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66)
로판 속 공무원 766화(767/945)
발크로스 왕국 남서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이자 문화 도시인 살레리아. 발크로스의 정치 중심지가 수도인 민덴이라면, 경제와 문화는 살레리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번영을 누리는 도시.
마침 제국에서 배를 타고 이동하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기도 하고, 문화 강국인 발크로스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기에 여행 장소로는 딱이었다. 이왕 놀러 왔으면 재미없고 딱딱한 정치 중심지보다 경제와 문화를 즐기는 게 맞으니까.
‘어째 항구만 돌아다니는 것 같네.’
생각해 보니 마르와 제레노에 갔을 때도 항구 도시에서 여행을 즐겼었지.
평소에 내륙인 제도에서만 지낸 부작용이 이렇게 튀어나오는 건가? 나도 모르게 바다와 항구를 갈망하는 오션맨이 된 기분이야. 이러다 은퇴하면 보야르나 체네스로 이사 갈지도 모르겠어.
언제 은퇴할지는 나도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가까이서 보니까 더 크네요.”
“그러게. 저런 걸 어떻게 만들었나 몰라.”
아무튼 정박을 위해 살레리아의 부두로 접근하는 사이, 나와 리제는 살레리아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살레리아 청동상을 구경했다.
살레리아 청동상. 무려 50M 높이인 청동상으로, 발크로스 왕국의 공작이자 대문호였던 살레리아를 기리기 위해 만든 청동상. 이 살레리아를 일개 어촌에서 왕국의 대표적 도시로 성장시킨 위인이자 도시 이름의 기원인 만큼, 저 청동상보다 높은 건물은 이 살레리아에 존재하지 않는다. 신에게 바치는 교회마저 청동상보다 낮을 정도.
심지어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여행객들을 환영하듯, 청동상은 항구 입구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 같은 타국인이라면 가장 먼저 볼 수밖에 없는 랜드마크다.
“…그보다 다 좋은데, 굳이 저렇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그러게요…”
다만 사소한 문제점이 있다면 청동상의 다리가 상당히 벌어져 있다는 거겠지.
항구 입구에 세워진 두 기둥. 그 기둥에 발 하나씩을 걸쳐 위풍당당히 서있는 청동상. 덕분에 살레리아로 입항하는 선박들은 청동상의 가랑이 아래로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딱히 불쾌한 건 아니지만 기분이 묘해.
그래도 뭐 어쩌겠나. 살레리아를 넘어 발크로스 왕국민들의 자부심이나 다름없는 랜드마크인데, 가랑이가 불쾌하니 철거하라고 할 수도 없잖아. 애초에 꼬우면 여기가 아닌 다른 항구로 입항하면 된다.
‘제국에도 저런 거 만들어 볼까?’
청동상을 보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도 입구에 황제 청동상을 세우면 어떨까. 과연 황제는 50M 크기를 자랑하는 ‘또 하나의 황제’를 보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수치심에 바르르 떨 황제를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청동상에 색까지 입히면 금상첨화겠어. 아주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화려한 황금색으로.
물론 어디까지나 생각으로 그쳐야 할 아이디어다. 그런 짓을 저지르면 황제가 상호확증파괴에 돌입해서 타일글레헨 백작령 입구에 내 동상을 세워버릴 수도 있으니.
“오라버니?”
“청동상을 보니 여행을 왔다는 게 실감되네. 신나게 놀다가 돌아가자.”
갑작스러운 웃음에 고개를 갸웃거린 리제. 차마 ‘미안. 황제가 발광하는 거 떠올리니 저절로 웃음이 나오더라.’ 라는 말을 할 수는 없기에, 적당히 그럴듯한 명분을 입에 담았다.
거짓말은 아니니 양심이 아프지는 않았다. 배를 타는 것도 여행 느낌이 들었지만, 랜드마크가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진정한 여행이라 할 수 있다.
짐을 풀자마자 예정대로 연극을 보러 갔다.
