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90)
로판 속 공무원 782화(791/945)
두 소녀의 할아버지 배틀은 치열했다. 둘 다 자기 할아버지에 대한, 정확히는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큰 아이들이다 보니 누구 하나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라비르제 후작은 자신이 상황과 대결 중이라는 걸 안다면 기겁하겠지. 그래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라비르제 후작은 이 대참사를 모른다. 황태녀도 저 소녀의 외할아버지를 모르고, 소녀도 황태녀의 할아버지를 모른다. 이 얼마나 감사스러운 일인가.
“우리 하라부지 엄쳥 대다네! 엄쳥 놉꼬! 동물들도 마나!”
“으읏…!”
‘뭐야.’
그리고 두 소녀의 치열한 대결은 황태녀의 승리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인 것이 밝혀져서 승리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상황의 동물 농장이 밝혀져서 라비르제 후작의 외손녀가 전의를 상실한 것이었다. 저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무는 것을 보면 효과는 확실한 모양이야.
아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가? 제국 서부에 있는 라비르제 후작의 혈족이 제도 동물원까지 올 정도면 동물을 좋아한다는 거잖아. 그런 만큼 상대가 ‘우리 할아버지는 동물이 잔뜩 잇따!’ 라는 말을 하면 동요할 수밖에 없다.
‘애는 애구나.’
후작의 외손녀고 뭐고 결국 평범한 꼬꼬마이기에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혹시 핏줄을 믿고 오만방자한 악역 영애 타입인가 싶었는데, 그냥 황태녀 또래의 아이였어.
“우, 우, 우리 하라버지는…”
아무튼 체크메이트 직전에 몰린 외손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고,
“아가!”
“엄마?”
아슬아슬하게 게임을 탈주하여 패배를 피할 수 있었다.
과연. 게임 내에서 역전할 수 없다면 판 자체를 접으면 되는 거군. 어린아이지만 한 수 배웠다.
“엄마아아아!”
외손녀도 자신이 패배에서 벗어나려면 탈주밖에 답이 없다는 걸 아는지, 자연스레 자신을 부르는 쪽으로 달려갔다.
분명 헤어진 모녀가 상봉하는 아름다운 광경이거늘. 왜 칙칙한 어른이의 눈에는 패배 직전 탈주로만 보일까. 세상을 이렇게 더러운 눈으로 보면 안 되는데.
“앙리에타! 엄마가 옆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니!”
“그, 그치만 하얀곰… 신기햇는대…”
울먹거리는 외손녀─ 앙리에타의 모습에 후작의 차녀로 추정되는 여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가고 싶으면 엄마한테 말하고 가. 알았지?”
“우웅… 재송해여…”
그러고는 앙리에타를 껴안으며 연신 등을 토닥였다.
창백했던 안색에 서서히 혈기가 도는 걸 보니, 딸을 잃어버린 긴장감이 빠르게 해소되는 중 같다.
“앙리에타! 부인!”
“우우!”
뒤이어 차녀의 남편, 둘째 자식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줄줄이 나타났다.
다행이다. 잃어버린 부모를 찾아주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내가 나서지 않았어도 알아서 합류했겠어.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희 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요. 별말씀을. 우연히 가는 길에 겹쳐서 잠시 대화를 나눴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물러나려던 찰나, 상황을 파악한 차녀의 남편이 먼저 허리를 숙였다.
이건 제법 의외인 상황이었다. 내가 장인어른께 위장 신분을 받기는 했으나, 복장은 아직 서커스를 보던 그대로였다. 겉으로만 보면 평민인지 귀족인지 구분이 안 될 터인데 허리부터 숙였다.
그것도 하위 귀족이 아닌 후작의 사위인 귀족이.
‘나였어도 이랬을까?’
잠시 저 사위의 입장으로 생각해 보니 금방 결론이 나왔다.
상대가 평민이어도 그게 대수인가. 내 자식을 찾아줬는데 노예여도 허리를 숙여야지. 그 자리에서 평민으로 면천 시켜주고, 3대가 먹고 살 금화까지 줄 의향이 있다.
“그 우연도 에넨께서 내린 운명 아니겠습니까? 참, 저는 알베르트 디고라고 합니다.”
‘데릴사위였나.’
