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60)
로판 속 공무원 760화(761/945)
하늘을 누비던 땅의 정령왕은 바닥에 축 늘어지고 말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미안하나, ‘땅’의 정령왕이니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싶다. 당사자가 들으면 화낼 게 뻔하니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 요정들을 피해서 온 곳인데… 여기도 딱히 다를 바가 없구나…
땅의 정령왕의 중얼거림에 평화가 씁쓸한 표정으로 정령왕을 바라봤다.
너 왜 저런 말에 동질감 느끼는 건데. 함부로 남의 말에 공감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여럿과 놀아주는 것보다는 한 명이 낫지 않습니까?”
– 그건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말에 땅의 정령왕도, 평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이한 광경이다. 한때 전쟁이라는 흉악한 이름으로 군림하던 평화, 콘스탄티나의 친우인 땅의 정령왕.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두 존재가 우리 성에서 의기투합하는 것에 성공했다.
악신이고 정령왕이고 육아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뜻이겠지. 역시 세상을 바꾸는 건, 세상을 이끌어나가는 건 아이들이다.
– 그런데 조금 이상하네? 평범한 인간한테 잡힌 건데 충격이 생각보다 컸어.
꿈틀꿈틀 허공으로 떠오른 땅의 정령왕은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테레사를 바라봤다.
확실히 그 말을 듣고 나니 이상하기는 하다. 땅의 정령왕이 툭하면 요정들한테 붙잡혀 비명을 내지르지만, 안타까운 모습과 별개로 정령왕은 정령왕이다. 신의 친우라고 불리는 고귀한 개체 중 하나다.
그런 땅의 정령왕이 평범한 인간인 테레사의 손에 붙잡혀 비명을 내지른다? 단순히 아이와 놀아주기 위해 연기를 했다 치기에는 너무 리얼하고 재빠른 반응이었다. 그게 연기였으면 땅의 정령왕에게 박수를 보내야 할 정도로.
– 황태녀보다 자질이 있는 것 같은데?
“황태녀 전하, 말씀이십니까?”
의외의 말인지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테레사한테 쥐어 뜯긴 것과 자질이 무슨 상관이며, 이 타이밍에 황태녀는 왜 나오는가.
– 예전에 세쌍둥이가 축복을 받으러 왔을 때 황태녀도 같이 왔었지?
“예. 그랬지요.”
– 그때도 황태녀가 내 꼬리를 잡고 휘둘렀는데, 인간은 자연과 얼마나 친하냐에 따라 정령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이 달라지거든. 그런데 쟤가 잡을 때는 황태녀가 잡았을 때보다 아팠어.
그 말에 슬쩍 테레사를 내려다봤다.
정령에게 얼마나 물리 대미지를 입힐 수 있느냐에 따라 자질이 갈리는 건 오묘한 일이나, 아무튼 정령왕이 공인했으니 거짓말은 아닐 거다. 그렇다면 테레사에게 정령사의 자질이 있다는 뜻.
– 아무래도 모친 쪽 영향 같아.
“네?”
이번에는 내가 아닌 어머니가 놀랄 차례였다.
내가 알기로 정령사의 자질─ 자연이나 정령과의 친화력은 인간보다 엘프가 압도적이라고 들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귀한 정령사 중에서도 인간 정령사는 더더욱 귀하다고 했고.
그런데 어머니에게 정령사의 자질이 존재했고, 그 자질이 테레사에게도 이어졌다? 결코 가볍게 넘어갈 이야기가 아니다.
– 혹시 조상 중에 시넨, 레오나르도, 오른, 비니에라는 인간이 있어?
“아, 네. 시넨 아라스라는 분이 계시기는 했습니다.”
– 오. 시넨 후손이었구나. 듣고 보니 닮은 것 같기도 하네.
어머니의 대답에 땅의 정령왕은 스르륵 어머니에게 날아가 어깨 위에 안착했다.
– 시넨은 몇 안 되는 인간 정령사 중에서도 유독 뛰어난 애였지. 아쉽게도 우리와 계약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세계수가 불타기 전에는 우리의 대화 상대가 되어주기도 했어. 시넨의 수명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 그렇군요.”
