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9)
산사나무 묘목에 대한 보답은 이리나가 받을 부담감을 고려하여 적당히 마카롱을 대접하기로 했었다.
“바빠서 못 온대요.”
그러나 루이제의 마카롱이 이리나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감사 선물만 주고 사라진 이리나는 그 이후로 거짓말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루이제는 시무룩하게 말했지만 사실 당연한 일이다. 며칠 전에 온 것도 동아리 모임이 하루 쉬는 상황이라 올 수 있었다고 했으니까. 이리나가 동아리 시간을 내던지지 않는 이상 또 놀러 오는 것은 힘든 일이지.
덕분에 루이제가 만든 마카롱은 하이에나 같은 부원들이 나눠 먹었다. 저 새끼들, 평소에는 먹지도 않던 놈들이 왜 이번엔.
“아, 오라버니. 이리나가 선물 어땠냐고 묻던데요?”
“선물? 마음에 들지. 대신 전해달라고 하지 않았어?”
아무래도 이리나를 동아리실에서 보기는 힘들 것 같아 루이제에게 대신 감사를 전해달라고 했다. 어제 부탁한 말을 잊을 애는 아닌데?
“전하기는 했는데, 혹시 오라버니가 다른 말씀을 하신 건 없는지 묻더라고요.”
“그래?”
선물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이면 충분하지 않나. 굳이 그렇게 묻는 걸 보면 뭐가 더 있는 것 같은데.
‘화분에 뭘 숨겼나?’
가끔 그런 경우가 있긴 하다. 중요한 물건을 화분 안에 숨겨 단순한 선물로 위장해서 운반하는 경우. 돈이든 문서든 화분 크기에 따라 자유롭게 쑤셔 넣을 수 있어서 종종 쓰는 방법이기는 한데.
그런데 이리나가 그렇게까지 했다고? 물론 그럴 확률은 적지만, 괜히 선물에 대해 다시 묻는 걸 보면 뭔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가문에서 보낸 건가.’
만약 이리나 개인이 아닌 요룬 백작가가 보낸 거라 생각하면 가능성이 있다. 아무래도 혼자 있을 때 확인 좀 해야겠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난 홀로 빈 화분에 도로 흙을 담으며 조심스레 묘목을 심었다. 우리 소중한 산사, 혹시 뿌리라도 다치면 그대로 말라 죽을 테니.
‘내가 미쳤지.’
추악한 어른이의 시선으로 꽃다운 17세 소녀의 마음을 재단한 것이 문제였다. 동아리실에 출근하자마자 화분을 탈탈 털어서 확인하니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을 보인 화분과 뿌리까지 세상에 드러난 처참한 산사나무의 자태에 얼마나 자괴감이 들던지. 난 멀쩡한 선물을 과대망상에 시달려 파헤친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이리나…
혹여나 화분을 복구하는 도중에 이리나가 방문하면 무슨 얼굴로 맞이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상황에 이리나가 찾아올 정도로 내 운이 파멸적이지는 않았다.
“예쁘네.”
아름다운 자태에 감탄을 담아 말했다. 사실 미안함이 더 많이 담겼다.
개판이 된 화분을 정성을 다하여 복구하는 것에 성공했다. 새하얀 꽃잎이 시꺼먼 내 마음을 꾸짖는 것 같아 얼마나 민망한지. 그래, 화분은 있는 그대로 두는 게 제일이다. 안에 뭔가 숨겨두다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발상인가.
이리나도 신경 써서 고른 식물이니 자세한 감상을 원해서 떠본 거겠지.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닐 거다. 그렇고 말고.
‘시발.’
마음이 아프다.
박람회, 시험, 수학여행이라는 대형 일정을 연달아 치른 아카데미는 꽤 조용했다. 이제 기말시험을 제외하고는 방학만 바라보는 시기. 게다가 기말시험은 중간시험과 달리 실기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조용히 지나갈 수 있다. 이제 정말 방학뿐이야!