디고라면 분명 라비르제 후작의 성이었지. 부인이 남편의 성으로 변한 게 아니라 그 반대인 걸 보면, 이 양반이 데릴사위로 들어온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그게 더 무서운 상황이다. 후작과 따로 사는 게 아니라 함께 산다는 뜻이잖아. 원래 가까이 있는 자식에게 더 시선이 가고, 시선이 더 가는 자식에게는 총애와 권력이 가는 법이다. 후작의 데릴사위라면 평범한 지방 귀족보다 강력할 수밖에 없다.
“알란 비루나 오브 살린이라고 합니다.”
“이런, 작위 귀족이셨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실례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과분하게도 이오네스 후작 각하의 핏줄을 이은 덕에, 분수에 맞지 않는 작위를 얻은 것이니까요.”
자연스레 내 뒷배도 설명해 주자 알베르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사실 장인어른의 영지인 이오네스 후작령은 제국 서부에 위치해있다. 라비르제 후작령도 서부에 있으니, 두 후작가는 이래저래 경쟁하기도 협력하기도 하는 사이였지. 온갖 고운 정과 미운 정이 붙은 이웃이 두 후작가의 관계다.
“설마 제도에서 서부 이웃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알베르트도 본능적으로 경계하는 모양이지만,
“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게다가 저런 예쁜 아이도 보게 될 줄 몰랐고요.”
노골적인 칭찬에 알베르트의 입꼬리는 빠르게 귀에 걸렸다.
딱 예상한 반응이라 만족스러웠다. 5살 정도의 딸을 가진 아비라면 응당 그래야지.
“여보.”
“아, 부인. 이분은 살린 남작이십니다. 이오네스 후작 각하와 연이 있으신 분이지요.”
“그렇군요. 서부의 이웃께서 저희 딸을 찾아주셨으니, 실로 에넨께서 인도하심입니다.”
이윽고 앙리에타를 달래는 데 성공한 차녀도 살며시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후-쟉? 그럼 쟤 하라부지도 후쟉님이야?”
그리고 차녀의 뒤에 착 달라붙어있던 앙리에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아니란다. 할아버지는 후작 각하가 아닌 다른 분이야.”
“모야! 그럼 우리 하라부지가 더 놉짜나!”
“아냐! 우리 할부지가 놉따니까!?”
다시 터진 2차 할아버지의 난에 쓴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
앙리에타를 찾아준 것도 인연이니, 살린 남작 가족과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근대 진쨔 너네 하라부지 집애 소 잇서?”
“오리도 잇고 닭도 잇써! 엄쳥 마나!”
“우와아…”
게다가 앙리에타도 살린 남작의 딸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말싸움을 하더니 다투면서 정이 든 모양이야.
기쁜 일이다. 사촌들을 제외하면 또래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 앙리에타기에 아직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아이가 없었다. 마침 살린 남작도 마살로 후작가의 방계이니 서부에서 지내지 않겠나. 앙리에타와 자주 만날 수 있을 거다.
살린 남작이 정말 살린 남작이라면 말이다.
‘분명 이오네스 후작이 가진 작위였지.’
부인과 결혼하여 디고 후작가의 일원이 되었을 때, 디고 후작가의 라이벌인 마살로 후작가에 대해 철저히 알아본 적이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살린 남작은 이오네스 후작에게 속한 많고 많은 작위 중 하나였다. 4대 전 마살로 가주 때 얻은 작위기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평범한 작위. 심지어 살린 남작위에는 영지도 묶여있지 않았지.
그런데 갑작스레 이오네스 후작과 연이 있다고 주장하는 살린 남작이 나왔다. 누군가가 새롭게 작위를 수여받았다면 반드시 소문이 났을 터인데.
‘사칭은 아니다.’
어느 미치광이가 제국 후작 중 1, 2위를 다투는 이오네스 후작의 작위를 사칭할까. 이오네스 후작과 연이 있다는 건 진실일 거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누가 대체 후작이 가진 작위를 거짓으로 내세우고, 후작은 그걸 허용할 만큼 신뢰하는 것일까.
“여보.”
“아, 부인.”
쪼르르 걸어가는 앙리에타와 살린 남작의 딸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부인이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갑자기 왜 그래? 표정이 심각한데.”
“앙리에타가 사라졌던 걸 생각하니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서요. 쉽게 진정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도 참. 나도 놀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찾았으니 편히 있어.”
