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71)
로판 속 공무원 771화(772/945)
대토벌 전쟁 이전의 이야기는 마땅히 할 게 없어서 대충대충 넘겼다.
유년 시절의 기억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내가 직접 겪은 건 아닌지라 생생하게 전달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이 육체의 유년 시절은 딱히 흥미로운 사건 같은 것도 없었고.
기껏해야 크라시우스 가문에 한때는 엄하고 무뚝뚝한 가풍이 있었다는 것, 이 육체의 본래 주인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부모님을 사랑했다는 것, 사랑하는 부모님의 관심을 위해 묵묵히 노력했다는 것, 그러다 낙마했다는 것 정도밖에 이야깃거리가 없다.
‘충분한가?’
생각해 보니 유년 시절 에피소드로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것 같기는 해. 주인공의 비극으로 삼기에는 적당한 소재잖아.
진짜 비극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게 문제지만.
“정확히는 16살 때였나? 낙마 때문에 잠시 기절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에넨의 가호 덕에 무사히 눈을 뜰 수 있었다. 그 뒤로는 몸을 사려가면서 단련을 했었고 말이야.”
“그, 그렇군요.”
정확히는 ‘귀족 라이프 개꿀.’ 이라는 마인드로 설렁설렁 단련한 거였으나, 어디까지나 유년 시절과 비교해서 설렁설렁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나름 열심히 단련했어.
아마도 그럴 거다. 비교 대상이 나랑 에리히밖에 없어서 확신을 못 하겠네.
“그렇게 평범히 시간을 보내다가 17살의 성인이 됐지. 제국 귀족이라면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이 보편적인 나이였으나, 남들과 다른 길을 택하게 됐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미취학 성인이라는 건 대륙 전체에 널리 퍼진 사실. 내 입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내가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는 알렌도 잘 알 거다.
황실과 제국을 향한 충성이라는 명목으로 아카데미 입학이 아닌 공무원 생활을 택했던 과거. 남들이 아카데미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끄적일 때, 북방으로 올라가 검을 휘둘러야 했던 선택.
그 선택으로 처절하게 굴렀던 걸 생각하면 치가 떨리지만, 공무원 루트를 택했기에 만난 인연도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과거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좀 많이 망설이기는 하겠지만 아무튼 결과는 같았을 거다. 아무튼 그렇다.
“흐음. 역시 전쟁 전의 이야기는 별거 없군. 이거 영양가 없는 얘기를 한 것 같아 민망할 정도야.”
“아닙니다, 각하. 충분히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알렌의 말에 픽 웃으며 프리드리히가 가져왔던 자료 더미를 뒤적거렸다.
“자, 대토벌 전쟁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려면 이거부터 보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대토벌 전쟁 당시, 북방으로 올라갔던 감찰부 명단을 찾아 알렌에게 건넸다.
장관을 포함하여 4과의 이름이 적혀있는 명단. 나를 포함하여 일곱 팀의 팀장과 팀원이 적혀있는 명단.
“리브노만 백작이 여섯 분이나 계셨군요.”
리브노만 백작이라는 최상위 명예 훈장을 받음으로써, 그 녀석들의 이름이 가장 앞에 적히게 된 명단.
“대단한 녀석들이었지. 나와 함께 4과의 팀장으로서 마지막까지 활약한 녀석들이니까.”
리브노만 백작은 모든 백작들보다 우위로 치기에 나보다도 윗사람이 된 녀석들. 시작은 평민이었으나, 그 끝은 백작들을 내려다보는 귀족이 된 녀석들.
“그리고 여기. 헤카테 라리드 오브 리브노만 백작은 내 첫사랑이다.”
“…예?”
난데없는 선언에 알렌이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당연한 반응이다. 이미 여섯이나 되는 여인과 결혼한 사람이 첫사랑 운운한다면, 그것도 리브노만 백작위를 받기 전에는 평민이었던 사람을 첫사랑으로 지목한다면 당황하는 것이 보편적 반응이다.
그래도 내 인생을 소설로 쓴다면 헤카테를 뺄 수 없다. 이왕 세상에 밝히기로 했다면 모든 걸 밝혀야 한다.
