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72)
로판 속 공무원 772화(773/945)
먼저 입을 연 리제를 향한 죄책감과 자괴감은 내 몸과 정신을 각성 상태로 만들었다.
남편으로서 신혼여행을 온 주제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 그걸 참다못한 아내가 먼저 부부의 권리이자 의무를 입에 담았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초조하고 부끄러웠을까. 이건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대참사다. 리제가 너그러운 성품이 아니었다면 내 명치에 정권 지르기 1만 번을 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둔한 노예 같으니라고.’
황제가 까라는 대로 까던 우둔한 노예가 이제는 우둔한 남편으로 퇴화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렇기에 침통한 심정으로 리제를 품에 안았다. 반성의 의미를 담아 평소보다 2배, 3배는 더 많은 애정을 속삭였다.
물론 무한의 2배는 무한이고, 3배도 무한이지만 마음만큼은 무한을 초월했다. 고작 수학 따위로 인간의 가능성을 통제할 수는 없어.
다만 언제나 그렇듯, 내 진심은 부인들의 가련한 몸으로 감당하기 조금 무거운 것 같다.
“…괜찮아?”
슬며시 리제의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절한 듯하다.
‘너무 무리했어.’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을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본래 이렇게 진심으로 나서면 며칠 정도는 소모하는 편이나, 이번 신혼여행은 그럴 수 없었다. 나와 리제의 방문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작가가 둘이나 있지 않나.
시간적인 여유가 생긴 것도 하루에 소모하는 시간이 줄어든 거지, 이틀이나 사흘 정도 노쇼를 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우리가 리조트에만 박혀 있으면 그만큼 로데사와 알렌의 속이 타들어갔을 거다.
그래서 며칠 동안 나눌 사랑을 압축해서 하룻밤에 쏟아부었고,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난 그 사실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지만 뜨겁게 타오른 가슴이 냉정한 머리를 짓누른 걸 수도 있다. 리제가 먼저 권유했는데 어떻게 뒤로 빼겠나─ 같은 뜨거운 열정이 모든 걸 잡아먹었다.
덕분에 리제만 고생했다. 리제를 부끄럽게 한 것도 모자라 육체적으로도 괴롭혔어.
‘리제가 마법사라 다행이지.’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제가 마법사, 그것도 그냥 마법사가 아닌 트릭시의 제자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 마법으로 리제의 육체가 강화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터졌을까. 상상만 해도 두려운 일이다.
“오늘까지 푹 쉬자. 하루 정도는 알렌이랑 로데사도 이해해 줄 거야.”
아직 기절 상태인 리제에게 부드럽게 속삭인 후, 협탁에 두었던 통신구를 들어 올렸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일이 생겨서 못 간다고 말해두자. 이 상황에서 억지로 가봤자 리제만 피곤할 뿐이야.
우리 좋자고 하는 일에 리제의 고통을 감수할 수는 없다.
***
백작에게서 오늘은 방문하지 못할 거라는 연락이 왔다.
이렇게 배려를 해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신혼여행을 온 부부가 처음 보는 인물들에게 귀한 시간을 내주고, 어디서 들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해주는 것 아닌가. 솔직히 나와 로데사 양은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로도 감지덕지할 수준이니,오늘 당장 귀국해도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백작은 우리의 편의를 위해 자신의 일정을 알려주었다.
게다가 나는 로데사 양과 달리 제국에서 정리한 자료도 받았다. 전후 이야기는 무리지만, 백작이 종군하던 시절의 이야기는 화려하게 작성할 수 있는 수준으로.
“뭐야. 부인만 못 오시는 게 아니라 백작 각하도 못 오신대요?”
“부부는 하나라고 하지 않나. 부인께서 못 오신다면 각하도 마찬가지겠지.”
나보다 먼저 연락을 받았던 로데사 양의 말에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혼여행 중인 부부가 갑자기 대외 활동을 중단한다면 그 이유는 뻔하다. 모두가 알지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그것일 터.
“뭐, 마침 두 분이 휴식을 취하신다면 오늘은 우리끼리 보내면 되겠군.”
“그러죠. 할 얘기도 많았는데 잘 됐네.”
