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92)
로판 속 공무원 792화(793/945)
트릭시가 준비한 선물은 결혼식 당일보다 이르게 건네주었다.
처음에는 당일에 줄 생각이었지만, 결혼식은 신랑과 신부에게 있어 가장 행복하고도 정신없는 순간이지 않나. 그럴 때 선물을 줘봤자 눈에 제대로 들어올 리가 없지. 그 가치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결혼식의 열기가 식은 이후겠고.
유벤 연합왕국의 핵심 인사들이 전부 자기 영지나 집무실로 복귀했을 때, 각국의 사절단들이 귀국했을 때. 그제야 내가 준 선물이 라테르 눈에 들어올 테니, 둘째 장인어른의 위업을 가장 확실히 홍보할 타이밍을 놓치는 거다.
물론 사파리 강─ 아니, 마도강국으로 이름 높은 유벤이니 정신없는 와중에도 트릭시가 마련한 선물에 감동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문제다.
‘적어도 결혼식만큼은 부부가 주인공이어야 돼.’
아무리 트릭시의 선물이라도 선물이 주인공들보다 주목을 받는 건 곤란하다. 결혼 당사자들이 골수 마법사라 선물에 기뻐해도, 정작 선물을 전달할 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서 미리 건네주었다. 이렇게 되면 트릭시의 선물이 여러 선물 중 하나로 전락할 일도, 바쁜 신혼부부의 관심에서 밀려날 일도, 부부 대신 결혼식의 슈퍼스타로 등극할 일도, 사태가 끝난 뒤에 주목을 받을 일도 없다.
“이, 건…”
“제 둘째 부인과 장인어른의 손길이 닿은 자료입니다. 저하시라면 이 물건의 가치를 잘 아실 터이니, 믿고 선물할 수 있다 하더군요.”
그리고 조금 일찍 주면 뭐 어떤가. 선물의 가치가 절대적이라면 증여 시기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어느새 눈가와 손을 덜덜 떨고 있는 라테르가 그 증거다.
“부디 이 선물이 저하와 왕자비께 기쁨을 주었으면 합니다.”
내 말에 미친 듯이 진동하던 라테르의 손이 우뚝 멈췄다.
“너무도 과분한 선물입니다.”
그러고는 아까보다 진중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미약한 떨림이 담겨있으나, 그만큼 충격이 크다는 거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존대라.’
그보다 라테르에게 받는 존대에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제 졸업하여 남남이 된 상태니 일개 귀족에게는 하대를 해도 무방한데.
이게 아카데미 시절의 정 때문일까, 아니면 마종공의 부군을 향한 예우일까. 둘 다일 수도 있지만 괜히 궁금해진다.
“마종공께서 만드신 논문으로도 감사할 따름인데, 작고하신 탐명공의 유산까지 받는 건 후배의 도리가 아닙니다.”
물론 지금은 내 사소한 궁금증보다 라테르의 사양을 돌파하는 게 우선이지만.
“염려치 마십시오. 그것들은 사본이고, 원본은 제 부인이 보관 중입니다. 저하께서 사양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본이라고 그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나마 논문까지는 미리 보는 것이라 여길 수 있으나, 연구 자료나 학창 시절의 과제는 별개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한 라테르는 종이 더미를 내 쪽으로 조심스레 밀었다.
“위대한 선배의 배려로도 충분히 감격했습니다. 마음만 받─”
“저하께서 사양하신다면 결혼식 때 정식으로 바치겠습니다.”
라테르의 눈가가 아까와 다른 의미로 떨리기 시작했다.
“저하와 왕자비 저하께 공개적으로. 모든 하객들이 모는 앞에서 마종공과 탐명공의 작품을 바치겠습니다.”
더욱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건 허세다. 하객들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하여 미리 선물을 주려는 건데, 선물을 주겠다고 어그로를 끄는 건 본말전도잖아.
하지만 라테르는 내 생각을 모른다. 내가 정말로 결혼식 때 공개적으로 선물을 줄 수 있다고, 모두에게 과시하며 어마어마한 보물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할 거다.
‘그건 피하고 싶겠지.’
안 그래도 조용한 결혼식을 원하던 라테르다. 그런데 제국에서 온 실권자가 마종공과 탐명공의 작품을 공개적으로 바친다? 조용이라는 단어와는 작별 인사를 나누어야 한다. 그 순간부터 결혼식의 주인공이 아닌 유벤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그렇기에 라테르에게 강요했다. 부담감을 거두고 평온을 택할지, 평온을 희생해서 계속 사양할지.
“…유벤의 모든 마법사들을 대표하여 위대한 선배들께 감사를 표합니다.”
“부인도 분명 기뻐할 겁니다. 반드시 저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장관께도 감사, 하고요.”
“별말씀을.”
책상에 놓인 종이 더미를 다시 라테르 쪽으로 밀자, 라테르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기이하군요.”
“무엇이 말입니까?”
“분명 장관은 존대를 쓰고 있는데, 어째 아카데미 때보다 저를 편하게 대하는 것 같습니다.”
의외의 말인지라 잠시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아카데미 때는 동아리 고문이라는 직책 때문에 황족, 왕족, 차기 성자에게 말을 놓고 다녔다. 선생이 학생에게 존대를 하는 건 아카데미 정서상 옳지 않으니까.
허나 고문 시절의 나는 제국 영토에서 사건이 터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 제국까지 기어 들어온 타국 놈들에 대한 원망, 77년도 시즌의 강렬했던 추억 등이 얽혀 제정신이 아니었다. 동아리 부원들과 나름 정을 쌓더라도 시한폭탄 보는 기분인 건 어쩔 수 없었지. 덕분에 편하게 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제는 아무 관계가 아니라 그런가?’
