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65)
로판 속 공무원 765화(766/945)
몸이 아팠던 리제의 유년 시절을 아름답게 장식해 준 작품들.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던 리제를 잠깐이나마 웃을 수 있게 해주었던 작가들.
발크로스 왕국이 문화 강국이 아니라 문화 불모지였어도, 그 두 가지가 발크로스에 있다면 신혼여행지로 정하기에 충분하다. 사랑하는 아내의 추억을 만들어 준 나라인데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가겠나.
하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가는 건 신혼여행의 특별함을 살릴 수 없다. 리제에게 깜짝 선물을 주기 위하여 문화성 장관에게 달려가 지극히 사적인 부탁을 하였고,
[ 당사자들에게 확약을 받음. 두 작가도 영광스러운 만남을 기대하겠다고 했으니, 언제 방문해도 문제가 없을 것. ]원하던 대답을 받을 수 있었다.
‘좋아.’
통신구를 품속에 넣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 내의 인물, 혹은 타국의 귀족이라면 이렇게 걱정하지 않았을 거다. 내 입으로 내뱉기에는 부끄러운 말이지만, 솔직히 내가 만나자고 하면 네 발로 기어 올 귀족들은 많고도 많다.
다만 타국의 평민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제국인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기에 나와 연관될 일이 지극히 적지. 그렇기에 내 눈치를 보며 만남에 응해줄 필요가 없다.
‘역시 인맥이 최고야.’
허나 문화성 장관이라는 걸출한 인맥 덕분에 타국 작가들과의 만남이 성사됐다.타국 평민들에게 먹힐지 장담할 수 없는 내 위명보다, 대륙 문학계와 예술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문화성 장관을 내세우는 것이 옳았다.
새삼 문화성 신입 공무원 간담회를 꾸역꾸역 진행한 과거의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만약 그때 간담회를 취소했다면 이런 부탁은 절대 못 했을 테니까.
‘알렌과 로데사라.’
아무튼 뿌듯함을 뒤로하고 발크로스에서 만날 두 작가에 대한 정보를 정리했다.
펠론 경의 이야기 작가 알렌. 바람과 꽃 작가 로데사.이 중 알렌은 리제가 어릴 적에도 중견 작가 취급을 받았기에 어느덧 60에 이른 노인이나, 여전히 왕성한 창작 활동 중이라고 한다. 반면 로데사는 데뷔작이 바람과 꽃이었고,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문학계의 후기지수다.
정작 어지간한 출판한 작품들을 보면 양으로도 질로도 노년 작가에게도 밀리지 않는 괴물 후기지수지만.
‘맨손으로 가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아무리 문화성 장관의 위명이 있었다지만, 우리 부부를 위해 시간을 내준 사람들이다. 아무 선물도 없이 찾아가는 건 도리가 아니다.
그런데 작가한테는 무슨 선물이 좋지? 만년필이 무난하려나? 아니, 만년필은 이미 많을 것 같은데.
‘여차하면 현금화할 수 있는 게 좋은가?’
선물을 받는 당사자가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선물도 좋지만, 비상시 당사자의 지갑이 되어줄 수 있는 선물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요긴하면서도 현금화가 가능하고, 성의를 보일 수 있으면서도 귀한 물건…
– 음? 장관?
“크라시우스 가문의 가주, 감찰성 장관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이 황금공 각하를 뵙습니다.”
심사숙고 끝에 통신구를 다시 꺼내들었다.
현금화하기 최고의 선물. 내가 아는 물건 중에서는 보야르 와인만한 것이 없다.
– 설마 장관이 먼저 연락할 줄은 몰랐군. 무슨 일인가?
“각하께 긴히 부탁드릴 것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 호오. 그런 거라면 편히 말하게. 장관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줘야지.
다행히 황금공의 반응도 나쁘지 않으니, 두 병 정도는 무난하게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고맙다, 레비아탄. 네 덕분에 황금공에게 이런 부탁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어. 하늘을 떠다니는 불침항모를 찾아줬는데, 와인 두 병이 대수겠냐.
이번에도 텔레포트가 아닌 바다를 거쳐 이동하기로 했다.
– 도착했다.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 고맙다.”
다만 지난번 제레노 여행과 다른 점이 있다면, 100% 배만 타고 이동한 게 아니라 레비아탄의 힘도 빌렸다.
제레노와 달리 발크로스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다. 아무리 거대한 배라도 오랜 시간 타면 피로가 쌓이는 법. 발크로스 인근 공해까지는 레비아탄으로 이동한 후, 발크로스 영해에는 배로 진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다소 복잡하고 번거로운 방식이지만 괜찮다. 이런 과정조차 여행의 일부인 법이니까.
“영해까지 레비아탄으로 이동하는 건 무리겠죠?”
그렇게 레비아탄의 등에 올려두었던 선박을 바다에 띄운 후, 유유히 멀어지는 레비아탄을 보며 리제가 입을 열었다.
“미리 양해를 구하면 안 될 건 없는데, 양해를 구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거야.”
“아쉽네요. 고래를 타고 바다를 누비는 것도 재밌었는데.”
쿡쿡 웃음을 흘리는 리제의 모습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직 발크로스에는 발도 내딛지 못했지만 벌써 리제가 기뻐하고 있다. 여행의 시작으로는 이보다 좋을 수 없다.
“발크로스에 도착하면 짐 풀고, 연극부터 한번 봐볼까?”
“바로요? 피곤하지 않으─”
본능적으로 내 체력을 걱정하려던 리제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더니, 이윽고 머쓱한 듯 미소를 지었다.
