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67)
로판 속 공무원 767화(768/945)
방금 본 연극이 로데사의 프롤레타리아스러운 사상 집약체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건국 설화라는 말에 급속도로 분위기가 풀렸다.
정확히는 나 혼자만의 긴장감이 가라앉았다. 지금까지는 더러운 부르주아로서 프롤레타리아와 마주한 기분이었지만, 그게 오해라는 걸 깨달았으니 당연한 일.
‘건국 과정에서 피 좀 흐르는 건 드문 일도 아니지.’
나라가 바뀌는 혼란기에는 평민보다 귀족들이 더 죽어나가기에 로데사의 연극이 특정 사상을 담은 건 아니다. 기존 국가, 기존 사회의 기득권은 새로운 세상을 위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니까. 단지 새로운 국가를 연 주체가 귀족이 아닌 평민이라는 게 차이점일 뿐이다.
게다가 평민이 혁명을 이끌어 새로운 나라를 세운 전례는 은근히 존재한다. 당장 아펠스 제국도 평민이 왕국을 세우고, 곧장 천명까지 거머쥔 케이스였지 않나. 분명 시작은 좋은 국가였는데 마지막은 왜 그 꼴이 되었을까.
“연극 때문에 많이 놀라신 것 같네요. 귀족 분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과격한 내용이기는 했죠?”
“순수 창작이라면 아직도 두근거렸겠지만,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했다면 놀랄 것도 없지. 일국이 세워진 아름다운 순간이었으니까.”
“역시 배포가 크신 분이네요! 사실 욕 좀 먹을 걸 각오했었거든요! 행정부에서도 공개해도 된다고 통과시켜줬지만, 평소보다 심사 기간이 배는 길었어요!”
당연한 말이라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감동적인 실화 기반이라 검열할 명분이 없는 거지, 평민이 귀족들을 썰고 다닌다는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일개 평민이 아니라 일국의 건국 시조 이야기? 애석하게도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편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건국 설화’가 아닌 ‘평민의 우당탕탕 붉은 대혁명’으로 받아들여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살레리아 행정부의 배포가 어마어마한 거다. 제3자인 나조차 겨우 받아들였는데, 당사자인 살레리아 행정부는 얼마나 고민하다가 통과시켜줬을까.
“사람들은 건국 시조의 위대함에 주목하지만, 그 시작에 주목하지는 않았어요! 세상에 순응하고 살아가던 평민이 어쩌다 깃발을 들어 올렸는지, 무엇이 평범한 시골 처녀였던 여인에게 낫 대신 검을 들게 했는지 말이죠!”
어느새 눈을 빛내기 시작한 로데사의 모습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건국 시조의 속내가 어떻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것에 성공하면 ‘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위대한 결단’ 만이 남게 된다. 집권 정당성을 확립해야 하니 모든 건국 시조의 거병 사유는 민생과 얽힐 수밖에 없다.
거병 사유가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야? 오늘부터 그 사랑은 백성을 위한 사랑이다. 공신들과 후손들이 그렇게 정했어.
“그래서 전 이 연극을 쓰게 된 거예요. 사람들이 모르던 빌헬미나 1세의 여정을 위해! 뜨겁고 안타까웠던 사랑을 위해!”
“안타까워요?”
그 말에 리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가 본 연극은 과정이 좀 화려하기는 했으나, 아무튼 결말은 해피 엔딩이었으니까.
“사실 빌헬미나 1세의 연인은 건국 직후에 병으로 죽었어요. 연인을 잊지 못한 빌헬미나 1세는 미혼으로 남았고, 왕위는 조카에게 이어졌죠.”
“그, 그랬군요.”
“역사는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연극도 그러라는 법은 없잖아요?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건 작가의 특권이니까요.”
가슴을 펴며 당당하게 말하는 로데사와 동경이 가득한 눈으로 박수를 치는 리제.
단순히 과격하고 독특한 연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작가의 자긍심이 담긴 작품이었다. 역시 사람은 함부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직접 겪은 다음에 판단하는 게 옳았어.
“바람과 꽃도 실화 기반이라고 들었는데, 로데사 님 덕에 작품으로라도 사랑을 이룬 연인들이 많네요. 대단하세요!”
