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8)
자비로운 황금공 각하께서 하사하신 상자와 함께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길은 굉장히 즐거웠다.
걱정과 귀찮음을 안고 갔던 수학여행이 꽤 괜찮은 소득을 얻으며 끝났으니까. 은밀히 꽂히는 지원비가 50% 상승에 보야르 와인 6병이면 제국 종단을 해도 부족함이 없지. 그걸 고작 보야르행으로 퉁쳤다면 몹시 만족스러운 결과다.
“불편하시죠? 저 주세요. 제가 가지고 있을 게요.”
“괜찮아. 너도 불편할 텐데.”
“저는 안쪽에 앉아서 공간이 많아요. 어서요.”
의외라면 대화는커녕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한 이리나가 생각보다 덤덤했다는 것. 오히려 보야르로 갈 때에 비해 더 평온해진 것 같기도 하다.
마차에 오를 때도 이미 마차에 있던 이리나가 자기 옆자리를 툭툭 치며 앉으라고 하지를 않나, 지금도 상자를 품에 안고 있으니 자기한테 달라고 하지를 않나.
‘크라켄 효과가 컸나.’
아래로 흘린 눈물을 들킨 것보다 다칠 뻔한 걸 구해준 것을 더 크게 여기는 것 같았다. 손절해도 할 말 없는 가문의 원수인데 은인으로 생각해주면 고맙지.
사실 진짜 원수는 내가 아니라 3과장이지만, 부하와 상사는 운명공동체니 어쩌겠나. 그 새끼 공이 내 공이면 그 새끼 업보도 내 업보지. 슬픈 일이다.
아무튼 양손을 뻗으며 내 눈을 바라보는 이리나에게 조심스레 상자를 건넸다. 주기 전까지는 계속 저럴 것 같으니 원.
“둘이 많이 친해졌나 보네.”
그 모습을 보던 에리히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친해진 건 모르겠지만, 이전에 비하면 관계가 많이 개선되기는 했다. 친밀도가 -80에서 +20이 됐다면 무려 100이나 상승한 거니까.
그래봤자 0을 기준으로 하면 20 높은 수준이지만. 나와 이리나는 딱 그 정도 관계지.
“같이 마차에 있으니 친해질 법도 하지.”
“다행이에요. 이리나가 오라버니를 조금 어려워하는 것 같았는데.”
글쎄, 조금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오라버니는 좋은 사람이니까, 친해지면 좋을 거야!”
“으, 으응.”
그 말에 이리나가 귀가 빨개진 채로 고개를 숙였다. 좋은 사람, 친해지면 좋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낯 뜨거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건 힘들 거다. 아직 앙금은 남아있을 터.
“내가 편해지면 친하게 지내주겠지.”
마음을 풀지 못한다면 내가 불편하게 하지는 않겠다, 라는 의미를 담아 슬쩍 말했다. 그래, 친해지는 건 이리나가 편해지고 난 뒤의 얘기. 내가 친해지고 말고 논할 문제가 아니다.
“그럼 얼마 안 남았네요.”
헤헤 웃는 루이제의 말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루이제는 자세한 사정을 모르니까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
루이제의 눈은 놀랍게도 정확했다. 이게, 원작 주인공의 힘?
“빈손으로 오기는 그래서…”
수학여행이 끝나고 아카데미에서 보내는 일상이 다시 시작된 날, 동아리 시간에 손님이 찾아왔다.
“산사나무야. 꽃이 예쁘게 펴서 가져왔어.”
“와, 예쁘다!”
작은 화분을 안고 동아리실에 방문한 이리나는 루이제에게 화분을 건넸다. 하얀색 꽃이 핀 산사나무 묘목. 나무 종류는 잘 모르지만 제법 예쁘게 생겼다.
“고마워! 잘 키울게!”
“물만 제때 주면 돼.”
