어진 마르게타는 입만 몇 번 달싹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수비에 취약한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로 변함이 없구나.
“그, 그렇죠? 칼과 바다를 가는 건 처음이라 특별히 신경 썼어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들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미소를 지었다. 공격에 쓰러지지 않고 반격하다니,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렇습니까? 특별히 입은 거라니 다행이군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아까울 정도입니다.”
“네, 네에에, 고마워요…”
안타깝게도 아직 두 번은 못 버티는 것 같지만. 그래도 무려 두 번이면 장족의 발전이니 마르게타도 나름대로 단련한 것 같다.
마르게타가 침묵 상태에 돌입하자 바다에 들어가 있던 루이제가 다가왔다. 온몸이 화려하게 젖은 것이 그새 물폭탄을 맞은 모양. 설마 저 미친 것들이 루이제도 집어 던지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겠고, 파도라도 정통으로 맞았나.
‘분홍색이네.’
드레스를 입었을 때도 느낀 거지만 역시 루이제는 분홍색이 잘 어울린다. 아무래도 머리색에 맞추는 게 무난해서 그런가.
“어라, 아직 안 갈아입으셨어요?”
마르게타와 달리 아직 평상복 차림인 나를 보고 루이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됐어. 아침이라 조금 춥네.”
“아, 죄송해요. 점심에 올 걸 그랬나 봐요.”
“괜찮아. 애초에 물에 들어가는 건 별로 안 좋아해서. 보는 걸로도 충분해.”
말은 그렇게 했어도 딱히 날이 춥지도 않고 물에 들어가는 걸 싫어하지도 않는다. 뻔한 클리셰 수준이라지만, 웃통을 까기에는 조금 곤란한 사정이 있는지라.
“영원한 푸른 하늘께 네놈을 마지막 제물로 바치리라!”
아직도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은 공포 그 자체였던 목소리가 떠올라 무심코 인상을 쓸 뻔했다. 카간, 그 개같은 새끼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빅엿.
‘뒤질 거면 곱게 뒤질 것이지.’
그 새끼가 날린 최후의 일격에 제대로 몸을 베였었다. 진짜 그때는 죽는 줄 알았는데. 도대체 검에 무슨 짓을 했는지 마지막에 베인 상처는 더럽게 회복이 안됐다.
잘린 사지마저 치료가 가능한 마법과 신성력의 힘으로도 출혈을 막고 살을 붙이는 게 겨우였지. 덕분에 딱히 등의 상처를 수치로 여기지 않음에도 상반신에 긴 스크래치가 생겼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사지 중 하나가 베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회복도 제대로 안되는데 하마터면 팔 하나를 새로운 시대에 두고 오거나 ‘붉은 다리 칼’이 될 뻔했으니.
“얼굴은 멀쩡해서 다행이다… 얼굴 빼면 잘난 게 없는데.”
“너는 머리라도 다쳤냐. 기껏 한다는 말이.”
그래, 헤카테가 했던 말처럼 얼굴이 당한 것도 아니라 다행이다. 얼굴이 다쳤다면 가면을 쓰고 다녔어야 했을 테니. 답답해서 어떻게 살았을까.
사지도 얼굴도 아닌 고작 몸통을 베였다. 그 자리에서 일곱 중 다섯이나 카간의 손에 쓰러졌던 걸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끝난 부상이겠지.
“그러면 저하고 같이 있어요. 잠깐 쉬다가 다시 들어가려고요.”
“잘됐네요. 저도 이따가 들어가려 했으니 셋이 있죠.”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루이제와 마르게타의 목소리가 들려 정신이 돌아왔다.
조심스레 상처가 있는 부분을 옷 위로 매만졌다. 예전에는 옷에 닿기만 해도 따가웠는데 요즘은 아무렇지도 않아 다행이다. 카간의 저주도 유통기한이 2년 정도였던 것 같다. 더럽게 오래 가긴 하네.
“여기, 돗자리도 깔아뒀어요!”
“그래, 고마워.”
돗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치며 말하는 루이제의 모습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 쉬러 온 곳이니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은 이 정도만 하자.
“부인이 남편 얼굴 걱정하는 게 이상해?”
“부인, 지랄은 거기까지만 합시다. 상처가 울려서 미칠 것 같아.”
…그래, 이 정도까지만 하자.
아무래도 녀석들 기일이 다가와서 그런지 별 생각이 다 드네. 이러지 않아도 참배를 잊을 리는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