– 그리고 시넨의 피가 흐르고 흘러 너랑 저 아이에게도 발현된 모양이야. 확실해.
그렇게 말한 땅의 정령왕은 다시 몸을 띄우더니, 이번에는 데이지 쪽으로 날아갔다.
– 이게 은인이 가져온 꽃이기도 하고, 시넨의 후손이 기르고 있어서 정령계와 이어진 것 같아.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라 인연이 겹쳐서 생긴 일인 거지.
“저기.”
조용히 땅의 정령왕이 하는 말을 듣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다른 꽃들 주변에 정령이 생길 일은 없다는 겁니까?”
– 응. 다른 사람들이 꽃을 가져가도 이럴 일은 없을 거야. 그 사람들은 은인이 아니고, 기를 사람들도 시넨의 후손이 아니니까.
확신이 가득한 대답이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황제가 잠잠하기에 우리 성만 문제일 거라 추측하기는 했다. 그래도 막연한 추측보다는 왕의 확답이 확실한 건 당연한 일.
‘다행이다.’
제국 곳곳에 정령이 퍼지는 일은 막았다. 황제한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멱살 잡히는 것도 피했어.
– 흐으으으음.
그 와중에 무언가 고심하듯이 침음을 흘리던 땅의 정령왕은 슬쩍 테레사에게 다가왔다.
– 좋아. 이런 인연은 보기 힘드니, 이 아이한테도 축복으으으으으을!
“뺌! 너두 나랑 가치잇서!”
– 그, 그만! 아니, 적어도 살살!
선의로 다가온 땅의 정령왕은 테레사의 순수함에 희생되고 말았다.
미안하다. 그래도 요정들에게 쥐어 뜯기는 게 일상이잖아. 이 정도는 너그럽게 봐줘.
– 추, 축복! 축복 줄 테니까! 어디 가서 못 받는 왕의 축복이니까아아아아!
점점 처절하고 안쓰러워지는 비명 소리에 조용히 테레사의 손을 토닥였다.
이제 그만 이 가련한 뱀을 놓아줘. 불쌍한 뱀이야.
“평화 있잖아. 평화랑 놀자.”
“주인?”
평화가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애써 무시했다.
솔직히 너 테레사랑 노는 조건으로 휴가 온 거잖아. 이상한 애가 고통받고 있으면 네가 대신 희생해야지.
***
코르부스가 국립묘지에 찾아왔었다.손에는 새하얀 백합을 든 채로.
너무 자주 오면 아내가 불편해한다며 정해진 날에만 오던 아이였는데, 웬일로 예정되지 않은 날에 방문하여 조금 놀랐었다.
“무슨 일로 온 것이더냐?”
“전대 로드를 뵙습니다.”
내 부름에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던 코르부스. 그런 코르부스에게 적당히 대답을 하고 용건을 재차 묻자, 민망하다는 듯 백합을 들어 올렸었다.
“아내에게 줄 선물이 생겨서, 직접 전해주고자 왔습니다.”
“그렇구나.”
생각보다 사소하고도 따뜻한 이유라 웃음이 나왔었지. 군주의 의무를 중시하면서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이 딱 그이를 닮았기에.
우리 드래곤들에게 있어 300년은 찰나의 시간이지만, 인간들에게 300년은 긴 세월이다. 첫 번째 황제인 그이와 달리 코르부스는 열여섯 번째 황제다.
그런데도 그이의 모습이 조금이나마 코르부스에게 보이다니. 이 얼마나 놀랍고도 신기한 일인가.
“신성함이 느껴지는 선물이구나. 분명 하늘에 있을 너의 아내에게도 그 마음이 닿을 것이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시금 고개를 숙인 코르부스는 아내의 묘비로 가더니, 한참이나 묘비를 닦고 나서야 백합을 땅에 내려놓았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꽃이기에 가만히 둬도 멀쩡할 테지만, 코르부스는 이 제국을 위해 인생을 바친 아이. 그런 아이가 먼저 떠난 아내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다. 명색이 국립묘지 관리인으로서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코르부스가 두고 간 꽃을 정성껏 관리했고,
– 으응?
