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79)
로판 속 공무원 779화(780/945)
고심 끝에 제도 관광은 황태녀와 페디만 가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세쌍둥이를 포함하면 너무 눈에 띈다. 마법을 쓰면 엘프의 귀도 완벽히 가릴 수 있지만, 세쌍둥이는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 우애 좋은 세 자매지 않나. 이제 막 3살이 된 여아들이 한 몸이 되어 움직이면 제도의 슈퍼스타가 될 수밖에 없다.
세쌍둥이를 데려가지 못하니 그 아래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어딜 누나이자 언니가 못 가는데 동생들이 가려고 해. 그냥 이번 관광은 체험판이라 생각하고, 보다 상황이 좋아지면 조금씩 인원을 추가하자.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야.
“우와아아!”
그렇게 관광을 떠날 황태녀와 페디에게 마법을 거니, 황태녀는 연신 탄성을 흘리며 거울을 바라봤다.
“전하. 마음에 드십니까?”
“웅! 죠아!”
“후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눈을 반짝이는 황태녀의 모습에 트릭시도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페디는 어떠니?”
“나두 죠아!”
연이은 합격 선언에 트릭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마법이 대단하기는 하네.’
나도 황태녀와 페디를 보며 감탄하고 말았다. 둘의 원본을 알고 있는 나조차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만큼, 트릭시의 변장 마법은 완벽했다.
우선 황태녀는 황실의 상징인 보랏빛 눈동자를 흑안으로 바꿨다. 페디랑 같은 색을 해보고 싶다는 황태녀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
반면 페디는 머리를 은색으로 바꿨다. 이 또한 누나와 같은 색을 해보고 싶다는 페디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남매다.’
어쩌다 보니 통일된 머리색과 눈동자 색. 덕분에 탄생하게 된 자연스러운 꼬꼬마 남매의 모습.
흡족하다. 황실의 상징은 흑색으로 덮이고, 크라시우스의 흑발은 은색으로 덮였다. 서로가 서로의 특징을 자신의 것으로 뒤덮었어.
“자. 이제 칼 차례구나.”
“나도 똑같이 부탁할게.”
“걱정하지 말렴. 아빠와 자식처럼 보이게 할 테니.”
자신감 넘치는 트릭시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마법의 정점께서 친히 써주는 마법인데 누가 걱정 같은 걸 할까 싶다.
“와! 때부도 우리랑 똑갓태!”
“웅! 아빠 머리도 하얘!”
실제로 열렬한 반응을 보이는 황태녀와 페디를 보니, 나한테도 변장 마법이 완벽하게 먹힌 모양이다.
그보다 이왕이면 하얀 머리가 아니라 은색 머리라고 해줘. 하얗다고 하면 괜히 흠칫하게 되잖아.
“옷은 유리스와 소피아가 미리 준비했단다. 마음에 드는 걸로 입고 가면 돼.”
“다행이네. 마침 뭐 입고 갈까 고민했는데.”
게다가 따로 지시한 것도 아닌데 알아서 필요한 걸 챙겨오다니. 관광하는 도중에 소소한 선물이라도 사 가야겠다.
유리스랑 소피아도 어엿한 성인이니까 드레스랑 장신구 같은 게 좋겠지? 여차하면 도로 팔아서 현금화가 가능하게.
“때부! 가쟈! 빨리!”
그런 생각을 하며 옷을 갈아입으니, 먼저 평범한 의복으로 갈아입은 황태녀가 방방 뛰었다.
“전하. 가기 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밖에 있는 동안에는 저를 대부가 아닌 아빠라고 불러야 합니다. 기억하시지요?”
“웅!”
“저도 전하를 딸처럼 대할 거고요.”
“웅웅!”
“좋아. 그럼 가자.”
황제야, 보고 있냐.오늘 하루 황태녀는 네 딸이 아니라 내 딸이다.
맛있는 걸 잔뜩 먹여서 너랑 저녁 식사를 못 하게 만들고, 황궁으로 가자마자 바로 잠들 수 있게 잔뜩 놀아주마.