신분의 벽 때문에 고난을 겪던 연인이 끝끝내 난관을 극복하여 부부가 되는 이야기. 뻔한 주제지만 그만큼 잘 먹히는 주제였다. 사랑 이야기는 기본만 지키면 평타는 치는 법이니까.
그리고 발크로스 왕국은 문화를 선도하는 문화 강국. 그런 나라에서 만든 연극이라면 기본은 확실히 지켰을 것이다. 설마 문화 강국, 문화 도시에서 개봉한 연극이 기본도 못 하겠나.
─라고 생각했었다.
‘오…’
평민 출신인 여주인공이 신분의 벽을 넘기 위하여 대혁명을 찍기 전까지는.
‘미친 건가.’
애틋하고 말랑말랑한 사랑 이야기에서 갑작스레 흥미진진한 우리들의 대혁명으로 전환되는 장르. 뜨거운 사랑의 불길이 아니라 뜨거운 혁명의 불길로 바뀐 연극.
혼란스럽다. 혹시 작가가 반동분자인가? 신분의 벽을 넘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는 건 너무 프롤레타리아스럽잖아. 여주인공이 낫을 들고 있을 때부터 눈치채야 했는데.
‘이게 검열을 통과했다고?’
더욱 혼란스러운 건 이런 미친 내용이 살레리아 행정부의 검열을 통과한 것이다. 발크로스는 문화 강국인 만큼 문화의 힘을 확실하게 아는 놈들이라, 대중에게 공개할 모든 작품은 행정부에서 한차례 검열한다고 한다.
가끔 우회적으로 사상을 숨겨서 검열을 통과하는 작품도 있으나, 이 연극은 누가 봐도 문제가 있다. 정신 나간 사상을 숨길 생각조차 안 했어.
“저, 오라버니.”
지금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할지, 아니면 끝까지 관람할지 고민하던 중. 리제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했다.
“발크로스에서는 이게 평균인가요?”
리제의 말에 본능적으로 항변하려 했으나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이딴 꼬락서니를 보면 도저히 아니라고 확신할 수가 없기에.
설마 제국도 모르는 사이에 발크로스에서 민중들의 불만이 극에 이르렀다거나, 신분제가 크게 뒤흔들린 건가? 그게 아니라면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어떤 놈 작품이야.’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극장 입구에서 받았던 팜플렛을 펼쳤다.
아무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연극을 즐기고 싶어 무시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확인할 걸 그랬다. 장르가 혁명물인 줄 알았다면 다른 연극을 골랐을 테니, 까…?
[ 각본가 로데사. ]‘뭐야.’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훅 들어온 이름이라 손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
팜플렛을 펼쳤던 오라버니는 말없이 연극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있던 건지 궁금했지만, 오라버니의 표정이 너무 씁쓸해 보여서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심란한 오라버니를 더 괴롭힐 수는 없어.
‘왜 재밌지?’
게다가 오라버니에게 말을 걸면 연극 도중에 나가야 할 것 같아 침묵을 지켰다.
이 연극. 처음에는 갑작스레 분위기가 바뀌어 당황스러웠으나, 그렇다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는 아쉬웠다. 오히려사랑 이야기를 다룰 때보다 더욱 두근거리는 맛이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분명 당혹스러운 전개와 내용이지만 눈을 뗄 수가 없어.
‘굽힘이 없어서 그런가?’
물론 저 여주인공은 굽힘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문제기는 하나, 사랑이라는 목적을 위해 당당히 나아가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나는 저렇게 당당하지 못했으니까. 오라버니에 대한 연심을 깨닫기 전에는 사랑을 애써 외면했고, 연심을 깨달은 후에도 한동안 고백하지 못했으니까. 마르 언니와 스승님이라는 자극이 없었다면 아직도 우물쭈물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 여주인공의 행보가, 사랑을 위해 거침없는 내용에 관심이 갔다. 평범한 사랑 이야기보다 더욱 흥미로웠다.