그것이 헤카테를 향한 내 예의이자 도리니까.
“가족들도 아는 얘기니 걱정하지 마라. 딱히 숨길 필요는 없어.”
내가 헤카테를 마음에 품었던 건 가족들도 아는 이야기니까.
오히려 첫사랑을 잃고 마음을 닫았던 남자가 새로운 인연과 이어지는 이야기. 부인들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것 같아 더 멋지잖아.
‘알렌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가?’
하긴. 사랑 관련은 알렌보다 로데사가 더 좋아할 것 같기는 해.
***
아무렇지도 않게 충격적인 선언을 한 백작은 덤덤히 말을 이어갔다.
“─원래는 일개 팀원부터 시작했는데, 갑자기 팀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죽었지 뭔가. 덕분에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팀장이 됐고, 난데없이 북방까지 가게 됐지.”
“시작부터 다사다난하셨군요.”
마치 자신이 한 말은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너무 덤덤한지라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허나 백작의 눈빛, 백작의 목소리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무엇보다도 진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절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백작에게는 진실로 첫사랑이 있었다. 비록 상대가 평민이었으나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죽음이 둘을 갈라 놓았기에 이어지지 못했다.
‘결말이 비극인 걸 알고 듣는 이야기라.’
씁쓸했다. 세상은 백작의 인생을 고귀한 핏줄의 화려한 행보라고 생각하겠지만,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썩 화려하지는 않았다.
전장에서 만난 친우를, 신분을 초월한 연인을 전장에서 잃었다. 그 대가로 얻은 권세와 명예를 어찌 보상이라 할 수 있을까. 백작의 사정을 아는 자라면 누구도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이제 제국의 영토인 곳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건 민망하지만, 북방은 끔찍한 곳이었다. 수만의 기병이 일제히 달려드는데 어찌나 공포스럽던지.”
“그런 광경을 본다면 누구라도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작게 웃음을 흘린 백작은 다시 자료 더미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사실 기병들보다는 이것들이 더 문제였지. 어디서 이런 괴물들이 튀어나온 건지 의문이었을 정도로.”
그 말에 백작이 건넨 자료를 빠르게 읽었다.
“팔준마. 솔직히 하나하나가 칸을 자칭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능력자들이 한곳에 뭉쳤었다. 어찌 보면 당시 유목민 세력은 여러 왕국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겠어.”
상당히 매력적인 소재라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사람으로서는 그런 괴물들과 싸운 백작, 제국인들에게 동정이 가지만─ 작가로서는 하나하나 강렬한 특성을 지닌 여덟 명의 악역이 기꺼울 따름이다.
심지어 이 팔준마조차 누군가의 수하에 불과했다.
“역천자는 진정 칸들 위에 군림하는 카간이라 할 수 있겠고.”
바로 역천자라는 이름을 가진 재앙의 수하.
“가, 각하. 카간이라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뭐 어떤가. 결국 제국의 위엄 앞에 무릎 꿇은 패배자인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승자의 여유가 느껴지는 발언이라 얼떨떨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제국, 다른 황제를 인정하면 안 될 제국의 귀족이 역천자를 카간이라 칭했다. 이 또한 제국이 그 카간을 꺾었기에, 북방을 점령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겠지.
“아, 소설에서는 역천자라고 해주게. 카간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예민하게 반응할 사람이 많아.”
“당연히 그래야지요. 걱정 마십시오.”
“든든하군. 믿도록 하지.”
내 대답에 백작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이왕 팔준마에 대해 얘기했으니 이놈들에 대한 설명도 해볼까? 여기 탈라라는 놈이 여덟 명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미친놈이었는데─”
그러고는 거침없이 말을 잇는 백작을 보니,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솟구쳤다.
이게 비극을 겪으며 승리를 거머쥔 자에 대한 동정인지, 젊은 나이에도 꿋꿋하게 나아간 청년을 향한 대견함인지는 나 스스로도 알 수 없다.
허나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이니.
‘최고의 작품을 만든다.’
자신의 비극을 공개하기로 다짐한 백작을 위해. 자신의 고통을 말해주는 백작을 위해 영혼을 갈아 나의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는 것.
