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85)
로판 속 공무원 786화(786/945)
어린아이들에게 있어 신분이라는 것은 썩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물론 아이들도 어느 정도 머리가 굵으면 신분의 고저를 완벽하게 파악하지만, 다행히 이 자리에 모인 아이들은 5살 3명에 4살 1명. 신분을 보고 친구를 사귀는 게 아니라 사귀고 나서 신분을 알게 되는 나이.
“우리 쟤니도 똑또칸데요, 띠띠는 엄쳥 신기해요.”
“마자. 우리 띠띠 물구나무도서.”
– 멍!
덕분에 황태녀, 후작의 외손녀, 제국백 후계자, 기사의 후계자가 정겹게 둘러앉아 오순도순 대화를 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평범한 광경은 아니다. 아이들이 아니라 뒷배의 신분을 보면 황제, 후작, 제국백, 기사가 나란히 앉은 것이나 다름없잖아. 앞에 셋까지는 어떻게든 가능하지만, 마지막 기사의 존재감이 미쳐 날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차기 황제도, 기사의 딸에 불과한 아이도 이 자리에서는 친구기에.
“근대 핼랜. 뒤에 요짜는 왜 부쳐?”
“엄마가 항태녀 져너한태는 붙이래! 요!”
“안 부쳐도대! 뻬디랑 앙리애따도 그런거 안해!”
“진쨔요?”
“웅!”
“그럼 안할래!”
친구 사이에 성격이나 성향의 차이는 있어도 높고 낮음의 구분은 없기에.
“헬렌에게 좋은 친구가 생겼군. 축하한다.”
미소를 머금으며 다시 루치아노의 어깨를 토닥였다. 반쯤 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을 보니, 육체적 터치가 없으면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치, 친구라니요! 황송하고도 과분한 말씀─”
“황태녀 전하께서 경의 저택에 방문한 것은 폐하께서도 알고 계신다. 경에게 전하 또래의 자식이 있는 것도.”
뒤늦게 정신이 돌아와 기겁하는 루치아노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황태녀가 기사 가문의 친구를 사귀는 건 내 독단도, 황태녀의 고집도 아니다. 황태녀라면 사족을 못 쓰는 황제가 동의한 일이다.
황제에게 중요한 것은 황태녀가 친구를 사귀는 거니까. 신분에 상관없이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매일매일이 즐거웠으면 하니까.
‘본인은 그러지 못했으니 한이 생긴 거겠지.’
황제가 황태자는커녕 1황자에 불과했던 시절. 서자였던 1황자는 2황자 파벌에게 온갖 핍박과 수모를 당하여 좋지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 1황자 인생에 친구 같은 건 없었고,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사용인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소중한 딸만큼은 자신과 다른 길을 걷기를 바라는 거다. 신분이고 뭐고 그 아이의 성품이 양호하다면 누구라도 친구가 될 수 있게 응원하고 있다.
괜히 황제가 제도 동물원에서 황태녀와 앙리에타의 조우를 듣고 감동했을까. 아마 후작의 외손녀가 아니라 평민의 외손녀였어도 좋아했을 거다.
“전하께서는 훗날 황제가 되어 제국의 모든 것을 굽어살피실 분이다. 그런 분께서 기사 가문이라고 홀대하실 것 같나?”
“그, 건… 아닙니다.”
“그리고 존귀한 황실이 보기에 후작도, 제국백도, 기사도 충성스러운 신하에 불과하지. 황제 폐하와 황태녀 전하께서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 등급을 매겨 대우하실 것 같나?”
“그것도, 아닙니다…”
내 연이은 질문에 루치아노는 얼떨떨히 고개를 저었다.
순간 표정에서 ‘등급 있지 않나?’ 라는 감정이 살짝 보였지만, 루치아노는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 제국의 모든 신민들은 폐하와 전하 앞에 평등하다. 그대가 기사더라도, 황실을 향한 충성심이 굳건하다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나.”
그리고 작은 의문 정도는 기세로 억누를 수 있다.
“애초에 기사면 뭐 어떤가? 평민이었던 경이 몇 년 사이에 기사가 된 것처럼, 다시 몇 년이 흐르면 귀족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 황태녀 전하께서 귀족가의 후계자와 노는 게 이상한가?”
