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87)
로판 속 공무원 788화(788/945)
트릭시가 의외의 물건을 건네주었다.
아니. 이걸 단순히 물건이라는 말로 넘어가도 되는 걸까? 물건보다 더 고귀하고 신묘한 단어를 써야 하지 않을까?
“저기. 트릭시?”
“말하렴.”
“이게 뭐야?”
물론 어떤 단어를 써야 할지 정하는 것보다 이것의 정체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한 뼘의 두께를 자랑하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종이 더미. 과장을 빼도 ‘이걸로 사람 치면 죽겠구나.’ 싶은 수준의 흉기.
심지어 종이에는 빽빽하게 글씨가 적혀있었다. 그것도 정자로 적힌 글씨가 아닌 휘날리듯 작성한 필기체로.
“내가 아카데미 재학 시절에 작성한 논문과 과제, 막 마탑 소속이 되었을 때 진행한 연구 자료란다. 공작성에 있는 원본을 제외하면 그게 유일한 물건이지.”
“어?”
상상 이상의 대답이 돌아와서 절로 멍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유벤 연합왕국은 마도강국이라 불릴 정도로 마법에 대한 열의가 강하지 않니. 마법사들의 평균적인 수준을 따지면 제국과 비교해도 결코 부족함이 없지. 라테르 왕자도 그런 유벤의 왕족이니, 선물로 준다면 기뻐하며 받아줄 거야.”
기뻐하는 수준이 아니라 절을 하며 받을 것 같은데.
순간 그런 말이 입안을 맴돌다가 사라졌다. 아무리 나와 트릭시밖에 없는 자리고, 라테르가 나와 그럭저럭 사적인 연이 있는 사람이라지만─ 왕족을 대상으로 절이니 뭐니 말하는 건 부담이 크니까.
“그리고.”
멍하니 종이 더미를 내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발표하지 못하셨던 논문. 그것도 몇 개 사본으로 만들어서 넣었단다.”
“아니, 그런 귀한 걸 왜.”
몽롱했던 정신이 순식간에 각성했다.
아무리 선물이라도 그건 너무 과한 감이 있다. 비록 사본이라지만 둘째 장인어른의 열정과 세월이 담긴 물건이잖아. 그걸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준다고?
“사실 그건 순수한 축하보다는 나와 아버지를 위한 결정이란다.”
그런 내 마음을 이해했는지, 트릭시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변한 이론, 새롭게 나타난 증명을 도입해서 완전히 가다듬었지. 조만간 내 명의가 아닌 아버지의 명의로 발표할 생각이야.”
그렇게 말한 트릭시는 내 손에 들린 종이 더미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사본이 아닌 진짜 유품을 다루는 것처럼.
“아마 칼. 네가 라테르 왕자에게 선물을 건네줄 때쯤이겠지.”
“아.”
그 말에 트릭시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둘째 장인어른이 미처 발표하지 못한 논문. 마법의 정점인 트릭시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논문. 그런 논문이 10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둘째 장인어른의 명의로 발표되고, 마도강국이라 불리는 유벤 왕자에게 선물로 보내진다? 대륙 모든 마법사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유벤 마도의회의 의원들도 눈이 뒤집혀 장인어른의 논문을 갈망할 거다. 대륙 서쪽 끝에서는 마탑이, 동쪽 끝에서는 마도의회가 주축이 되어 둘째 장인어른의 이름을 드높일 거다.
“꼭 전달할게. 너무 귀한 물건이라 못 받겠다고 하면 입에 쑤셔 넣어서라도.”
“후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단다. 마도의회에 슬쩍 두고 와도 충분해.”
쿡쿡 웃음을 흘린 트릭시는 잠시 눈을 감더니, 살며시 나를 끌어안았다.
“이루지 못한 꿈을 사위가 대신 전달하게 됐구나. 분명 아버지도 기뻐하시겠지.”
“영광이네. 그동안 딸을 훔친 도둑으로 지내는 것 같아 민망했는데, 둘째 장인어른을 뵐 면목이 생겼어.”
내 농담 아닌 농담에 트릭시의 몸이 미약하게 떨렸다.