“어머. 바람과 꽃이 실화인 것도 알고 있었나요? 그건 아는 사람이 진짜 드문데.”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봤거든요.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요.”
헤헤 웃는 리제를 향한 로데사의 눈빛은 더더욱 온화해졌다.
이해한다. 작가로서 그냥 팬도 아니고, 자신의 데뷔작부터 사랑한 팬이라면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긴 하겠지.
“저기. 갑작스러운 말이지만 괜찮으시면─”
그래서인지 신나게 떠들던 로데사가 처음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고,
“저녁에 두 분을 제 저택으로 초대해도 될까요? 타국에서 이 발크로스까지 와주셨고, 오시자마자 제 연극을 봐주셨다면 에넨께서 내린 운명이겠죠. 약소하게나마 두 분을 대접하고 싶어요.”
일개 손님이었던 나와 리제를 직접 저택으로 초대했다.
어차피 문화성 장관의 소개가 있었으니 저택에서 만날 예정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 초대는 로데사가 자청하여 나선 것이고, 평범한 만남이 아닌 식사 초대다. 단순히 ‘지인의 권유로 이루어진 만남’이 아니라 ‘자신이 원해서 초대한 귀한 손님’으로 격상되었다.
‘이게 팬심의 힘인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리제를 힐끔 쳐다봤다.
이거 내가 문화성 장관에게 부탁하지 않았어도 리제와 로데사는 만날 운명이었던 것 같다.
“대문호의 초대면 기쁘게 받아들여야지.”
“대문호라니요.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마치 시간이 흐르면 대문호가 될 거라는 말 같아서 픽 웃음이 나왔다.
하긴. 지금도 괴물 후기지수 취급을 받고 있으니, 시간만 지나면 대문호 반열에 오르기는 하겠어.
***
오늘은 일기장에 시원한 푸른 잉크로 적어도 될 만큼 기쁜 날이다.
행정부에서 심사를 질질 끌던 작품을 처음 공개하는 날이고, 제국에서 귀한 손님이 둘이나 찾아왔다.
그것도 핏줄만 귀한 손님이 아닌, 내 작품을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아름답고 순수한 손님이.
‘이렇게 열정적일 줄은 몰랐는데.’
봄날처럼 아름다운 분홍 머리카락과 하늘처럼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 소설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전형적인 귀족 영애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루이제 나이어드라고 했던가. 제국의 실세인 타일글레헨 백작의 부인이자, 본인도 작위를 물려받을 예정인 귀족 중의 귀족. 하지만 어마어마한 위명과 달리 순수함을 간직한 아가씨.
의외의 손님이고, 기꺼운 손님이었다. 사실 제국에서 대선배님의 부탁이 왔을 때는 그분의 체면을 생각해서 적당히 어울릴 생각이었다. 적당히 인사를 나누고, 적당히 덕담을 나누고, 적당히 내 책에 서명이라도 해서 선물해 줄 생각이었다.
허나 저 아가씨는 그렇게 대할 손님이 아니다.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사랑하는 분을. 내 작품을 하나의 세계처럼 사랑하는 분을 의례적으로 대할 수는 없다. 상대가 진심이라면 나도 진심으로 나와야지.
“어서 오세요. 누추한 곳이지만 귀한 분들을 맞이할 수 있어 영광이에요.”
양팔을 벌리며 아가씨와 타일글레헨 백작을 반겼다. 상대의 신분이 신분인 만큼 화려한 레스토랑에서 반겨야 하나 싶었으나, 그래도 저택에 들이는 것이 가장 정성스러운 성의 표현 아니겠나. 레스토랑은 얼마든지 갈 수 있지만 내 저택은 아니잖아.
“우리야말로 보고 싶던 작가의 저택에 초대받아 영광이지. 이건 우리의 성의니, 부담 없이 받아줬으면 한다.”
“그냥 오셔도 됐는데. 감사히 받을게요.”
이윽고 백작이 건네는 상자를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형태를 보니 와인인 것 같다. 안 그래도 요즘 와인을 모으는 취미가 생겼는데 잘 됐─
“술을 싫어할 수도 있으니 여차하면 팔아도 된다. 보야르 와인이니 가격은 괜찮게 받을 거야.”
“…네?”
