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81)
로판 속 공무원 781화(782/945)
라비르제 후작의 차녀와 그 자식들의 행차.
차라리 후작 당사자가 온다면 후작과 대화라도 했을 거다. 하다못해 후계자라도 왔다면 그럭저럭 대화 상대로 삼을 수 있었을 거다. 허나 애석하게도 차녀가 오고 말았다.
내 기억으로 라비르제 후작의 차녀는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평범한 영애다. 사교계에서도 자신과 친한 몇몇 영애와 어울린다고 하니, 대화 상대나 거래 상대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 밝은 곳에서 지내는 사람에게 정치를 묻히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
‘둘 중 하나가 물러날 수는 없다.’
사실 둘 중 하나가 물러나는 것이 최선이지만, 나나 차녀나 자식들과 함께 동물원에 온 상황이다. 아이들의 두근거림과 설렘을 무시하고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니 결국은 둘 다 동물원에 진입해야 한다는 건데…
‘최대한 피해 다녀야 하나?’
괜찮은 방법이다. 우리 일행 중에 통제 불가능한 꼬꼬마들이 있다는 것만 빼면.
내가 차녀 가족을 피해 다니려고 해도, 황태녀가 ‘나 저기 가고시퍼.’ 라고 한마디만 하면 답이 없다. 그곳에 후작의 차녀가 아니라 후작의 어머니가 있어도 달려가야 한다.
부모로서 절대 품어서는 안 될 교만이 아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다. 부모는 자식을 통제할 수 없으며, 자식에게 제발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사정해야 하는 존재다.
‘어쩌지 이거.’
골치 아프다. 동물원 관광을 보류할 수도, 차녀에게 진실을 말할 수도, 마주치지 않게 피해 다닐 수도 없다. 이럴 줄 알았다면 동물원 얘기는 늦게 꺼내는 건데.
‘…아.’
그러다 문득, 페디의 가짜 은발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차녀 가족과 만나는 것 자체가 아니다. 황태녀가 후작의 핏줄인 차녀 가족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상황이지.
그렇다면 고개만 안 숙이면 되는 거 아닌가?
“얘들아? 동물원에 가기 전에 잠깐만 쉬었다 갈까? 저기 카페에서 음료라도 마시면서.”
“시러! 빨리 가고시퍼!”
“우리 안시어도 돼! 바로 갈래!”
“사실 아빠가 조금 피곤해서 그래.”
“그럼 쪼끔만이야!”
다행히 황태녀와 페디는 이 아빠가 피곤하다고 하니 휴식을 허락해 줬다.
참으로 자비로운 처사지만 어린아이들의 자비는 오래 가지 않는다. 길어야 10분이나 20분 정도가 한계일 터.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20분까지 갈 것도 없이 2분 정도만 시간을 확보해도 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다.
“장인어른.”
그렇게 빠르게 근처 카페로 들어가고, 아이들에게 먹고 싶은 걸 고르게 한 뒤 슬쩍 뒤로 물러났다.
– 사위? 아니, 머리가 왜 그런가?
내 시련을 해결해 줄 영웅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 에리랑 색을 맞추기로 한 건가?
라비르제 후작의 위세와 비교해도 결코 부족하지 않은, 다섯 번째 장인어른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후작가에는 후작가로 맞선다. 솔직히 공작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으나, 후작의 차녀를 막자고 공작가를 동원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잖아.
“아이들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어서 말입니다.”
– 이런, 사위도 고생이 많아.
장인어른은 그 말에 대충 상황을 파악하신 듯, 껄껄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 그래. 마침 은발이니 내 보증이 먹힐 수도 있겠어.
이윽고 내가 부탁하려던 것을 먼저 입에 담으셨다.
믿고 있었다. 역시 제국 후작 1, 2위를 다투는 능력자의 눈치는 뭐가 달라도 달라.
– 사위. 오늘 하루는 우리 가문의 방계로 지내게. 자세한 정보는 통신구로 보낼 테니 확인하고.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 이런 걸로 감사는 무슨. 내가 늘 사위에게 고맙지.
진심 가득한 장인어른의 말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에리 덕분에 나는 장인어른의 영원한 은인인 상태니까.
