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91)
로판 속 공무원 791화(792/945)
린은 나름 문무겸비이자 귀족 영애의 교양까지 갖춘 육각형 인재다.
요룬 가문의 일원이기에 기본 이상의 상재를 지니고 있고, 아카데미 재학 시절에는 꽃꽂이 동아리에 가입하여 예술 감각과 손재주를 익혔다. 심지어 반 대항전 때는 모든 학년, 모든 반의 대표들을 짓누르고 1위를 할 만큼 승마 실력도 갖췄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아카데미 1위의 승마 실력이다. 이 시대의 승마 실력은 단순히 운전 실력 같은 게 아닌, 말과 교감하고 진동을 감당할 수 있는 체력의 소유자여야 가능한 일이다. 나약한 자는 말에 올라탈 자격이 없다.
그렇기에 린은 여섯 부인 중에서도 체력이 괜찮은 편에 속한다. 마법으로 도핑을 하는 어느 사제 관계에게는 밀리지만, 아무튼 일반인과 비교하면 확실히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괜찮아?”
“저… 몸이 안 움직여요…”
물론 일반인보다 뛰어난 수준으로는 나를 이길 수 없지만.
사실 당연한 결과다. 철혈공의 피를 이은 마르, 마법으로 도핑 한 트릭시와 리제, 제국 내에서도 강자로 취급받는 피네, 나름 기사 수준의 무력을 갖춘 에리도 나와 붙으면 패배했다. 린이라고 다를 건 없다.
그래도 기절이 아닌 경직으로 끝난 게 어디인가. 그것만으로도 린은 충분히 칭찬받을 정신력을 과시한 거다.
“미안해. 너무 심했지? 조금 살살할 걸 그랬어.”
“그건 싫어요.”
작은 위로와 유감을 표시하자 린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저도 우리 알리나한테 동생 만들어주고 싶어요. 치사하게 마르 언니랑 리제만 가지고, 저만 없으면 좀 그렇잖아요.”
너무 굳건한 단호함이라 픽 웃음이 나왔다.
하긴. 그건 그렇다. 이미 세쌍둥이를 가진 트릭시는 논할 것도 없고, 나와 신혼여행을 다녀온 마르와 리제는 둘째를 가진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린이 무소유로 복귀하면 얼마나 서운하고 아쉬울까.
아니, 서운과 아쉬움으로만 끝나면 다행이다. 애석하게도 세상에는 유언비어를 좋아하는 고약한 인간들이 있기에, 린만 무소유로 오면 ‘감찰성 장관이 넷째 부인은 홀대하는 것 같다.’ 같은 미친 소리를 내뱉을 거다.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
“우리 알리나. 직속 동생이 생기면 엄청 좋아하겠어.”
“뭐예요 그거. 직속이라고 하니까 군대 같잖아요.”
쿡쿡 웃음을 흘리던 린은 그 웃음만으로도 몸에 충격이 왔는지, 흠칫 몸을 떨며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미안해. 매번 자제하자고 다짐하면서도 매번 이런 결과가 나오더라. 사랑이라는 건 이성으로 조절할 수 없는 모양이야.
하지만 끙끙거리는 린의 얼굴에서 미약한 행복을 보았기에 웃을 수 있었다. 육체의 고통보다 둘째가 찾아오는 것에 대한 기쁨이 더 크다는 거니까.
‘찾아오겠지?’
문득 이러고도 둘째가 생기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지만, 나는 나의 힘과 신들의 가호를 믿는다.
내가 마음을 먹으면 언제나 보물들이 찾아왔다. 종족 차이라는 두터운 벽을 가진 트릭시조차 세쌍둥이를 가졌잖아.
그러니 이번에도 성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의 열한 번째 아이가 찾아올 것이라고.
‘열한 번째라.’
이윽고 어마어마한 숫자에 입꼬리가 미친 듯이 씰룩거렸다.
기어코 FC 크라시우스 창설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첫 번째 결혼을 하고 5년도 지나지 않아 달성한 쾌거다.
이거 정말 가족끼리 자체적 축구 대결도 할 수 있겠어.
아무래도 일정을 조금 잘못 잡은 것 같다.
유벤에 머물러야 할 기간이 길어서 린과 오붓한 시간을 보낸 거였는데, 리조트에 박혀있는 동안 유벤이 시끌벅적해졌다.