백작의 말에 상자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보야르 와인. 제국에서 생산되는 와인 중에서도 꼭대기에 있는 와인. 돈이 있어도 인맥이 부족하면 얻기 힘들다는 귀물…
‘귀한 손님.’
나도 모르게 상자를 꽉 끌어안았다.
오늘은 푸른 잉크보다 더 밝고 시원한 잉크로 일기를 적어야겠다.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군.”
“이 저택을 팔아야 보답할 수 있을 것 같아 죄송스러울 따름인데요…?”
“그건 마음만 받도록 하지. 애초에 초대를 받아서 준 선물인데 보답은 무슨 보답.”
픽 웃음을 흘린 백작의 모습에 말없이 눈동자만 굴렸다.
이거 어쩌지. 손님의 신분이 신분이라 범상치 않은 선물이 올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설마 보야르 와인일 줄이야.
‘이러면 곤란한데.’
사실 아가씨랑 백작이 오면 부탁할 게 있었는데… 이런 걸 받아먹고 어떻게 부탁을 하지…?
‘눈 딱 감고 저지를까?’
그래도 작가로서 차마 포기할 수 없는 부탁이다. 아가씨의 봄처럼 순수한 마음을 보자마자 미친 듯이 욕구가 치솟아서 억누를 수도 없다.
그래, 그냥 질러보자.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다행히 식사는 별 소란 없이 지나갔다. 최대한 화려하게 준비했지만 고위 귀족의 식사와 비교하면 부족할 수밖에 없는데, 작은 불만도 나오지 않았다.
간혹 식사에 예민한 귀족들이 있다고 들었지만, 두 손님은 그런 귀족에 속하지 않는 모양이다.
“백작 각하. 부인.”
“네, 말씀하세요!”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던 중, 조심스레 입을 열자 아가씨가 답해줬다.
“지금부터 제가 드릴 말씀은 어디까지나 제안이니, 편한 마음으로 들어주세요.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거절하셔도 되고요.”
“네? 아, 네.”
잠시 눈을 깜빡인 아가씨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행동 하나하나에 따뜻함과 풋풋함이 묻어 나오는 아가씨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아가씨가 나타난 건지.
“두 분의 연애를 주제로 소설을 하나 써도 될까요?”
“…네?”
“음?”
그래서 더욱 궁금해졌다. 저 아가씨가 가장 뜨거웠을 때는 얼마나 뜨거웠을지.
과연 어쩌다가 봄을 의인화한 것 같은 여인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남자에게 반한 것인지.
***
로데사의 제안에 리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쭈뼛거렸다.
실화를 기반으로 수많은 작품을 쓴 작가, 어린 시절부터 존경하고 동경했던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로 작품을 쓴다고 한다. 팬으로서 얼마나 기쁜 일일까.
다만 그 이야기가 리제 개인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라는 게 문제다.
‘연애 이야기면 일곱의 이야기지.’
심지어 둘만의 연애가 아닌 일곱이 얽힌 문제라는 게… 참 복잡하고도 미묘한 일이다. 나와 리제의 연애를 논하면 필연적으로 다른 부인들도 언급해야 하잖아.
“흥미로운 제안이로군.”
그렇기에 스턴 상태에 빠진 리제를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당장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야. 이 살레리아에 머무는 동안 고민해 봐도 되겠나?”
“무, 물론이지요! 고민하시다가 아니다 싶으면 거절하셔도 돼요!”
“그래. 참고하지.”
일단 느긋하게 생각한 다음에 답을 주겠다고.
저택에 있을 부인들과 논의할 시간은 있어야 하니까.
‘연애 이야기라.’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로데사를 보다가 찻잔을 입에 댔다.
나와 리제의 연애 이야기. 다짜고짜 연애 시절부터 적을 수는 없으니,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난 시절이 프롤로그가 될 터.
…
‘잠깐만.’
아카데미 시절이 들어가면 동아리 부원들도 적어야 하지 않나?
‘이런 미친.’
순간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로데사의 제안을 받아들이려면 부원들의 동의를 구해야 하고, 동의를 구한 다음에는 77년도 시즌 전설적인 행보를 소설에 적어야 한다.
‘그냥 거절할까?’
그런데 리제는 은근 기대하는 것 같은데.
망했네 이거.그 악몽을 소설로 박제해야 한다니. 너무 끔찍한 미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