그 말과 함께 로데사 양은 악필로 빽빽한 메모장을 한가득 가져왔다.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필체야.”
“빨리 쓰려면 어쩔 수 없죠. 오히려 속필인데 필체를 유지하는 영감님이 이상한 거라고요.”
“나 때는 다 이렇게─”
“자. 이 부분이 부인과 백작 각하가 처음 만난 부분이에요.”
자연스레 내 말을 끊는 로데사 양의 행태에 탄식이 나왔다.
연장자를 향한 배려와 존중이 이렇게 바닥을 치다니.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발크로스 문학계가 장차 어떻게 되려고.
‘이런 녀석이 차기 대문호라니.’
발크로스 문학계의 미래. 이대로 괜찮은 건가.
“참. 그런데 저, 부인한테 기묘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뭔가?”
“백작 각하께 첫사랑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사실 첫사랑이 있는 건 이상하지 않잖아요? 귀족도 사람인데 사랑에 좀 빠질 수도 있지.”
“그, 렇지.”
누구를 말하는지 알기에 떨떠름히 답했다.
“그런데 부인께서는 백작 각하가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냈다고 하셨어요. 그 첫사랑이라는 분이 떠난 분이겠죠?”
그 말에 잠시 고민했다. 백작은 나에게 첫사랑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말했으나, 부인은 아직 우회적으로 언급한 수준인 것 같다.
이유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백작의 첫사랑은 아무리 부인이라도 쉽게 말할 내용이 아니니까. 누군가의 첫사랑은 오직 그 사람만이 말할 수 있으니까.
‘말해도 괜찮겠지.’
허나 백작은 이미 나에게 첫사랑의 죽음을 알려주었다. 딱히 비밀로 하라는 말은 없었으니 소설에 넣어도 된다는 것일 터. 소설에 넣을 내용이면 결국 만인이 알게 될 내용이다.
그렇다면 보다 원활하고 완벽한 저술을 위해 정보를 공유해도 무방하다. 로데사 양의 추측에 확신을 얹어주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다.
“맞네. 각하께서는 대토벌 전쟁 때 첫사랑을 잃으셨지.”
“안타깝네요. 부인은 언니를 병으로 잃고, 각하는 전쟁으로 첫사랑을 잃고… 서로 상처가 있는 사람들끼리 만났어요.”
“그렇지.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지.”
동정심 가득한 로데사 양의 목소리에 슬쩍 품에 넣어두었던 종이를 건넸다.
“그래서 그런데. 각하의 첫사랑 이야기는 자네가 좀 도와줄 수 있나? 내 능력으로는 이 애틋함을 살려낼 수가 없어서 말이야.”
“아니, 그건 좀. 저도 써야 할 내용이 많은데요.”
“이 늙은이의 마지막 부탁이라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고려해 주게. 난 각하의 일대기를 마지막 작품으로 남길 생각이야. 설령 내 분야가 아니더라도,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부족하게 쓰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한 뒤 로데사 양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내가 자네를 위해 노력한 것도 많지 않나. 자네의 원고가 화재로 불탔을 때, 공모전 기간이 지날 거라며 울고불고하던 걸 내가─”
“어,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럼 최근 얘기로 할까? 자네가 살레리아 전당에서 전시회를 한다고 했을 때, 나이를 뒤로 먹은 것들이 입에 거품 물고 반대하지 않았었나. 그걸 하나하나 설득한 것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데사 양이 종이를 낚아챘다.
역시 로데사 양이라면 은혜를 잊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들이 아니야.
“…이번만이에요.”
“어차피 이번이 아니면 펜을 들 생각도 없네. 오히려 자네가 나한테 부탁할 일만 있겠지.”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구시렁거리는 로데사 양을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지금은 이렇게 불만을 표해도, 나이를 더 먹으면 나처럼 될 게 뻔히 보이니까. 이 바닥에서 오래 놀수록 늘어나는 건 혓놀림과 손놀림밖에 없지.
“응?”
그렇게 투덜거리며 종이를 읽던 로데사 양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뭐야. 제국백의 첫사랑이 평민이라고요? 이거 진짜예요?”