‘계산을 잘못했어.’
창문을 통해 길거리의 인파를 내려다봤다. 타국 왕족의 결혼식은 처음이라 기본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왕족. 그것도 둘뿐인 왕자 중 하나의 결혼식이다. 아무리 신랑과 신부가 작고 조용한 결혼식을 원했어도 최소한의 규모와 권위는 갖추어야 한다. 그렇기에 각국에서 모인 축하 사절단의 규모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게다가 대륙 각지의 사절뿐만 아니라 유벤 내부의 귀족들과 백성들도 라테르의 결혼식을 축하하며 환호하고 있으니,
“돌아다니기 좀 힘들겠는데?”
“그러게요.”
마음 편히 관광을 하기에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시끄러운 분위기와 북적거리는 인파. 이런 상황에서 둘만의 신혼여행을 즐기는 건 난감한 일이다.
‘그나마 작게 해서 이거라니.’
만약 라테르가 강대국 왕자에 걸맞은 결혼을 추진했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많은 사절들이 몰려왔을 테고, 왕실이 민간에 뿌린 재화도 급격히 늘어났을 거다.
그렇다면 돌아다니기 힘든 수준이 아니라 이 리조트에 머무는 것도 힘들었을 거다. 우리가 오기 전부터 만석이었을 테니.
“네 방도 미리 잡아두길 잘했네.”
슬쩍 고개를 돌려 외투를 벗고 있는 에리히를 바라봤다.
각국의 사절들이 몰려오는 시기에 맞추어 에리히도 유벤에 입국했다. 지금보다 늦게 입국하면 인파에 이리저리 치이고, 온갖 귀족들의 주목을 받아 ‘난 개인 자격으로 왔다.’ 라는 핑계도 안 먹혔을 확률이 높다. 어그로를 잔뜩 끌었는데 공인이고 개인이고 무슨 상관이야.
“노숙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럴 일은 없겠어.”
아무튼 내 말에 에리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리히만 왔다면 노숙도 괜찮은 선택지겠지만, 안타깝게도 에리히는 혼자가 아닌 단체로 입국했다. 엄마가 된 제노비아와 임신 중인 세라.
“우- 우-”
아직 기어다니지도 못하는 우리 조카까지 넷이서.
“로베르트는 어머니나 우리 저택에 맡기고 오지 그랬냐. 아직 어린애가 타지에서 지내는 건 좀.”
“나도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 아빠도 엄마도 애를 두고 출장 가는 건 그렇잖아.”
애정 가득한 얼굴로 로베르트의 볼을 매만지는 에리히.
맞는 말이기는 하다. 내가 막 태어난 메리를 두고 제레노 왕국에 갔을 때, 그때는 친모인 피네라도 저택에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메리는 아빠를 보고 싶다며 펑펑 울었지.
그런데 둘 중 하나만 남는 게 아니라 전부 아이를 두고 떠난다? 아이가 느낄 외로움과 공포는 말할 것도 없다.
“라테르는 왜 지금 결혼을 해서 말이야. 넉넉하게 내년에 했으면 내가 우리 조카 돌봐줬을 텐데.”
“형 혼자 로베르트랑 놀 게 둘 바에는 데려오고 말지.”
진심 가득한 에리히의 말에 서운함을 느꼈다. 이 육아 전문가 삼촌의 성의를 무시하다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아, 맞다. 형.”
“왜.”
“형 작위 받았다며?”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어디서 들었냐?”
“형수들한테. 며칠 전에 저택으로 남작 인장이 하나 왔는데, 영지까지 딸린 계승작이라고 하더라. 영지는 크로이타 인근.”
그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 이 새끼. 나한테 직접 인장을 수여하면 회피 기동을 할까 봐 냅다 부인들한테 보낸 모양이다. 나한테는 황제의 작위가 족쇄로 작용할 수 있으나, 부인들에게는 황제의 하사품이자 포상이니까.
애초에 피할 생각도 없었지만 괘씸하다. 부인들이 작위와 영지를 인식하면 내가 거절하지 못할 걸 알고 수작을 부렸잖아.
“오, 오빠. 작위라뇨? 게다가 영지까지 있는 거예요?”
“…응. 그렇게 됐어.”
“대체 언─ 아.”