물론 내가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건 아니지만. 나는 제국의 귀족으로 사는 게 좋아.
“내가 잃는 건 붉은 피고! 얻는 건 모든 것이다!”
“와아.”
“와…”
여주인공의 대사에 나와 오라버니가 동시에 탄성을 흘렸다. 오라버니의 탄성은 조금 다른 의미 같지만 아무튼 동시에 감탄했다.
이제 ‘이런 연극을 대중에게 보여도 되나?’ 같은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다. 괜찮으니까 개봉한 거겠지. 외국인인 우리가 발크로스 왕국의 일을 과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리제.”
“아, 네.”
“이 연극 각본가. 한번 만나볼래?”
오라버니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뭐 하는 사람이 이런 대본을 썼는지 궁금하기는 하다.
마침 각본가도 극장에 있었기에 연극이 끝나자마자 각본가를 볼 수 있었다.
“귀하신 분들께서 이리 찾아주시다니. 영광이네요.”
나와 오라버니의 복장을 보고 귀족이라는 걸 눈치챈 듯, 각본가는 정중하면서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붉은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여인. 황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한 여인.
딱 봐도 활기가 가득 찬 인상이라 납득하고 말았다. 이런 사람이니 그런 어마어마한 연극을 만든 거구나.
“오늘 막 개봉한 연극인데, 벌써 귀하신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실 줄은 몰랐어요.”
“우리도 발크로스에서 처음 본 연극의 각본가가 자네일 줄은 몰랐다.”
“오, 저를 아시나요?”
“당연히 알지. 문화성 장관의 소개를 받고 자네를 만나기 위해 온 건데.”
오라버니의 말에 각본가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곧바로 허리를 숙이며 재차 인사를 했다.
“타일글레헨 백작 각하를 뵙습니다!”
“고개 들게. 우린 손님으로 온 것인데 주인이 그래서야 쓰나.”
오라버니가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음에도 오라버니의 정체를 아는 듯 행동하는 여인. 문화성 장관의 소개를 받았다고 하는 오라버니.
급격히 분위기를 틀었던 연극만큼 난데없는 상황이라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오라버니가 문화성 장관을 거쳐 가며 만나려 한 각본가라니. 대체 누구길래 그러지?
“리제. 이 사람이 로데사야. 누군지 알지?”
“로데사요?”
“응. 바람과 꽃의 작가.”
오라버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각본가─ 로데사 님의 손을 잡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루이제 나이어드라고 해요!”
어쩐지 연극이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는데! 로데사 님의 작품이었구나!
***
유년 시절의 영웅을 만나 흥분한 리제. 자신의 데뷔작을 읽고 자란 팬을 만나 덩달아 웃는 로데사.
기습적으로 성사된 팬미팅에 조용히 뒤로 물러나 침묵을 지켰다. 작가와 팬의 만남에 외부인이 낄 자격은 없다.
“이런 연극은 처음 겪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어요. 로데사 님의 작품이니 그랬던 거였어요!”
“기존 작품들과는 다르게 연출해서 제 색채를 느끼기 힘들었을 텐데. 제국에도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었네요.”
“그, 확실히 많이 다르기는 했어요. 저런 연출을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요.”
조심스러운 리제의 말에 로데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귀족 분들이 보기에는 좀 그랬죠? 하지만 이해해 주세요. 이 지역 역사에서 실제 있었던 일을 배경으로 만든 연극이거든요!”
“뭣.”
로데사의 말에 침묵의 맹세가 무너졌다.그 정신 나간 우리들의 대혁명이 실화 기반이었다고?
‘거짓말.’
믿을 수 없다. 붉은 피 여인이 푸른 피들을 죽창으로 찔러가며 이룩한 사랑이 실화라니. 난 그런 역사 들어본 적도 없어.
“정확히는 발크로스 이전에 존재했던 왕국의 역사지만요.”
이어지는 말에 겨우 혼란을 가라앉혔다.
이전 왕국의 역사라면 있을 법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