“어허. 지금은 리브노만 백작이시다.”
“아니, 당시에는 평민 맞잖아요!”
어느새 로데사 양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신분을 초월한 사랑. 비극적으로 끝난 결말에 눈이 뒤집힌 것 같다.
***
리제의 건강을 위해 하루의 휴식을 취한 후, 매일매일 알렌과 로데사의 저택으로 출석했다.
귀찮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매일 다른 얘기를 해서 그런지, 지겹기는커녕 매번 새로운 재미를 느꼈다. 나 사실 말하는 거 좋아하는 성격이었나?
아니면 두 작가의 열정적이고 격렬한 리액션 때문에 흥이 솟구친 걸 수도 있다. 글만 잘 쓰는 게 아니라 말도 잘 듣는 사람들이었어.
“이틀 후면 귀국할 예정이다. 그동안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네.”
“아쉽군요. 언젠가는 올 날이라는 걸 알았으나, 막상 각하와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올 지경입니다.”
“이거 참. 대문호와 각별한 사이가 된 것 같아 기쁘군.”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알렌의 모습에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 나도 아쉽다. 리제가 좋아하는 작가기에 첫 만남부터 기본적인 호감이 있었고, 그 뒤로는 내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겠다며 열정을 보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경청해 줬으니 더더욱 호감이 갈 수밖에 없다.
마음 같아서는 제국으로 데려가고 싶을 정도다. 본인이 발크로스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이 강하여 포기했지만.
“내일은 아마 리제와 마지막 관광을 즐길 것 같아. 그러니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작은 선물을 하나 주도록 하지.”
“선물이라니요. 이미 각하께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럼 저술을 위한 조언이라고 생각하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내에서 꺼내기에는 곤란한 선물이니까.
“잠시 밖으로 나가겠나?”
“아, 예.”
순순히 따라 나오는 알렌을 보다가 어제 구입한 검을 매만졌다.
당장 살 수 있는 검 중에서는 가장 고급 진 검이니, 제 역할은 충분히 할 거라 믿는다.
대토벌 전쟁과 북방 정벌을 논한다면 절대 빠트릴 수 없는 요소가 존재한다.
초원을 질주하는 유목민? 용맹하게 맞서 싸우는 제국군? 서로 죽고 죽이는 양측의 괴물들?
셋 다 중요하지만 그보다 강렬한 것이 존재한다.
“이, 이, 이건…”
“이게 멸세다. 하늘 베기라고도 부르지.”
바로 멸세, 다른 이름으로는 하늘 베기.
카간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대토벌 전쟁의 상징.
“역천자는 이 멸세를 수시로 사용하여 제국군이 사기를 꺾었다. 허나 제국 진영에서도 나를 포함하여 이 멸세를 미숙하게나마 흉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했지.”
“이, 이런 걸 여러 명이 말입니까?”
“지금은 나 빼고 다 죽었지만.”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후, 손에 들었던 검을 겁집에 넣었다.
“전에도 말했었지? 대토벌 전쟁 때는 탈라와 멸세로 승부를 보았고, 북방 정벌 때는 도르곤과 승부를 보았다고.”
“예에… 분명 그러셨습니다.”
“적어도 멸세가 어떤 기술인지는 알아야 묘사가 편하겠지. 그래서 선물 겸 조언으로 힘 좀 썼다네.”
물론 내가 아니라 외무성이. 제국 내에서도 함부로 쓰기 힘든 기술을 타국에서 쓰는 거잖아. 이 퍼포먼스를 위해 제국 외무성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무력시위가 아니라 문학 발전을 위해 한 번만 가르겠다고. 딱 한 번만 가를 테니 이해해 달라고. 아마 온갖 달콤한 말로 발크로스를 설득했을 거다.
“어떤가? 직접 보니 제법 다르게 느껴지지 않나?”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만족했다니 다행이군.”
그 말과 함께 검을 알렌에게 건넸다.
“자. 이것도 선물일세. 기억이 흐릿해지면 이 검을 보고 다시 기억을 되살리는 것도 좋을 거야.”
내 농담에 알렌이 눈동자가 거칠게 요동쳤다.
나름 회심의 농담이었는데 재미없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