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7)
2년째 이어지는 전쟁은 제국의 위신과 국력을 실시간으로 갉아먹었다. 북방 토벌군 수뇌부는 전쟁이 길어질수록 점점 수렁에 빠지는 것 같은 상황에 골머리를 앓으며 혀를 깨물고 싶은 충동과 싸웠다.
북방 유목민 세력은 지금까지 단일 세력을 형성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제국이 심심하면 짓밟는 토벌 대상에 불과했지만, 그 토벌 대상에게 2년이나 명치를 처맞고 있는 것이 현실. 심지어 일개 유목민에 불과한 자는 제국이 자랑하는 강군을 정면에서 부수며 그 위용을 떨쳤다.
카간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강력한지, 하나가 된 유목민의 기마 돌격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고작 유목민을 이기지 못한 제국.’ 대륙이 기억하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다.
“여기서 패배하면 제국은 끝이다.”
전승공의 한 마디. 황제의 명을 받들어 제국군을 이끄는 자의 말치고는 불충하고 참담하다고 할 수 있지만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 이 전쟁에서 지면 제국은 끝이다. 크펠로펜은 살아도 제국은 끝이다.
감히 유일한 제국을 두고 카간을 자칭하는 자를 막지 못하면 제국이 대륙 열국 위에 군림할 명분을 잃는다. 고작 유목민을 막지 못하고 새로운 제국의 탄생을 허용하면 그 국력을 의심 받는다.
물론 다른 국가도 카간의 흉악함은 알고 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당장 자신들 위에 군림하던 제국이 땅바닥에 처박힐 기세니 뜯어먹을 준비를 해야지.
“저번 전투에서 역천자도 부상을 입었다.”
며칠 전 카간과 교전이 이루어졌고, 그 전투에서 카간에게 유의미한 부상을 입히는 것에 성공했다. 그 대가로 4과장을 비롯한 주요 전력이 제도로 이송되어 치료에 전념해야 할 정도로 다쳤지만. 그래도 죽지 않은 게 어딘가.
“칼 크라시우스.”
“예, 각하.”
“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그리고 전승공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니, 놓칠 수 없었다. 늘 건재하던 카간이 부상을 입은 건 2년 만에 처음 일어난 일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언제일까? 적어도 제국이 멀쩡할 때 찾아오지는 않겠지.
그러니 지금이다. 제국군이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을 카간에게 투입하여 놈을 잡는다. 그리고 그 전력은 나를 비롯한 4과의 팀장들이었다. 카간에게 인해전술은 오히려 의미가 없다는 걸 그동안의 경험으로 깨달았으니까.
“텔레포트 스크롤일세. 마종공이 힘써서 만들었지.”
그 스크롤로 카간을 결사대가 대기 중인 곳으로 날린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카간을 죽이는 일보다는 쉽겠지. 어떻게든 카간에게 도달만 하면 텔레포트로 날리는 건 간단하니까.
“경들에게 제국의 명운이 걸렸네.”
다행히 다른 특수부대가 군세를 이끌던 카간에게 스크롤을 갈겨 군세와 카간을 떨어뜨리는 것은 성공했다. 그리고 4과 팀장들이 대기하던 곳에 떨어진 카간을 죽이는 것에도 성공했다.
비록 일곱 중 다섯이나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지만, 솔직히 둘이라도 살아남은 게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기적은 둘이 아닌 하나만을 위한 것이었는지.
“미안해, 칼.”
헤카테는 제도로 귀환하는 도중 다섯의 뒤를 따라갔다.
결국 카간을 죽인 결사대 중 제도로 생환한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
이 정도까지만 떠올리기는 무슨. 끊이지 않고 계속 떠오르네.
‘기억을 지울 수도 없고.’
유감스럽게도 기억이라는 게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도 갑자기 생각나고, 이제 접어두려고 해도 접히지 않는다.
괜히 상처를 매만져서 그랬는지 아니면 기일이 다가와서 머리가 반응을 하는 것인지, 해변에 앉아있는 동안 얼마나 옛날 생각이 나던지.
그래도 양 옆에서 내 안부를 묻지는 않은 걸 보면 표정에 드러날 정도로 우울함을 뽐내지는 않은 것 같다.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옛날처럼 격렬하게 티가 나지는 않는 모양인데.
“재밌었어요!”
리조트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탄 루이제가 밝게 웃었다. 잠깐만 쉬다가 다시 들어간다던 루이제는 마지막까지 돗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덕분에 부원들도 슬금슬금 바다에서 기어 나와 돗자리는 만석이 돼버렸고.
그런데 루이제는 들어갔다가 나오기라도 했지, 결국 마르게타는 바다에 발을 담그지도 않았다.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아무튼 루이제의 말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줬다.
“그러게. 마지막까지 제대로 놀았어.”
물론 나 말고 루이제가. 수학여행 공식 일정은 내일까지지만, 내일은 아침 식사 이후 바로 아카데미로 복귀하니 사실상 오늘이 마지막날이다. 정말 마지막까지 알차게 지냈네.
“내년에도 올 수 있을까요?”
“아마 그럴 거야. 한 해로 끝내기는 아쉬운 곳이라.”
그 말에 옆에 있던 마르게타가 흠칫 몸을 떤 것 같지만 애써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노는 사람 따로, 고생하는 사람이 따로인 것이 수학여행의 슬픈 진실이니까.
“어쩌면 내년에는 다른 공작령으로 갈 수도 있지. 아니면 제도일 수도 있고.”
농담인지 작게 웃으며 말하는 라테르의 말에 대체적으로 좋은 반응이 나왔다. 같은 곳을 두 번 가는 것보다는 다른 지역에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특히 제도의 번영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라.