네가 황태녀와 굿나잇 뽀뽀도 못 하게 말이야.
‘내가 밀착 호위도 해주는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사실 내 대녀와 친아들의 일이니 호위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나, 황제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는 건 억울한 일이다.
내가 육체적으로 고생하면 넌 정신적으로 고생해야 돼. 그게 제국의 균형이야.
생각해 보니 제도를 느긋하게 구경하는 것은 나도 처음이었다.
근무지와 거주지가 제도다 보니 필연적으로 제도 곳곳을 살펴보기는 했지만, 그때는 ‘나 칼 크라시우스임.’ 이라는 걸 대놓고 보이며 돌아다니지 않았던가. 늘 제복을 입고 다닌 덕에 내가 귀족이라는 것, 감찰 공무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 관광은 나에게도 첫 관광이나 마찬가지다. 남들의 시선이나 감정을 신경 쓰지 않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첫 관광.
“아빠! 쩌기! 써커쓰!”
그리고 역사적인 첫 관광, 기념비적인 첫 번째 일정은 서커스 관람이었다.
어찌 보면 저 서커스 덕분에 황태녀가 제도 구경을 부르짖은 거니까. 서커스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높게도 솟아올랐다.
“보고시퍼! 보고시퍼!”
“보고 싶으면 봐야지. 저거부터 보고 다른 것도 구경하자.”
“야호!”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공연을 위해 설치된 임시 천막으로 달려가던 황태녀였으나, 천막 입구를 코앞에 두고 일시 정지했다.
“압빠. 이거 모야?”
그러고는 입구 옆에 진열된 봉투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팝콘이 가득 담긴 봉투를.
‘중세 배경에 팝콘이라.’
이게 맞나 싶지만 뭐 어떤가. 이 세계가 온갖 문화의 용광로라는 건 놀랄 일도 아니거늘.
그리고 연극 관람에는 팝콘이 빠질 수 없지. 이런 용광로라면 오히려 좋다.
‘온갖 음식은 다 먹여봐야지.’
결정적으로 평소에 황태녀가 먹지 못했을 음식들. 그런 음식들을 최대한 많이 먹이는 게 이번 관광 목적 중 하나다. 늘 먹던 음식만 먹으면 그게 무슨 관광이야.
“그것도 과자야. 평소에 먹던 과자보다 조금 짤걸?”
“먹어볼래!”
“나두!”
마치 어미 새를 향해 입을 벌리는 것 같은 황태녀와 페디의 기세에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혹시 우리 애들의 눈과 입이 고급이라서, 천한 길바닥 음식은 먹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나 했다.
“이거 얼마입니까?”
기꺼운 마음으로 진열대 근처에 있던 사람에게 물었다. 광대 분장을 한 걸 보니 분명 저 사람이 점원이야.
“예? 아, 예! 가격 말씀이시지요?”
내 말에 잠시 눈동자를 굴리던 광대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예쁜 아이들을 봐서 그런지! 오늘은 기분이 좋군요! 세 봉지 무료로 드리겠습니다!”
“예?”
“참. 마실 것도 필요하시지요? 그것도 세 잔 무료!”
그렇게 말한 광대는 거절할 틈도 없이 팝콘과 음료를 품에 안겨줬다.
일반인치고는 상당한 속도기에 조금 감탄했다. 서커스에서 단련한 단원은 뭐가 달라도 다른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돈은…”
“아이고, 괜찮습니다! 정 마음이 불편하시면 안에서 박수라도 쳐주십시오! 손님의 박수가 단원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진심 가득한 부탁이라 더 이상 권할 수도 없었다.
대신 선의를 받고 입을 닦기는 애매하니, 공연이 끝나면 슬쩍 팁이라도 두고 가자.
***
은발과 흑안을 가진 세 가족이 들어가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곧 공연이 시작돼서 슬슬 입구를 닫으려 했는데, 마지막에 저런 손님이 올 줄은 몰랐다.
‘셋 다 푸른 피다.’
내 본능이 외쳤다. 그동안 제국을 돌아다니며 쌓은 경험이 말해줬다.