그리고 이제서야 1학년 1학기가 지났다는 걸 인식하니 마음이 썩 좋지 못했다. 3학년 2학기까지 어떻게 버티지? 얘네 도중에 자퇴하고 귀국하거나 하지는 않을까?
“곧 방학이군요.”
“예, 시간이 참 빠르게 흐릅니다.”
아마 간절한 자퇴 기도는 눈 앞의 빌라르도 하고 있을 거다. 왕족 밀착 경호라는 중임을 맡았으니 임무만 끝나면 승진 확정이지만, 이딴 장기 임무를 하고 승진할 바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승진도 안 하는 게 마음 편하다.
심지어 이딴 임무가 승진 이유다? 그러면 앞으로 비슷한 일이 생길 때마다 제일 먼저 짬을 맞는다. ‘한 번 해봤으니 네가 잘 하겠지.’ 라는 개같은 이유와 함께. 시발, 그럼 처음 짬맞을 때는 왜 맞았냐고. 그때는 해보지도 않았는데.
“감찰관님?”
“아,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갑자기 치솟는 PTSD에 입을 다물고 있자 빌라르가 의아한 듯 말을 걸었다. 손님을 앞에 두고 이런 실례를.
“그럴 수도 있지요. 저도 귀국이 다가오는지라 그 생각에 정신이 팔리고는 합니다.”
“그렇군요. 이거 당분간 빌라르 경을 보지 못할 테니 아쉽군요.”
웃으며 넘어가는 빌라르의 말에 마주 웃었다.
아쉽기는 개뿔. 우리는 사적인 친밀도와는 별개로 서로 얼굴을 보지 않는 게 최선인 관계다. 서로 자기 나라에서 마음 편히 지내고 어쩌다 가끔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며 추억 팔이나 하는 게 제일이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습니까? 그래도 가을이면 다시 뵐 테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 다음 학기 책임자도 나다.
“하하, 이거 방학 동안 빌라르 경께 드릴 선물이나 구해야겠군요.”
= 너도냐? 나도 쭉 이어서 한다.
겉으로는 밝게 웃는 우리의 두 눈은 암울한 빛이 감돌았다. 책임자 교체를 바라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대를 걸었지만, 결국 직접 입 밖으로 내뱉어 인정하게 됐으니까. 우리 2년 반 더 한다.
삼국은 이번 학기가 끝나고 느그 나라 놈들이 귀국하면 방학 사이에 호위 전력을 개편할 예정이라고 한다. 물론 개편된 전력 명단도 제국에 제출하기로 했고.
‘급하게 오기는 했지.’
삼국 주요 인사의 아카데미 입학은 삼국 입장에서도, 제국 입장에서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높으신 분들의 행보와 그에 따른 의전은 못해도 한 달 전부터 계획되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끔찍하지.
그래서 지금 아카데미에 머무는 삼국 전력은 즉시 동원 가능한 인력을 아득바득 긁어모아 던진 것에 가깝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호위 전력을 세세하게 구성할 여유가 없으니 일단 급한 불부터 끄기 위한 땜빵. 그러니 방학 동안 제대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
물론 아까 말한 것처럼 빌라르는 예외다. 빌라르는 단순히 호위 전력이 아니라 삼국을 대표해서 제국과 소통하는 창구. 이제 와서 창구를 바꾸면 오히려 골치 아파진다. 덕분에 빌라르는 다른 동료들이 탈주에 성공하는 꼴을 보기만 하는 입장.
‘내가 누굴 걱정하냐.’
그리고 나도 빌라르와 같은 이유로 아카데미 감찰관 타이틀을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얼마 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장관을 찔러봤는데, 재미없는 농담 말고 그냥 내가 계속하라고 하더라. 개새끼, 나는 진심이었는데.