남편의 부족한 농담에도 웃느라 그런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트릭시와 장인어른의 논문.’
트릭시를 마주 끌어안으면서도 트릭시와 장인어른의 추억을 놓지 않았다. 한 손에 들기에는 다소 두꺼운 분량이지만 결코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 종이 더미가 과학으로 비유하면 아인슈타인과 폰 노이만의 작품인 것과 별개로, 처가의 아름다움도 가득 담겼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라테르한테 주기에는 너무 과분한 선물인데.’
아주 잠깐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만든 물건이라면 별생각 없이 줬겠지만, 이렇게 귀한 걸 고작 라테르에게 주는 것이 옳은 건가? 77년도 시즌 때 내 멘탈을 수시로 긁은 그놈에게?
‘주기는 줘야겠지.’
그래도 장인어른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라테르의 업보와 별개로 유벤의 왕자라는 신분은 무시할 수 없지 않나.
게다가 이건 원본이 아닌 사본이다. 진짜 추억은 여전히 트릭시의 손에 있으니, 대의를 위한 작은 희생이라고 생각하자.
유벤 연합왕국으로는 해상 이동이 아니라 텔레포트를 통해 입국했다.
내가 어지간하면 이동 과정도 여행의 일부로 취급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유벤은 너무 멀잖아. 유벤이 어디 옆 동네도 아니고 대륙 반대편인데, 순수히 배를 타고 움직이면 이동 시간으로만 신혼여행의 절반을 까먹을 수 있다.
물론 지즈의 광속 비행이나 레비아탄의 공중 기동을 사용하면 빠르게 이동할 수 있으나, 그 수준에 이르면 여행이 아닌 무력시위가 되기에 참았다. 결혼식을 피의 결혼식으로 만들 일 있나.
“조금 아쉽네. 동쪽 바다는 어떻게 생겼나 구경할 기회였는데.”
그래도 편의를 위해 린의 추억을 앗아간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적어도 발크로스까지는 배로 이동한 다음에, 발크로스에서 텔레포트를 쓸 걸 그랬나?
“괜찮아요. 유벤은 넓으니까 이동 시간이라도 줄여야 더 많이 볼 수 있죠.”
“그런가?”
허나 린은 내 우려와 달리 바다에 아무런 미련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린이 아쉬움을 표했다면 귀국할 때는 겨울 바다를 뚫고 나아가려 했었어.
‘바다하고 안 친해서 다행이야.’
이런 생각을 하는 건 굉장히 실례지만, 린이 바다와 썩 친한 편은 아니었지…
“오빠? 왜 그러세요?”
그리고 내 실례되는 생각을 간파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린의 모습에 움찔하고 말았다.
이 미친놈아. 부인을 앞에 두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 어디부터 갈까 고민하느라.”
“서부부터 가지 않을래요? 유벤에서만 서식하는 동물들은 보통 서부에 있대요!”
“그럴까?”
허술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린은 자비롭게 넘어가 주었다. 그것도 어디를 먼저 갈지 직접 정해주는 배려와 함께.
이렇게 착한 부인의 흑역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리다니. 반성하자, 나 자신아.
“서부는 코끼리의 상아나 물소의 뿔로 만든 장식품이 유명하다 하더라고요. 게다가 물소 뿔로는 활도 만들고요.”
“알차게도 써먹는구나.”
이 세계에서도 다용도로 쓰이는 물소에게 소소한 명복을 빌어줬다. 설마 세계를 가리지 않고 뿔을 뜯기고 다닐 줄은 몰랐어.
그래도 무기의 재료라면 유벤에서도 개체를 열심히 조절 중일 테니, 무분별한 포획으로 멸종 위기에 처하지는 않을 터. 뿔을 내어주고 종족의 번영을 누렸으니 이득이 아닐까 싶다.
그냥 그렇다고 치자. 이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물소가 불쌍하니까.
‘물소라.’
린과 나란히 걸으면서도 머릿속은 물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거 린에게 물소 얘기를 듣기 전에는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제국군도 물소의 뿔로 활을 만든다고 들었다.