‘됐다.’
아무튼 내 기대대로 장인어른은 시련 해결에 큰 도움을 주셨다.
상대가 후작가 사람이면 나도 후작가 사람이라고 우기면 된다. 직계가 아닌 방계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직계라고 블러핑을 치면 금방 들킬 수도 있다.
뭐, 방계여도 황태녀가 차녀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피할 수 있으니 상관없겠지. 같은 후작가 사람끼리 뭔 고개를 숙여.
“오.”
이윽고 장인어른이 보낸 문자를 보자마자 탄성을 흘리고 말았다.
[ 오늘 하루는 알란 비루나 오브 살린 남작으로 지내면 된다네. ]단순히 방계라는 이름만 준 것이 아니라, 작위 귀족이라는 타이틀도 선물해 주셨다.
살린 남작이라. 아무래도 장인어른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작위 중 하나인 것 같다.
동물원 관광은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평민 한스나 제임스가 아닌, 명실상부한 작위 귀족인 살린 남작이다. 라비르제 후작이 강림하지 않는 이상 내가, 황태녀가, 페디가 고개 숙일 필요는 없다.
‘애초에 만날 확률도 적겠지만.’
수많은 동물이 있는 만큼 드넓은 제도 동물원. 위장 작위를 받기 전에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하기에 불안했으나, 막상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이성이 돌아왔다.
이 정도로 큰 동물원에서 차녀 일가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나. 과장 좀 보태면 모래사장에 바늘 하나를 던진 뒤, 추가로 실뭉치를 던졌을 때 그 실이 바늘구멍에 들어갈 확률이다.
“우와! 엄쳥커!”
“신기해! 쟈선이랑 친졀보다 기러!”
그렇기에 마음 놓고 황태녀와 페디에게 기린을 보여줬다.
마침 배가 고팠는지 안 그래도 긴 목을 더욱 꼿꼿하게 세워 이파리를 뜯어먹는 중인 기린. 약 5M에 육박하는 거대한 동물이 느긋하게 풀을 뜯어 먹자, 두 아이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기린아! 여기바!”
페디가 양팔을 격렬하게 휘저었으나, 야속한 기린은 처음 보는 아이보다 눈앞의 식사에 집중했다.
당연하지만 안타까운 결과다. 한 번이라도 이쪽을 봐줬으면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이 됐을 텐데.
“히히, 마니 배고픈가바.”
“그러개! 마니 먹어!”
허나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기린의 꿋꿋한 식사에도 불구하고 황태녀와 페디는 서운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기린의 식사 장면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볼 뿐.
“압빠, 아빠.”
“왜 그러니?”
“기린은 어떠케 울어?”
그 말에 순간 머리가 굳고 말았다.
그러게. 기린은 어떻게 울지? 동물이니 울기는 울겠지만 들어본 적은 없어서.
‘말처럼 우나?’
혹시 기린도 히힝거리면서 우는 타입인가? 아냐, 기린이 그렇게 운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
그러면 기리링? 아니, 그럴 리는 없다. 기린이 포켓몬도 아니고 자기 이름처럼 울 리가 있냐고.
“그게…”
“아! 여기봣따!”
조심스레 입을 열자마자 기린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동시에 페디의 관심도 내가 아닌 기린에게 향했다.
고맙다. 네가 나를 살렸어.
***
최대한 멀리서 장관 각하와 페디, 황태녀 전하를 지켜보았다.
사실 각하가 계시는 순간부터 호위는 필요 없으나, 호위라는 건 강력한 한 명보다 평범한 여럿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 덕분에 집행차장인 내가 직접 현장에서 호위 인력을 통제하게 되었다.
‘이렇게 긴장감 없는 작전은 오랜만이군.’
허나 필요성과 별개로 실효성이 떨어지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각하의 무력과 부성애. 이 두 가지가 결합되었으니 문제가 터질 리 있나. 눈치 빠른 광대 하나가 각하의 정체에 접근하려던 걸 막은 것. 그거 말고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라비르제 후작의 차녀가 동물원에 온다는 것이 변수였으나, 각하께서는 통신구로 이오네스 후작과 대화를 나누셨다. 아마 라비르제 후작 문제도 알아서 처리하셨겠지.