햇빛이 잘 드는 곳에 화분을 둔 루이제는 꽃이 마음에 들었는지 몇 번이나 화분을 살펴봤다. 꽃도 사람처럼 시선을 느낄 수 있다면 이미 부담감에 죽었을 정도.
그런 루이제를 보던 이리나가 시선을 나에게 돌리더니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빠.”
“그래, 안녕.”
그런데 너 여기 있어도 괜찮냐. 너네 동아리는 어쩌고?
“오늘 동아리 모임은 쉰다고 해서 놀러 왔어요. 폐가 됐을까요?”
그런 내 의문을 느꼈는지 이리나가 먼저 사정을 설명했다. 갈 곳을 잃어서 여기까지 흘러왔구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폐는 무슨. 편하게 쉬다가 가.”
“고마워요.”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이리나. 이렇게 예의 바른 아이인데, 그동안 그렇게 겁에 질려서…
“어? 이리나, 원예 동아리 아니었어?”
“응, 맞아.”
“오늘 원예 동아리 쉬…”
반죽을 주물럭거리다가 이리나의 얼굴을 본 에리히가 잠시 말이 없더니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아, 미안. 다른 동아리하고 착각했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작게 웃음 소리를 흘리는 이리나의 뒷모습을 보다가 애써 시선을 돌렸다. 비록 등을 돌리고 있어 표정은 못 봤지만, 어쩐지 못 본 게 다행인 것 같았다.
***
제과 동아리실 앞에서 몇 번이나 손을 움찔거렸다. 노크만 하면 되는데, 눈 딱 감고 하면 되는데.
‘괜찮을까?’
그동안 피하고 꺼렸는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와도 될까? 괜히 민폐인 건 아닐까? 속으로 이상한 애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 아니야. 난 그냥 친구를 보러 온 거야. 그리고 구해준 것에 대한 선물도 하지 못했으니 온 거야. 응, 올 이유로는 충분하잖아.
‘내 마음에 달린 거니까.’
분명 오빠는 내 마음이 편해지면 친하게 지낼 수 있다고 말했으니까. 예전에 좋지 못한 일이 있던 건 잊지 않았지만, 은인에게 계속 마음을 닫을 수는 없지. 그건 귀족으로서 마음이 넓지 못하잖아.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고 동아리실에 들어가니 루이제와 오빠가 맞이해줬다. 갑작스런 방문에도 꺼려하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다. 선물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고.
“산사나무 꽃말이 관용인가 용서였을 거야.”
선물로 뭘 가져갈지 고민하다가 동아리 선배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딱 적당한 꽃말을 들었다.
관용, 용서. 딱 좋다.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는 조금 부끄럽고 듣는 오빠도 난감하겠지만, 이렇게 부드러운 표현이면 문제될 것이 없다. 아마 오빠도 내 세심함을 알면 감탄하겠─
아니, 아니야. 감탄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이건 그냥 선물이니까. 응, 큰 의미는 없어. 가벼운 첫 선물이야.
“어? 이리나, 원예 동아리 아니었어?”
오늘 동아리 모임은 쉰다고 둘러대서 제과 동아리실에 있을 명분을 확보하니 에리히가 말을 걸었다. 설마 거짓말인 걸 알았나? 에리히 친구 중에 나 말고 다른 원예 동아리도 있었나?
“오늘 원예 동아리 쉬…”
지금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려는 에리히를 말없이 쳐다보자 에리히에게 내 진심이 전해졌는지 입을 다물었다.
“아, 미안. 다른 동아리하고 착각했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역시 에리히는 정말 착해. 친구의 진심을 알아주고 작은 거짓말을 넘어가 주잖아.
제과 동아리실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나왔다. 조금 부담스러운 높으신 분들도 생각보다 괜찮은 분들이라 어색했던 건 아니지만, 선배가 동아리 시간 동안 다른 곳에 가는 건 괜찮지만 끝날 때는 돌아오라고 해서.
“시간 되면 부담 갖지 말고 놀러와!”
“그래도 될까?”