하지만 물소는 유벤에서만 서식하는 종이라 물소의 뿔은 철저히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 덕분에매년 제국 외무성과 산업성은 유벤과 멱살잡이를 하느라 바쁘고.
‘마음 같아서는 수입이 아니라 자급자족 하고 싶지.’
그러나 특정 동물이 특정 지역에만 서식하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북극곰을 호주에 던지면 ‘미쳤습니까 휴먼?’이라 욕을 하고, 기린을 남극에 던지면 죽음을 택하는 것처럼. 몇 마리 동물원에서 키우는 건 가능해도 대량 사육하는 건 무, 리…
…
‘될 것 같은데?’
문득 크로이타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을 베히모스가 떠올랐다.
베히모스가 신이었던 시절에는 목축의 신이었지. 지금도 베히모스가 돌보는 가축들은 다른 가축들보다 건강하니, 신이었던 시절의 권능이 어느 정도는 이어지고 있을 터.
그런 베히모스에게 물소도 던져주면? 환경이라는 마이너스 요소를 신의 힘으로 커버하면?
‘이건 된다.’
아무리 물소가 환경에 예민해도 신의 권능 앞에서도 뻣뻣할까.
이건 분명히 먹힌다. 제국도 물소를 사육할 수 있어.
“린.”
“네?”
“물소 몇 마리 정도는 구입할 수 있겠지?”
난데없는 물소 수입 선언에 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
얼마 지나지 않아 탄성을 흘리는 걸 보면 린도 베히모스에게 생각이 닿은 모양이지만.
그 반응을 보니 안도감이 들었다. 베히모스를 통해 물소를 양성하는 것이 비전문가의 만용이 아니라, 상인의 피가 흐르는 린이 보기에도 그럴듯하다는 거니까.
“공산품보다 식품, 식품보다 사치품, 사치품보다 생물의 수입 절차가 까다로운 편이에요. 특히 전략 물자 취급인 물소는 말할 것도 없지만─”
빙긋 미소를 지은 린은 당당히 말을 이었다.
“왕족에게 부탁하면 몇 마리는 충분히 가능하죠. 어쩌면 그 이상도 될걸요?”
“역시 인맥이 최고네.”
라테르에게 부탁하면 가능하다는 말. 듣기만 해도 흡족한 대답인지라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라테르와 유벤이 난색을 표해도 상관없다. 그것들이 양심이 있다면 트릭시의 선물을 보자마자 수백 마리는 무상으로 주겠지. 그깟 물소보다는 마종공과 탐명공의 작품이 더 귀하잖아.
“서부에 가는 김에 우리 상품도 구경할까?”
“좋아요! 이왕이면 튼튼한 애로 구해야죠!”
안 그래도 반짝이던 린의 눈동자가 더욱 빛났다.
유벤에서만 생산이 가능한 전략 물자 수입 및 현지화. 린의 흥미를 최고조로 끌어올리기에 충분한 사건이다.
뭔가 신혼여행을 와서 산업스파이로 활동하는 기분이지만, 부인이 기뻐하면 그만 아닌가 싶다.
***
유벤 연합왕국에 입국한 장관이 통신구로 보고를 올렸다.
[ 베히모스를 통한 물소 사육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라테르 왕자와 접촉할 때 물소 수출을 청할 터이니, 폐하께옵서 적절한 숫자를 정해주십시오. ]당연하지만 보고를 보자마자 실소가 나왔다.
‘대체 뭐 하는 놈이지.’
왜 신혼여행을 가서도 시키지도 않은 일을.
이래놓고 내가 일을 시키면 표정으로 온갖 욕을 하는 놈이.
‘평생 휴가 상태로 둬야 하나?’
순간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오히려 감찰성 장관 자격으로 지내면 국내에만 머물러야 하지만, 개인 자격이면 지금처럼 온 대륙을 누빌 수 있다.
허나 어디까지나 생각으로 그쳤다. 한 부서의 장관이 계속 부재중인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물소 사육이라.’
일단 이건 장인어른과 더 자세히 논의해 보자. 물소를 제국에서도 기를 수 있다면 제국군의 홍복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