요 며칠 동안 나와 붙어 다닌 린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우리가 들소 가축화를 논의했을 때, 베히모스 근처 황실 직할령을 구매하려고 했을 때. 땅을 구입하려던 어느 귀족이 작위로 돌려받았다는 걸 눈치챘다.
“땅을 하사받은 건 알았지만, 기사 봉토 수준일 줄 알았는데…”
“황제 폐하의 은총이 내 예상보다 거대하더라고.”
마음 같아서는 은총이 아니라 짬처리라고 하고 싶지만, 차마 가족들 앞에서 황제를 향한 상시 혐오를 드러낼 수는 없다.
망할 새끼. 제국으로 귀국하면 바로 남작령 개발에 착수한다. 앞으로 크로이타라는 이름을 들으면 역사가 아니라 동물이 생각날 정도로.
“좋은 일이지. 자식들한테 물려줄 작위가 늘어난 거잖아? 난 오히려 부러운─”
“나 아직 비축 중인 레온 작위 많다.”
“작위가 많으면 어깨가 무겁지.”
작위 폭탄을 넘길 의향이 있다는 걸 넌지시 밝히자, 도발을 걸려던 에리히는 빠르게 물러났다.
감히 동생 따위가 형을 놀리려고 하다니. 아직 300년은 일러.
“뭐, 방은 바로 옆이니 필요한 일 있으면 바로 찾아오고. 결혼식 날까지 할 거 없으면 서부 초원으로 가봐. 사람은 별로 없는데 볼 거는 많더라.”
“서부 초원?”
“로베르트가 우리 애들 닮았으면 좋아할 거야.”
신기할 정도로 동물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좋아하던 아이들. 드래곤인 아텔리우스까지 반짝이는 눈으로 보던 아이들.
로베르트에게도 그 기묘한 본능이 있다면 사파리 구경을 좋아할 거다. 기린에 코끼리에 물소에 타조에 온갖 것들이 다 있으니까.
“우리 제수들도 먼 곳 오느라 고생 많았어. 마음 편히 놀고, 결혼식 직전에만 돌아오면 돼.”
“네, 아주버님. 배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로베르트를 품에 안은 채 고개를 숙인 제노비아.
“감사─”
“아, 가만히 있어. 조카가 힘들어하겠다.”
“아, 네.”
배가 제법 부풀어 인사를 하려면 제법 긴 시간이 걸리는 세라.
이렇게 보니 가족이 다 같이 여행을 오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아이들이 전부 10살을 넘으면 가족 여행이라도 할까?
‘진짜 언제가 될는지.’
과연 페디랑 우리 가족의 막내는 몇 살 차이일까.막내까지 10살을 넘으려면 몇 년이나 지나야 할까.
상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일이다.
***
결혼식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자 왕궁도 소란스러워졌다.
대륙 각국에서 온 사절단. 연합왕국의 군주들. 전국에서 상경한 귀족들. 소란이 생기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나마 이 정도라 다행이군.’
형님의 결혼식을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보다도 작고 조용하게 결혼식을 진행하고 싶으나, 왕족이라는 이름을 단 이상 불가능하다. 왕세자인 형님의 결혼식과 비교하면 명확히 작은 규모인 것에 감사해야지.
“오히려 작으면 작은 대로 뒷얘기가 나올 겁니다. 딱 이 정도 수준이 저와 저하께도 좋겠지요.”
며칠 후면 내 부인이 될 레이첼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저하.”
“무슨 일이지?”
왕궁 내 후원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왕실 시종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제국 감찰성 장관, 타일글레헨 백작이 저하를 뵙기를 청하나이다.”
“감찰성 장관이?”
“예, 저하.”
그리고 의외이고도 반가운 손님이라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래도 다른 손님들이 몰리기 전, 인사라도 하기 위해 먼저 접견을 청한 것 같다.
‘조금 바쁘기는 하지만.’
솔직히 결혼식이 코앞이라 여유가 있지는 않으나, 다른 사람도 아닌 아카데미의 인연이 만남을 청했다. 그것도 우리를 관리하느라 고생했을 사람이.
그렇다면 바빠도 만나는 것이 도리다. 아무리 바빠도 사람은 도리를 지켜야 하는 법이니까.
“제 두 번째 부인이 저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내 손에 들린 종이 더미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도리를 지키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