단지 제도로 가는 일정을 짜는 미래의 자신을 상상했는지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마르게타가 안타까울 뿐이다. 이거 내년에는 정말 학생회를 탈주하는 마르게타를 볼지도 모르겠다.
‘제도는 나도 싫은데.’
파견 근무지에서 가는 여행 장소가 원래 일터라니,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누가 나한테 그딴 소리를 하면 뺨을 때릴지도 모른다. 라테르는 왕족이라 참지만.
그렇게 마차는 같은 주제를 두고 서로 상반된 반응이 내리 깔린 채로 리조트에 도착했다. 저녁 식사 전까지는 방에서 쉬고 있어야지.
“부장님.”
갑자기 프런트 직원이 부르지만 않았어도 쉴 수 있었을 텐데.
난데없는 부름에 애들을 먼저 위로 올려보내고 프런트로 가니, 공손히 고개를 숙인 직원이 상자 하나를 프런트에 올렸다.
“각하께서 보내신 물건입니다.”
“각하께서?”
“예. 부장님에게 필요한 물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양반이 나한테 보낼 게 있나? 돈도 감찰부로 보내 달라고 했으니 딱히 없을 텐데. 그래도 필요한 물건이라고 했으니 비밀 지령이랍시고 이상한 걸 보내지는 않았겠지.
‘아.’
상자를 여니 낯익은 브랜드의 와인 여섯 병이 들어있었다. 보야르의 주력 상품 중 하나인 보야르 와인.
와, 이걸 기억하고 있었네.
“각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게.”
“예, 알겠습니다.”
다시 뚜껑을 닫고 조심스레 상자를 챙겼다. 이미 토벌 보상도 과할 정도로 받았는데 이런 것도 받아버렸다. 이건 꽤 감동인데.
‘사람 다루는 능력은 참.’
괜히 황금공 세력이 넓게 퍼진 게 아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것을 받았으니 알려줘야 할 사람이 있다.
– 이게 누구야. 혼자 바다에서 팔자 좋게 놀고 있는 놈 아니냐.
“그동안 고생한 게 있는데 거 놀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정기 보고 겸 장관에게 연락을 넣었다. 바로 받는 걸 보니 마침 쉬는 중이었나.
“저 술 구했습니다. 따로 안 사셔도 됩니다.”
아무튼 황금공이 준 와인을 통신구 쪽으로 들이밀어 보여줬다. 원래는 장관이 대신 구하기로 했는데 내가 얻었으니까.
그런데 장관은 잠깐 동안 말이 없더니 바구니 하나를 들어 통신구에 비쳐 보였다.
“아.”
– 나도 오늘 샀다.
바구니에 다소곳이 들어가 있는 여섯 병의 와인. 황금공이 준 것과 같은 보야르 와인이다.
– 기껏 시간 내서 구했더니.
“그, 인당 두 병이면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 그렇게 처먹으면 취해서 하늘로 못 돌아간다. 얼마나 먹일 생각이냐?
픽 웃음을 흘리는 장관의 말에 머쓱히 와인병만 매만졌다. 나름 비싼 물건이라 굳이 장관 돈까지 나갈 필요는 없어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타이밍이 조금 안 맞았네.
– 그런데, 어디서 난 거냐?
“황금공 각하께서 주셨습니다.”
– 허. 작년 일을 기억하셨나.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으니까.
작년에도 이맘때에 보야르 와인을 챙기려 했었다. 하지만 작년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생산량이 적었고, 시중에 풀린 물량도 다 털려서 구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 장관에게 털린 후 최후의 수단으로 황금공에게 문의했고. 처음에는 황금공도 난색을 표했지만.
“참배 때 사용할 술? 자네,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사정을 설명하니 바로 주더라. 그런데 그걸 아직도 기억해서 올해도 챙겨줄 줄은 몰랐다.
– 그래도 다행이군. 작년 같이 막판에야 구하는 일은 없어서.
“그러게나 말입니다.”
– 알아서 구할 테니 맡기라던 새끼가 결국 마지막까지 못 구한 꼴이 얼마나 웃기던지.
자연스레 흑역사를 말하니 할 말이 없어졌다. 난 보야르 와인이 그렇게 귀한 건 줄은 몰랐지… 그냥 비싼 와인 정도로만 생각해서.
– 마법사는 본관으로 보낼 테니 잊지 말고.
“걱정 마십쇼. 치매는 저보다 각하가 신경 쓰셔야지.”
– 빌어먹을 놈이.
마지막으로 숨 쉬듯 딜을 주고 받으며 연락을 끊었다.
‘마법사는 보낸다라.’
내가 신청할 생각이었는데 알아서 예약을 잡아둔 모양이다. 편하고 좋네.
빛을 잃은 통신구를 쳐다보다가 들고 있던 와인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하나하나가 귀한 몸이니 귀중히 다뤄야지.
“보야르 와인이 그렇게 맛있다더라. 제도로 가면 먹어보려고.”
“한 잔이 네 월급 정도 할 텐데 무슨 객기지? 붉은 피라 같은 붉은색에 동질감을 느끼는 건가?”
“개새끼가.”
설마 게르에서 우연히 오고 갔던 말이 이렇게까지 흐를 줄은 몰랐다. 망할 놈, 적당히 아무 술이나 처먹을 것이지 하필 보야르 와인이라 이렇게 고생하게 만들고.
덕분에 내가 너네 기일에는 이러고 있다. 내 고생을 너희가 알고 있을런지 모르겠네.
제라드, 이 주당 새끼야. 영혼이 남아있다면 꿈에라도 좀 나타나라. 기껏 구했는데 정작 대작을 못 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