“응! 그래도 괜찮죠?”
“그래. 뭐 숨겨둔 곳도 아닌데.”
그래도 언제든 다시 와도 된다는 허락도 맡았다. 아쉬워 할 건 없다.
“선배. 다녀왔어요.”
“아, 이리나.”
원예 동아리실로 돌아가자 산사나무의 꽃말을 알려준 선배가 반겨줬다.
“혹시 산사나무, 이미 선물로 줬어?”
“네? 갑자기 왜요?”
“아, 그거 꽃말이 다른 것도 있더라고.”
볼을 긁적이던 선배가 덧붙인 말에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유일한 사랑도 꽃말이라 하더라. 오히려 그게 관용보다 유명하던데.”
“아.”
아.
아아…
아아아아아아!
‘아, 안돼!’
어, 어떡해, 어떡해!
나, 난 처음부터 그렇게까지 다가갈 생각은 없었어! 그냥 이제는 괜찮다고, 딱 그 정도만 말하려고 했는데…!
“이리나?”
“서, 선배, 그, 정말, 그게 제일 유명해요?”
“이미 줬구나.”
극심한 당혹감 속에 삐걱삐걱 겨우 고개를 끄덕이자 선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받은 분이 꽃말을 모르면 괜찮아.”
“만약, 알면…?”
“…….”
“선배?”
선배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무엇보다 무겁게 다가왔다.
제발, 제발 오빠가 꽃말을 모르기를. 내 세심함? 부드러움? 그런 거 정말 몰라도 괜찮으니까 제발!
***
화분이 생기니 동아리실에 생기가 추가된 것 같은 기분이다. 작은 거 하나지만 아무튼 식물은 식물이니까. 보기는 좋네.
“밀가루를 쏟아도 별 티도 안 나겠군.”
뒤틀린 미적 감각을 지닌 류티스가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저 시뻘건 놈은 기껏 꽃을 보고 한다는 말이. 너는 핫소스 뿌려도 별 티도 안 나겠다.
“하얀 것도 보기 괜찮네? 꽃은 색이 있어야 예쁘다 생각했는데.”
“무엇도 담기지 않은 것도 아름다운 법이죠.”
그 뒤에는 에리히와 아인테르가 정상적인 감상을 주고 받았다. 그래도 전부 빅-핫소스맨 같은 감각을 지닌 건 아니라 다행이다.
그리고 화분을 행주로 닦던 루이제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보답으로는 뭐가 좋을까요?”
아, 보답.
“괜히 보답이라고 챙겨주면 부담스럽겠지. 올 때마다 간식이라도 주면 충분해.”
“그런가요?”
이게 평범한 선물이라면 보답을 줘도 괜찮다. 그런데 루이제에게 화분을 주면서도 나한테 시선을 보내더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크라켄 사태에 대한 감사 인사 선물이다.
자기를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 선물인데 거기에 은인이 보답 선물을 준다? 그러면 이리나는 보답의 보답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기괴한 연쇄네.
“이리나가 마카롱을 좋아하니까 마카롱으로 준비하면 되겠네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오늘은 마카롱이 대량 생산될 것 같다. 그런데 마카롱도 만들 줄 알고 대단하네…
“이리나도 기뻐하겠네. 힘내.”
“네!”
의욕에 가득 찬 루이제의 모습을 뒤로 하고 이리나가 준 화분을 바라봤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산수나무? 아니, 산사였나?
‘처음 듣네.’
어떤 사람은 꽃 색깔에 따른 꽃말까지 외우고 다니지만 난 그런 거 모른다. 애초에 어느 계절에 무슨 꽃이 나는지도 잘 모르는데. 봄에 벚꽃 피는 정도만 알면 충분하지 뭘.
그래도 보기 예쁘기는 하다. 밀가루만 풍기는 곳에 식물이 있으니 공기가 맑아진 것 같기도 하고. 다음에 오면 고맙다고 다시 말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