그것이 내 유일한 배려고, 최고의 배려기에.
…
‘첫사랑이라.’
백작의 말을 기록하면서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백작의 일대기를 적으려면 이 첫사랑 이야기를 빠트릴 수 없는데, 애석하게도 난 사랑에 대한 표현이 서툰 편이다. 애틋하고 비극적인 사랑이라면 더더욱.
이런 주제는 로데사 양이 더 능숙할 터이니. 차라리 로데사 양과 협업을 할까?
‘나쁘지 않아.’
백작의 인생을 다룬다면 필연적으로 전쟁 이후의 이야기도 적어야 한다. 백작이 대륙 제일 검으로 군림한 건 전쟁 도중이 아니라 전쟁 이후니까.
그리고 전쟁 이후, 첫사랑을 잃은 백작이 여섯이나 되는 부인을 얻게 되었다. 위대한 영웅의 상처와 극복, 영광을 전부 다루는 것이 나의 사명.
‘역시 협업이 좋겠어.’
마침 로데사 양은 백작과 부인의 연애 이야기를 다룬다고 하니, 사랑 부분은 로데사 양에게 맡기자.
자기도 일을 하느라 바쁘다고 투정을 부릴 수 있으나, 내가 로데사 양에게 도움을 준 적이 몇 번이던가. 비슷한 내용을 다루는 거라면 투정만 몇 번 부리다가 들어주겠지.
“들리는 얘기로는 탈라가 카간에게 합류한 건 카간과의 일대일 전투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라 하더군. 자신보다 약한 자의 명령을 들을 수 없어 들이박았다는데, 그놈이라면 충분히 그럴 법해.”
그 와중에 백작의 이야기는 점점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싸움에 미친 악역. 이보다 매력적인 악역도 드물다.
***
흔히 같은 사람을 두고 욕을 하면 빨리 친해진다고 하던가. 탈라의 광기와 기행을 씹어대다 보니, 알렌과 보다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물론 네놈한테 고맙지는 않다, 미스터 탈라. 내가 너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알렌이 아니라 발크로스 국왕과 가까워져도 손해야.
“오셨어요?”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어요.”
그렇게 미묘한 후련함을 즐기며 리조트로 복귀하니, 막 옷을 갈아입은 듯한 리제가 반겨주었다.
“이게 옛날 얘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가더라고. 까딱 잘못했으면 새벽까지 떠들 뻔했어.”
“헤헤. 실은 저도 그랬어요. 로데사 님이 반응을 너무 잘 해주셔서 더 좋더라고요.”
“부부는 몸이 달라도 마음은 하나라고 하던데. 정말이었네.”
서로 같은 처지였다는 말인지라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어쩌겠나. 나나 리제나 결코 평범하지 않은 과거를 가지고 있고, 그 과거를 이렇게 합법적으로 풀 기회는 거의 없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우리의 이야기를 풀 수 있을까.
“그래도 알렌한테 자료를 넘겼으니, 내일부터는 이렇게 오래 있을 필요는 없을 거야. 남는 시간에 나도 로데사한테 갈까?”
“저기이… 오라버니.”
리제가 조심스레 내 소매를 잡았다.
“저도 시간이 조금 남는데, 오라버니도 여유가 있는 거 맞죠?”
“응. 말로 해야 할 건 거의 했으니까.”
“그럼 벚꽃이 말고 단풍이를 만들어 보는 건 어때요?”
“어?”
갑작스러운 말에 리제를 바라보자, 정작 리제의 얼굴이 단풍과 흡사했다.
“마, 마르 언니는 여행 도중에 나르를 가지고 왔잖아요! 저도 그냥 돌아가기는 싫어요!”
내가 빤히 바라보자 리제는 빼액 소리를 내질렀다.
아니, 나 싫다고는 안 했는데.
‘이런 말을 리제가 먼저 하게 하다니.’
당혹스럽기보다는 부끄럽다. 연상이자 남편으로서 부인이 원하는 걸 먼저 이루어줬어야 했는데.
썰 풀이에 정신이 팔려서 당연한 의무를 잊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