“으음?”
푸른색 거북이가 꽃 옆에 툭하고 튀어나왔다.
“정령왕?”
– 드래곤?
이윽고 나도, 푸른 거북이도 상대의 정체를 눈치챘다.
저 거북이는 정령이다. 그것도 물을 다루는 정령들의 정점인 물의 정령왕이다.
‘왜 이곳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존재와 대면한지라 잠시 침묵을 지켰다.
정령들은 세계수가 불탄 이후로 대륙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최근 세계수가 부활하여 다시 나타났다고는 들었으나, 설마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 혹시 로드인가?
“로드였었지. 지금은 내 아이에게 물려줬다.”
– 세계수가 불탄 이후로 많은 일들이 있었군.
내 대답에 물의 정령왕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마치 이곳이 어디인가 파악하려는 것처럼.
– 무덤?
“제국의 국립묘지다. 이곳은 그중에서도 황실의 일원들이 묻힌 곳이고.”
– 아니, 드래곤이 왜 국립묘지에…?
“정령왕도 나왔는데 드래곤이라고 안 될 게 있나?”
딱히 대꾸할 말이 없는지 물의 정령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정말 무슨 일이지? 내가 알기로 정령왕을 포함한 정령들은 오직 세계수 근처에만 머무를 수 있다. 예외가 되는 건 정령사와 계약을 맺었을 때뿐이다.
헌데 정령왕은 아무나 계약할 수 없는 존재이며, 애초에 이 근처에는 정령사라고 할 존재도 없다. 물의 정령왕은 말 그대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이곳에 온 것이지?”
–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네만.
“뭐?”
무책임한 발언이라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일은 모르겠다는 말로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국립묘지 전체는 내가 관리하는 일종의 둥지이며, 어떠한 변수도 허락되지 않는 나만의 공간. 그런 소중한 공간에 정령이라는 변수가 개입되었다.
지금은 무해한 정령이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 고작이나, 만약 정령이 아닌 사특한 존재가 기습적으로 나타난다면? 그것도 내가 멀리 있는 사이에─ 그이의 묘비에 나타난다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런 일이 터지면 다시금 세상에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원인을 알아낼 것이다. 그리고 관련된 모든 존재를 엄히 처벌할 것이다.
– 대충 짐작 가는 건 있으니 그렇게 보지 말게. 아무리 내가 죽지 않는 존재여도 로드는 무서워.
그렇게 말한 물의 정령왕은 묘비 앞에 놓인 백합을 바라봤다.
– 이미 알고 있겠지만 저 꽃은 콘스탄티나의 힘이 깃든 꽃일세. 아무래도 저 꽃이 정령계와 이 세계를 잇는 통로가 된 것 같네.
“고작 꽃 몇 송이가?”
– 고작은 아니지. 신의 힘이 깃들었고, 드래곤 로드의 손길이 닿았으니까.
나도 연관되었다는 말인지라 작게 혀를 찼다.
그래도 내 손이 닿아서 생긴 문제라면 이런 변수가 추가적으로 터지지는 않을 터.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이다.
– 만약 그대가 불편하다면 정령들이 이쪽으로 건너오는 건 막도록 하지. 어차피 여기 말고 갈 곳이 늘었으니, 하나 정도 막아도 반발은 없을 거야.
“됐다. 정령들이 답답하게 지내는 건 나도 익히 알고 있으니까.”
물의 정령왕의 말에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통제할 수 있는 변수는 더 이상 변수가 아니고, 추가적인 이변이 없다면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국립묘지를 떠돌며 망자들의 안식을 보듬는 정령. 황실과 제국의 권위를 드높이는 일이지 않나. 그이도 기뻐할 일이다.
– 자비로운 처우에 감사를 표하지. 소싯적의 흉룡이었다면 이런 대화를 하기도 전에 꽃이 꺾였을 텐데 말이야.
그 말에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확실히 왕년의 아텔리우스는 화끈하다는 말로도 부족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