아카데미를 졸업하며 고문과 부원이라는 관계가 사라지고, 부원들이 각자의 조국으로 돌아가면서 시한폭탄은 제거되었다. 더 이상 제국에서 일이 터지지는 않을까 고민할 필요도, 부원들의 돌발 행동을 감시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군. 이건 더 이상 책임자가 아니라 막 대할 수 있는 거구나. 조국에 있는 녀석들이 사고를 쳐봤자 나하고는 아무 연관이 없잖아. 뒤늦게 폭탄이 터져도 느그 나라에서 터지는 거니 마음이 편해진 거지.
“아무래도 부인이 마종공이라 용기가 상승한 모양입니다.”
“그렇습니까?”
내 농담에 라테르는 픽 웃음을 흘렸다.나 또한 그런 라테르를 보며 마주 웃었다.
아카데미 때도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지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정신 건강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줬을 텐데.
***
적당히 서늘한 바람이 몸을 감쌌다. 긴장감으로 달아오른 몸이 바람의 다독임 덕에 진정되었다.
참으로 특이한 일이지. 결혼이라고 해봤자 그저 의례적인 절차에 불과하다. 이미 부부처럼 지내던 나와 레이첼이니, 결혼식을 기점으로 획기적인 변화가 생기지는 않는다. 결혼식이 끝나도 이전과 동일하게 지낼 예정이니까.
그럼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머리는 보여주기 위한 행사라고 외치지만, 마음은 머리와 달리 거칠게 요동치고 기뻐했다.
‘특이한 일이야.’
레이첼과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왔다. 레이첼이 나를 따라 아카데미에 입학을 한지라 학창 시절도 함께 보냈다.
나의 오랜 친구. 아카데미의 인연을 제외하면 나의 유일한 이성 친구. 이 유벤에서 가족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존재.
이미 나와 레이첼의 관계는 굳건하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레이첼을 향한 호감이 강렬해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틀렸다. 친우에서 결혼이 예정된 관계가 되니, 점차 결혼식이 가까워지니, 결혼식 당일이 되니 레이첼을 향한 마음은 거세졌다.
‘너도 이런 마음일까.’
내 옆에 있던 레이첼을 바라보자, 레이첼은 미세하게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마법사로서 언제나 이성적인 모습을 보이는 레이첼이다. 그런 레이첼이 저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우리의 관계가 친우보다 더 나아갔을 때부터였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린 시절부터 친우였던 관계가 사랑으로 이어지면 이리도 부드럽고 따뜻하구나.
‘그럼 저 녀석은 대체.’
이윽고 하객석에 앉아있던 에리히를 힐끗 바라봤다.
저 녀석은 어린 시절의 친우가 둘이나 있었다. 심지어 그 친우들은 제3자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애정을 보였지.
그럼에도 에리히는 애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토록 부드럽고 따뜻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어.
‘혹시 어렸을 때 머리를 다치기라도 한 건가?’
그래서 감정에 둔해진 거라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고도 나보다 먼저 결혼하다니.’
나와 눈이 마주쳐서 가볍게 손을 흔드는 에리히. 그런 에리히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에리히를 보니 미세하게 남아있던 긴장감마저 가라앉았다.
‘나도 좋은 남편이 될 수 있겠지.’
아니, 사실 이유는 알고 있다. 먼저 결혼한 에리히가 훌륭한 남편이 되었고, 멀쩡한 아비가 되었기에 안심이 되는 것이다.
저 둔치도 결혼을 하고 나니 가정에 충실하니까. 저런 놈도 무사히 아이를 가지게 되었으니까. 나라고 에리히보다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하여간여러 의미로 나에게 위안을 주는 친구다. 아카데미에서 사귄 친구 중 최고의 친구야.
“레이첼.”
“네, 저─”
“앞으로 실수로라도 저하라고 부르면 많이 서운할 것 같군.”
내가 먼저 선수를 치자 레이첼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나와 레이첼은 실질적을 넘어 공식적으로도 부부다. 다른 나라 왕족들은 부부 사이에서도 호칭에 철저할 수 있으나, 나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
앞으로 레이첼 입에서 나와야 할 단어는 저하가 아닌 라테르다. 오직 그것뿐이다.
서늘한 늦가을의 바람과 에리히의 존재 덕분에 무사히 결혼식을 마칠 수 있었다.
“결혼 축하한다. 네가 딱 중간이네.”
그리고 살며시 다가온 에리히는 미소를 머금으며 축하를 건네줬다.
중간이라. 그러고 보니 내가 류티스, 타니안보다는 빠르게 결혼한 거였나?
‘다행이다.’
류티스보다 결혼이 늦었다면 자괴감이 상당했을 것 같다.
“네 덕분에 마음 편히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음? 내 덕분에?”
아무튼 에리히의 축하 인사에 감사로 답하자 에리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게 있으니 그냥 그렇다고 생각하면 된다.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우- 우-”
“기특하게 용케 울지도 않았군.”
에리히의 옆에 있던 두 부인과도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에리히 품에 있던 아기를 바라봤다.
이름이 로베르트 히덴이라고 했던가. 에리히와 호르펠트 백작 사이에서 태어난 차기 호르펠트 백작.
“엄마를 닮아서 진중하고 똑똑해서 그래.”
“태어난 지 1년도 안 됐을 텐데 그 무슨.”
“진중하고 똑똑해서 그래.”
“…음, 그런 것 같긴 하군.”
단호한 에리히의 모습에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비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