사실 이상한 일 맞다. 루치아노가 작위를 받는 건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지만, 그건 미래지 현재가 아니니까.
허나 사소한 시차 따위는 뭐 그리 중요하겠나. 루치아노에게 정당성을 주는 게 중요한 거지.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도록. 그저 자네의 딸이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는 것에, 밝고 선량한 친구가 헬렌을 좋아할 거라는 것에 기뻐하면 돼.”
“명심, 하겠습니다.”
“좋아.”
고개를 끄덕이는 루치아노를 향해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우정은 아이들의 웃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부모의 이해와 지지 속도 동반되어야 이루어지는 법이지. 그런 의미에서 루치아노가 황태녀의 위엄에 짓눌려 있다면, 황태녀와 헬렌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
황태녀가 올 때마다 아빠가 벌벌 떤다. 반대로 헬렌이 황태녀를 보러 갈 때마다 아빠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그렇게 된다면 헬렌이 어찌 황태녀와 마음 편히 놀 수 있을까.
“띠띠! 물구나무!”
– 멍!
“와아아!”
“호, 혹씨 이대로 걸을쓰도 잇써?”
“띠띠! 아프로!”
– 멍멍!
“우와아아아아!”
저런 흐뭇한 광경을 앞으로도 보기 위해서는 루치아노의 적극적 협조가 필요하다. 루치아노도 저 아이들의 우정을 당연하다고 여겨야 한다.
…
‘잘 걷네.’
그 와중에 티티의 놀라운 묘기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아니, 무슨 개가 물구나무를 서면서 전진하는 건데. 누가 보면 티티가 서커스단 출신인 줄 알겠어.
“졔니! 졔니두 물구나무!”
– 머, 멍?
연신 살랑거리던 제니의 꼬리가 우뚝 멈췄다.
그리고 뒷발을 움찔움찔 떠는 걸 보니, 불가능하더라도 시도는 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충견이다.’
기특하고도 안타깝다. 작은 주인의 무리한 요구에도 고민부터 하고 보다니. 역시 리트리버들은 하늘이 내린 견종인 건가.
– 멍멍!
“와! 띠띠 엄쳥 빨라!”
“짤한다 띠띠!”
더욱 놀라운 것은 제니가 곤란해하는 걸 본 티티가 거의 뛰는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한 거다.
우리 티티. 주인을 닮아서 그런지 육체적 능력이 엄청나구나.
“참, 경?”
“예, 각하.”
“아직 경의 부인과는 인사를 나누지 못했군. 갑작스러운 방문이니 더 기다리는 게 좋겠지?”
난데없이 황태녀를 맞이하게 생긴 니덴 가문의 안주인. 지금쯤 저택과 사용인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점검 중일 테니, 차마 저택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황태녀의 행차를 막지 못했으면 적어도 준비할 시간은 주는 게 사람의 도리니까. 루치아노에게는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했지만, 가문의 안주인이 손님을 정성스레 맞이하는 건 별개의 문제기도 하고.
우리 저택에서도 부모님이나 장인, 장모님들, 때때로 장관이 올 때마다 마르가 열정적으로 저택을 확인했었지. 안주인의 고충을 아는 입장에서 다른 사람의 준비를 방해할 수 없었다.
“각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무얼. 손님으로서 당연한 일이지.”
그 뒤로 한참이나 네 아이들, 두 개가 우다다다 뛰어다니는 걸 구경했다.
그저 뛰어노는 걸로도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니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아가씨가 저렇게 즐거운 모습으로 뛰어다니시다니. 영지에서는 놀 상대가 없어서 인형만 가지고 노셨는데…”
심지어 침묵을 지키던 앙리에타의 유모도 어느새 눈가를 닦으며 감격에 빠진 상태였다.
어른들을 울고 웃게 만드는 건 언제나 아이들인 것 같다.
그날 이후로 세 여아는 케르베로스처럼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셋 중 리더는 황태녀가 되었다. 딱히 신분이 우위라서 그런 건 아니고, 단순히 셋 중 황태녀가 제일 활발하고 목소리가 우렁찼다. 자기 또래의 두 아이는 능숙히 통솔할 정도로.
“저희 아이들의 누나이자 언니 노릇을 하셔서 예상은 했으나, 역시 황태녀 전하께서는 지도자의 자질이 있으십니다.”