빌라르가 사라지면 내가 삼국과 새로 관계를 다져야 한다. 내가 사라지면 빌라르가 제국과 새로 관계를 다져야 한다. 둘 다 사라지면 양측 관계가 완전히 리셋되고 터진다. 그냥 우리 보고 쭉 하라는 지랄 맞은 선택지다.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좋지요. 부탁드립니다.”
둘이서 깡소주를 들이킬 것 같은 분위기지만 정작 마시는 건 평범한 차다. 교육의 장에서 술판을 벌일 수는 없으니.
“이거 왕자들께서 오랜만에 밟는 조국 땅을 더 각별히 여기시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 너네 왕자들 그냥 귀국했다가 눌러 앉게 할 수 없냐?
“워낙 굳센 분들이라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3왕자 전하께서도 조국을 사랑하는 만큼 심지가 굳은 분이시죠.”
= 되겠냐? 조국이고 향수병이고 뒤도 안 돌아보고 입학하던데.
“그거 대단하군요. 역시 고귀한 피를 잇는 분들은 비범한 면이 있습니다.”
= 고집은 더럽게 세네.
그리고 조용히 찻잔에 입을 댔다. 어림도 없다는 듯 반응하는 빌라르를 보니 속이 쓰렸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내상만 입고 끝났네. 개새끼들, 그냥 즈그들 나라에나 있지 쓸데없이 고집만 세서 사람 피곤하게.
그렇게 나와 빌라르는 차를 몇 잔이나 비운 끝에 헤어질 수 있었다. 그래, 방학 동안이나마 안 보이는 곳으로 꺼지는 게 어디냐.
해가 뜨자마자 황금공에게 받은 상자를 챙겨 본관으로 향했다. 교장에게도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양해를 구했으니 금방 다녀오면 된다. 뭔가 오전 반차 쓰는 기분인데.
“부장님. 모시러 왔습니다.”
“그래. 잘 부탁한다.”
그렇게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에서 마법사 하나가 툭 떨어졌다. 얘네는 텔레포트 출장시 매뉴얼이라도 따로 있나. 어째 볼 때마다 하는 말이 똑같다.
아무튼 순식간에 재무성 청사에 도착하고 마법사는 쿨하게 제 갈 길을 떠났다. 너무 칼같이 떠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쟤네를 인간 나르는 택배 기사라고 생각하면 바쁠만 하긴 하다. 밥 먹을 시간은 있으려나.
“벌써 왔냐?”
“각하?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텔레포트 마법사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걱정하는 사이 뒤에서 장관이 말을 걸었다. 아니, 해가 뜬지도 얼마 안 된 시간인데? 이 양반 원래 이 시간에 출근했나?
“일찍 눈이 떠져서 미리 와 있었다.”
“늙으면 잠이 없어진다던데.”
“그러는 너는 늙지도 않은 새끼가 왜 벌써부터 깨 있어서.”
늙어가는 상사를 향한 안타까운 심정에 말한 것이지만 장관은 퉁명스레 답했다. 걱정해주는 것도 알아듣지 못하다니, 사람이 평소에 화가 많으면 듣는 귀도 꼬이는구나.
“참배는 멀었으니 들어와. 감찰부도 아직 안 모였다.”
“알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먼저 가고 싶지만 다 같이 움직여야 하니 어쩔 수 없지.
녀석들의 기일은 대토벌 전쟁 종전 기념일이기도 하다. 물론 ‘제국이 유목민에게 승리를 거둔 것은 당연’하기에 종전 기념 행사를 따로 하지는 않지만, 국립묘지에 모여 묵념 정도는 하는 상황.
어차피 단체 묵념은 금방 끝나니까. 그때까지만 참고 그 녀석들 묘로 가면 된다.
“아, 의회에서 오는 인원 중 타일글레헨 백작도 있다.”
“예?”
그건 좀 의외네. 전쟁 이후로는 외부 활동을 잘 안 하는 사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