저 셋은 분명 푸른 피다. 옷은 평범한 시민들처럼 입었으나, 옷으로도 감출 수 없는 품위가 넘쳐흘렀으니까.
아니, 애초에 생긴 것만 평범했지 보통 옷감이 아니었다. 어떤 평민이 저런 옷감으로 평상복을 만들어 입어.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중요한 장소에서 입지.
‘아는 척하면 그대로 박살 난다.’
허나 눈치 없이 푸른 피를 향해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굳이 변장을 한 걸 보면 느긋하게 놀고 싶은 모양인데, 그런 상황에서 광대 따위가 아는 척을 하면 무슨 꼴을 당할까.
그렇다고 다른 손님들과 다를 거 없이 대하는 것도 문제다. 귀족의 마음이라는 것은 실로 예민하고 기묘한 것. 본인이 귀족인 걸 숨겼음에도 평민처럼 대하면 은근 불쾌해하는 것이 귀족이다. 그럴 거면 애초에 숨기지를 말든가.
그래서 급하게나마 팝콘과 음료를 무료로 넘겼다. 귀족에게 간단한 간식 따위는 무료든 아니든 의미가 없으나, 아이들이 예쁘다고 칭찬했으니 조금은 흡족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믿고 싶─?
‘어?’
어느새 백발에 주황색 눈동자를 가진 남성이 내 앞에 서있었다.
뭐야. 분명 아까까지는 아무도 없었는데?
‘검은 제복?’
이윽고 남성의 복장을 보자마자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저 섬뜩할 정도로 검은 제복. 소매 부분에 새겨진 수장은 분명,
“과한 호기심은 겪지 않아도 될 위기를 불러오는 법이지.”
그렇게 말한 남성은 손가락으로 대은화를 한 닢 튕겨주었다.
“적절한 처신은 찾아오지 않을 복을 부르는 법이고.”
“며, 명심…”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려 하자, 남성은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대었다.
그냥 닥치고 있으라는 뜻이기에 말없이 허리를 숙였다.
“하.”
이윽고 슬며시 허리를 들자 바람처럼 나타났던 남성은 홀연히 사라져있었다.유령이라도 본 기분이라 실소가 절로 나왔다.
아니, 유령보다 더한 사람이니 유령과 비교하는 게 실례인가?
‘감찰성 사람이 왜.’
심지어 수장을 보면 일반 관료가 아닌 간부급 관료 같은데.
“과한 호기심은 겪지 않아도 될 위기를 불러오는 법이지.”
허나 남성이 했던 말이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 난 이 자리에서 무엇도 보지 못했어.
…
‘이런 곳에 대은화가 떨어져 있군.’
세상에 이런 행운이 다 있나. 열심히 일하는 나를 기특하게 여겨, 에넨께서 행운을 하사하신 모양이다.
길바닥에서 주운 거니 이 대은화는 내 거다.
***
서커스는 딱 예상한 구성의 공연을 선보였다.
그러나 21세기에서 온 내 입장에서야 예상한 구성이었지, 오락거리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이 세계에서는 다양하고 신기한 공연이었다. 게다가 예상한 구성을 극한의 퀄리티로 선보이기도 했고.
“압빠! 저것빠!”
그리고 황태녀는 불꽃링을 가뿐하게 뛰어넘는 여우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우리 저택에 말하는 짐승이 잔뜩 있거늘, 저런 사소한 걸로도 신기해할 줄이야.
“쩌거! 정결이도 할 쑤 잇지!?”
‘아.’
다른 이유로 좋아하는 거였구나.
“정결이! 똑또캐! 할 쑤 잇슬거야!”
“그, 렇지. 연습하면 가능하겠지.”
미안하다 정결아. 아무래도 당분간 나랑 점프 연습 좀 해야겠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어지는 접시쇼, 저글링, 탈출 마술 등등이 황태녀의 관심을 열심히 끌어주었다. 운이 좋으면 정결의 눈물겨운 불 쇼는 피할 수 있을 거다.
‘힘내라.’
속으로 서커스 단원들에게 응원을 보냈다.
정결이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라도. 부디 120%의 공연을 보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