“너무 들떠서 잠깐 머리가 굳었나 봐요. 오라버니가 피곤할 리 없는데.”
리제의 깊은 신뢰에 괜히 흡족해졌다.
리제의 말이 맞다. 나는 우리 아이들과 영혼을 불태워 노는 게 아닌 이상, 결코 지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럼 연극으로 시작하는 거, 괜찮지?”
“좋아요!”
해맑은 대답에 리제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수평선을 바라봤다.
항구에 도착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테니 자연이나 구경하자. 상륙하고 나면 온갖 관광지를 누비느라 볼 기회도 없을 테니.
***
외교부 전체가 결전 태세에 돌입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휴식 인력과 기존 업무 인력을 제외하면 전부 대제국 대응 부서에 욱여넣었다. 외부대신인 나조차 예외는 아니다.
요 며칠 동안은 외교부의 행보 하나하나에 우리 발크로스의 국운이 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제국과의 소통에 조금이라도 잡음이 생기면 그대로 막대한 피해가 생긴다.
“각하. 영해 내로 선박이 진입했습니다.”
“레비아탄은?”
“제국 방향으로 멀어지고 있습니다.”
존재 자체로도 신경 쓰이는 고래가 철저히 공해에만 머물고 있다는 소식. 일단 긍정적인 시작이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레비아탄이 조금이라도 영해에 접근했다면─ 아니, 영해와 공해의 경계에서 숨만 쉬고 있어도 아국에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아마 왕국의 모든 해군들이 발작을 했겠지.
허나 레비아탄은 순순히 제국으로 돌아갔다. 어디까지나 운송이 목적이었다는 것처럼.
‘…저런 괴물 같은 존재가 오직 운송을 위해 왔다라.’
실소가 절로 나왔다. 일국의 해군이 전부 동원되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괴물이, 무력시위도 아닌 고작 두 명을 옮기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그래도 레비아탄을 타고 영해까지 접근한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하면 납득하지 못할 사안도 아니다. 비록 제국의 다섯 공작은커녕 후작도 아니지만, 누구도 일개 백작이라 보지 않는 자가 왔으니까.
‘감찰성 장관.’
제국 감찰성 장관과 그 부인. 방금 막 아국의 영해 내로 진입한 여행객들.
현재 길고 긴 휴가를 보내는 중이지만, 휴가 중임에도 존재감을 과시하는 기이한 2인자.
‘휴가 중이라는 사람이 국경만 몇 번을 넘는 건지.’
내가 아는 것만 해도 공의회 참석을 위해 신성교국에 건너 간 적이 있었고, 아르메인과 함께 레온을 장악했으며, 최근에는 제레노 왕국에 신혼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현직 외교부 관료도 저 정도로 바삐 움직이지는 않을 거다.
그러나 감찰성 장관은 해냈다. 휴가 중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이 공인이 아닌 개인이라는 명분으로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
‘고약한 방법이야.’
차라리 공적 업무로 입국하는 것이라면 아국이 대처할 수 있을 텐데, 어디까지나 사적인 방문이라고 강조하기에 접근하지도 못한다. 괜히 장관 부부의 ‘여행’을 방해하면 그것이 명분이 되어 제국의 분노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덕분에 외교부는 제국의 연락만 간절히 기다린 채, 장관의 행보를 멀리서 지켜볼 내무부와 연계한 채 숨을 죽이고 있다. 무슨 일이 생기면 1초의 오차도 없이 제국과 소통해야 하니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감찰성 장관이 타국에서 횡포를 부린 적은 없다는 점이다. 제레노에 갔을 때도 평범하게 여행만 즐겼으며, 오히려 제레노의 공주에게 국보로 삼을만한 선물도 줬다고 하지 않았나.
‘가만히만 있으면 별일은 없을 거다.’
몇 번이나 스스로를 다독이며 긴장을 가라앉혔다.
그래, 우리가 먼저 나서지만 않으면 아국은 안전하다. 장관도 부인과 함께 여행을 왔으면서 억지로 시비를 걸지는 않을 거다. 설마 부인과의 여행조차 시비를 걸 명분으로 사용할 놈이겠나.
…
‘아니겠지?’
문득 불안감이 솟구쳤다. 애석하게도 귀족 중에는 자기 가족도 도구나 수단으로 여기는 놈들이 적지 않은지라.
아니, 아닐 거다. 믿음을 가지자. 그렇게 파멸적인 인성과 이득만 바라보는 놈이라면 제국의 두 공작가가 장관의 처가가 되지는 않았을 터.
게다가 장관은 아국의 작가들과 만나기 위해 약속까지 잡았다고 한다. 자기 부인이 어렸을 적 읽었던 소설의 작가와 만나기 위하여. 이런 사람이 부인과의 여행을 망칠 것 같지는 않다.
반대로 말하면 아국이 장관의 여행을 방해할 시, 어마어마한 재앙이 터진다는 의미기는 하다. 어차피 방해할 생각은 없으니 상관없지만.
“부장.”
“예, 각하.”
작게 심호흡을 한 후, 대제국대응부장을 불렀다.
“아국의 모든 귀족들에게 다시 경고하도록. 장관이 활동하는 지역의 귀족들은 어쩔 수 없으나, 그 외 지역 귀족들은 장관이 귀국하기 전까지는 절대 접근하지 말라고.”
“예.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전달이 아니라 경고다.”
“…예, 확실히 경고하겠습니다.”
가끔 말랑말랑하게 전달을 하면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날뛰는 미치광이들이 나온다. 이렇게 강한 어조로 경고를 해야 위험하다는 걸 알지.
하여간 짐승 같은 것들이 따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