살포시 웃으며 내 손을 잡는 부인. 그런 부인을 향해 나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편히 있을 수 없지.’
허나 부인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없었다.
디고 후작가의 라이벌인 마살로 후작가. 마살로 후작가의 정점인 이오네스 후작. 그런 후작과 연관된 주요 인물을 놓쳤다. 살린 남작이라는 이름이 버젓이 사용됨에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는 장인어른의 기대와 신뢰에 부응하지 못한 수치다.
‘명색이 첩보감인 내가.’
설령 장인어른이 모르시더라도 나는 알아야 했다. 디고 후작가 대내외의 정보는 내가 담당하고 있지 않나. 그 능력을 인정받아 부인과의 주제넘는 연애를 인정받았지 않나.
‘당분간 잠은 포기해야겠군.’
살린 남작의 뒤통수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사촌에 육촌에 이웃까지 전부 파악해야 이 답답함이 풀릴 것 같다.
“우리 집애도 동물 잔뜩 잇써!”
“진쨔루?”
“웅. 다들 쟉구 기여워.”
어느새 살린 남작의 아들도 앙리에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부디 앙리에타가 이 친구들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어른들의 사정 때문에 앙리에타가 상처받는 건 보고 싶지 않아.
라비르제 후작령으로 복귀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인어른의 호출이 있었다.
“혹 제도에서 살린 남작이라는 자를 만났느냐?”
그리고 장인어른의 입에서 살린 남작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막 복귀했기에 아직 무엇도 알지 못한다. 장인어른이 살린 남작에 대해 묻는다면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죄송합니다, 각하! 제 능력이 부족하여 마살로 후작가가 숨긴 패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바닥에 엎드리며 장인어른의 사위가 아닌, 디고 후작가의 첩보감으로서 사죄를 드렸다. 이는 명백한 내 실수이고, 능력 부족이니까.
“그러지 말고 일어나거라. 이건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이야.”
“예?”
“일단 이거부터 읽고.”
내 앞으로 다가와 직접 서신을 하나 건네주신 장인어른.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서류를 받자마자, 장인어른은 작게 한숨을 내뱉으셨다.
불안하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이게 무슨.’
이윽고 서류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몸이 굳고 말았다.
[ 황태녀의 암행을 함구한 경의 사위, 알베르트 디고에게 치하를 보낸다. ]무려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서신. 내가 황태녀 전하의 암행을 함구했다는 기묘한 내용.
[ 황태녀가 경의 손녀와 우애를 쌓은 것 같으니, 앞으로도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우리 앙리에타가 황태녀 전하와 친구가 되었다는 믿기 힘든 내용.
[ 감찰성 장관 또한 경의 사위에게 감사를 표하였으니 알아두라. ]마지막으로 살린 남작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문장까지.
‘확실히…’
감찰성 장관이 마살로 가문과… 연이 있기는 하지…
“사위.”
“예, 장인어른.”
“노고가 많았다. 당분간 푹 쉬거라.”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까딱 잘못했으면 감찰성 장관의 정보를 캐는 미친 짓을 저지를 뻔했다.
***
헤어지고 나서야 알게 된 거지만, 알베르트는 디고 후작가의 첩보감이었다.
어쩐지 눈빛이 묘하게 익숙하더라. 이쪽 바닥에서 구르는 양반이라 친숙한 눈빛이었던 거였어.
‘설마 동물원에서 가족 여행 중인 첩보감을 만날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디고 후작가의 첩보감이라면 살린 남작의 등장에 의문을 가졌을 수 있다. 그러나 알베르트는 아무런 의문을 표하지 않고, 조용히 동물원 구경을 마쳤다.
우리 아이들의 즐거운 관광을 위해서. 아이들의 웃음을 위해서.
‘배려를 해줬으니 보답을 줘야지.’
그래서 그럭저럭 친해진 황태녀와 페디, 앙리에타를 위해 황제에게 슬쩍 동물원의 일을 흘렸다. 황태녀가 혼자만의 능력으로 친구를 사귄 것 같다고.
그거면 충분하다. 아마 황제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라비르제 후작에게 서신을 보내겠지. 후작의 손녀를 황태녀의 놀이 친구로 삼자는 서신을.
‘보람찬 관광이었다.’
서커스도 보고, 동물원도 보고, 맛집도 들르고, 공원 구경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황태녀도 분명 오늘 관광을 기뻐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