“너무 호들갑 떨지 말게. 동생이나 친구들과 노는 것에 지도자는 무슨.”
살며시 고개를 젓는 황제였지만 나는 봤다. 황제의 입꼬리가 미친 듯이 씰룩거리는 걸.
“우리 황태녀는 그저 현명하고 선량할 뿐이야. 아직 지도자 운운할 수준은 아니지.”
“그렇군요. 명심하겠습니다.”
이윽고 자연스레 자기 딸 얼굴에 금칠을 했다.
그보다 지도자의 자질이 현명하고 선량하다는 거잖아. 뭘 굳이 정정하고 있어.
“헌데 장관. 짐이 궁금한 것이 있네만.”
“말씀하소서.”
“루치아노 경은 괜찮던가? 아이는 순수하니 황태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루치아노 경은 아니지 않나.”
그 말에 빤히 황제를 바라봤다.
“그 걱정을 이제야.”
“큼.”
무심코 튀어나온 본심에 황제는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다행이다. 정말 본능적으로 나온 말이라 나도 당황했는데, 황제에게 티끌만 한 양심은 있었구나.
‘이 정도 워딩은 괜찮은 건가?’
더욱 고무적인 사실은 황제를 욕하고 싶을 때, 어느 수준으로 내뱉어야 할지 감이 잡혔다는 거다.
과실이 황제 쪽에 있으면 대놓고 까도 무방하다. 그것이 공적인 일이 아니라 사적인 일이라면 더더욱.
‘좋아.’
앞으로 조금씩 수위를 올려서 늘려보자. 언젠가는 공적인 업무에서도 당당히 반박할 수 있게.
“다행히 루치아노 경은 황태녀 전하와 딸의 우정에 기꺼워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전하의 방문을 황송하게 여겼으나, 전하의 순수함과 자비를 보았는데 어찌 망설이겠습니까. 더 이상 전하의 방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음, 당연한 일이로군. 황태녀의 성품을 알게 되면 그럴 수밖에 없지.”
흡족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황제의 모습에 불안감이 치솟았다.
어째 제2, 제3의 루치아노가 연이어 발생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일개 신하로서는 방지할 수 없는 가련한 피해자들이.
***
황태녀가 흥미로운 소식을 가지고 왔다.
“띠띠랑 졔니! 엄쳥 친해!”
“제니? 그게 누구더냐.”
“헬렌 친구! 띠띠랑 또가치 생겻써!”
양팔을 파닥이며 제니라는 동물에 대해 설명하는 황태녀.
그렇군. 아무래도 장관이 기르는 티티와 동일한 견종인 모양이로군.
“때부가 그러는대! 띠띠가 졔니 죠아한대! 둘이 겨론할쑤도 잇때!”
“결혼이라.”
“웅! 겨론!”
참으로 흥미로운 소식이다. 내가 황실의 큰어른이신 전대 로드로부터 받은 강아지 중, 유일하게 장관을 따라간 아이가 티티다. 그런 티티가 장관의 사랑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더니, 어느새 짝짓기를 할 시기가 되었다라.
‘잘 돌보는 것 같아 다행이로군.’
장관에게 그 아이를 넘긴 건 조금 즉흥적인 결정이었거늘. 그 결정이 후회로 돌아오지 않아 어찌나 다행인지.
‘제니.’
이윽고 안도는 의문으로 변하였다. 대체 제니라는 녀석은 어떤 아이길래 티티가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그리고 그 주인이라는 헬렌, 루치아노 경은 어떤 사람일까.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물론 의문은 의문으로 그쳤다. 내가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루치아노 경에게 관심을 보인다면, 상황의 관심을 일개 기사가 감당해야 하기에.
그건 도리가 아니다. 제국을 위해 노력하는 신하에게 너무도 무거운 부담을 주는 것이다.
‘평민의 몸으로 기사작을 받은 인재다.’
그런 인재를 내 손으로 꺾을 수는 없다.
“황태녀.”
“우웅?”
“친구를 만나는 것은 좋다만, 루치아노 경과 자주 대화할 필요는 없다.”
“웅! 때부도 그러케 말해써!”
그 말에 작은 안도감이 들었다. 황태녀의 보호자인 대부는 상식을 유지하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