‘졸지에 동물 구경만 하게 생겼어.’
그렇게 아무 소란 없이 각하를 따라다닌 덕에, 나도 덩달아 온갖 동물을 보게 되었다.
긴 목이 인상적인 기린, 코와 상아가 인상적인 코끼리, 멸종 위기종이라는 호랑이, 추운 곳에서만 산다는 백곰, 사람조차 삼킬 것 같은 덩치의 뱀 등. 살면서 지금까지 본 동물보다 오늘 본 동물이 더 많은 것 같다.
‘라나도 좋아하겠지.’
그리고 가족끼리 돌아다니는 손님이 많아서 그런지, 저절로 저택에 있는 라나가 생각났다.
마침 이번 호위 임무가 끝나면 이틀의 휴가를 받는다. 이럴 때가 아니면 부부가 함께 여가를 즐길 기회가 드물지. 그러니 휴가 중에 라나와 함께 동물원에 오는 것도 좋을 거다.
이미 동물원 내부의 효율적 동선, 적당한 휴식 장소, 판매하는 기념품과 음식은 전부 파악했다. 현지답사도 진행 중이니 라나에게 완벽한 구경을 선물할 수 있다.
‘음?’
아이처럼 기뻐할 라나를 상상하는 사이, 각하 방향으로 웬 여아 하나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각하를 보고 달려오는 건 아니다. 그저 무작정 달리는 방향에 각하가 계실 뿐.
‘후작의 외손녀인가?’
더욱 자세히 여아를 살피니 누가 봐도 고급스러운 의복과 새하얀 피부가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후작의 차녀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독자 행동을 시작한 모양이다.
‘그냥 두면 위험하겠어.’
그러나 눈물이 그렁그렁한 여아─ 라비르제 후작의 외손녀를 보니 의도한 독자 행동은 아닌 것 같았다.
외손녀를 방치하면 각하와 조우하게 될 테고, 후작의 차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진 자식을 걱정할 터. 적당히 수습해서 차녀 쪽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분명 그래야 했는데.
“꼬마야. 왜 울고 있어?”
‘아.’
우리가 나서기 전에 각하가 먼저 달려가셨다.
후작의 외손녀에게 말을 걸면서도 아차 한 표정을 보니,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신 모양이다.
‘부성애인가.’
각하도 여러 아이들의 아비. 그러니 남의 아이라도 우는 아이를 그냥 두지 못하시는 것 같다.
***
혼자 울고 있는 여아를 보자마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저 멀리서 다가오던 감찰부 요원들은 나와 어색하게 눈을 마주치더니, 조용히 몸을 돌려 다시 멀어졌다.
아니, 아니야. 그냥 다시 돌아와…
“꼬, 꼬마… 아니야…!”
“음?”
여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우리 하라부지. 엄쳥 높은분… 흐끅, 높은 분이야… 나, 꼬마 아니라, 하라버지 손녀야!”
높은 분의 손녀여도 꼬마라는 건 변하지 않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그러려니 싶었다.
“웅? 우리 하라버지도 어어어엄청 높아!”
“쉿.”
그 와중에 자기 할아버지를 자랑하려던 황태녀를 만류했다.
네가 할아버지를 동원하는 건 반칙이야. 제국에서 네 할아버지보다 높은 사람은 없어.
“아냐! 우리 하라부지가 노파!”
“아니야! 우리 하라버지가 더 노파!”
‘아.’
졸지에 할아버지 배틀이 붙은 황태녀와 여아를 보며 이마를 짚었다.
할아버지 운운하는 걸 보면 이 아이가 라비르제 후작의 외손녀 같은데. 상황의 손녀와 후작의 외손녀가 고스트 그랜드-파더를 찍고 있다.
아니, 둘 다 살아있으니 고스트는 아닌가?
“압빠. 우리 할부지도 노파?”
페디의 말에 조용히 페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감스럽지만 은퇴한 할아버지는 저 사이에 끼기 애매하니 외할아버지만 생각하자. 우리 페디 외할아버지도 공작이라 높은 분이야.
상황 앞에서는 낮은 사람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