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93)
로판 속 공무원 793화(794/945)
라테르의 결혼식은 만인의 축복 속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덕분에 마음으로 조금 울고 말았다. 내가 저 녀석의 77년도 시즌을 익히 아는데, 그 흉악했던 놈이 어느덧 제 짝을 찾아 결혼까지 했다. 왕족치고는 약간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결혼 적령기에 결혼했다고 주장할 수준은 된다.
실로 감동적인 일이다. 에리히와 아인테르에 이어 라테르까지 결혼하다니. 심지어 다음 달에는 타니안, 내년에는 류티스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다.
‘자식을 결혼시키면 대충 이런 기분일까.’
당연하지만 난 저런 자식들을 원치 않는다. 내 진짜 자식들은 저 흉측하고 괴랄한 것들과 달리 순수하고 착한 아이들이다.
그래도 한때 연이 있던 것들이, 3년 내내 걱정하고 돌봤던 것들이 가정을 꾸렸다. 내 아이들이 결혼하게 된다면 이 감정보다 수백, 수천 배는 더 기쁘겠지.
‘잘 살아라.’
동아리 부원 중 가장 못났던 에리히는 어느새 자식을 봤다. 결혼 전에는 끔찍한 둔치를 자랑하던 놈이 결혼 후에는 멀쩡한 사람이 됐다.
그러니 라테르 너도 제대로 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유벤의 왕족으로서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지인이 불행하게 살면 그보다 씁쓸한 일은 없으니.
“린. 우리는 돌아가자.”
“어? 벌써요?”
“원래 주인공이 바쁠 때는 슬쩍 돌아가는 게 예의야.”
하객들과 악수를 나누는 라테르를 보다가 린과 함께 몸을 돌렸다.
트릭시가 마련한 선물은 며칠 전에 건네주었고, 결혼식 직전에 인사도 나누었다. 또한 이 자리에는 아카데미 친구인 에리히가 있으니, 나랑 린 정도는 리조트로 돌아가도 문제없다.
하지만 당장 귀국하는 건 무리다. 아직 유벤의 물소와 들소 수입 문제를 결론짓지 못했으니까.
‘한 사흘 정도 후에 만나면 되겠지?’
사흘 정도는 신혼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고, 그 뒤에 라테르와 접촉해서 짐승 수입에 대해 넌지시 물어보자. 트릭시와 둘째 장인어른의 작품을 받았으니 거절하지는 않을 거다.
물론 유벤도 갑작스러운 짐승 수입에 의문을 가지기는 할 거다. 그 의문은 제국에 상주 중인 베히모스에게 닿아, 제국이 물소 사육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을 터. 자신들의 전략 물자 독점이 무너질 거라는 결론에도 도달하겠지.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일까. 마도강국인 유벤에게, 방계도 아닌 직계 왕족에게 결혼 선물로 마종공과 탐명공의 작품을 넘겼다. 그것도 제국의 실권자이자 차기 황제의 대부가 개인 자격으로 와서.
아무리 국제 관계가 냉혹하다지만 이렇게 받아먹고 입을 닦는 건 도리어 유벤에게 악재가 된다. ‘저 새끼는 저렇게 처먹고도 모른 척을 해?’ 라는 인식이 대륙에 퍼지면 누가 유벤하고 거래를 하겠어.
“오, 타일글레헨 백작.”
‘음?’
그렇게 자연스레 식장을 벗어나려던 찰나,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킬라나스 공작 각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확실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하얗게 세어가는 청발과 쇄골까지 자란 수염이 인상적인 노인.유벤 정계와 마법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원로이자 유벤 국왕의 정치적 파트너.
유벤 연합왕국 마도의회 의장 킬라나스 공작. 과거 동아리 박람회 덕분에 잠시 인사를 나누었던 인연을 다시 보게 되었다.
“유벤에서 그리운 얼굴을 볼 줄은 몰랐군. 그간 잘 지내셨소?”
“신들의 가호가 있었는지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거 기쁜 소식이구려.”
내 대답에 입꼬리를 올린 킬라나스 공작은 린과도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더니, 나에게 다가와 작게 입을 열었다.
“사실 백작의 선물에 감사를 표하고자 잠시 백작의 걸음을 붙잡았소. 본래 국왕 전하께옵서 직접 말씀하실 예정이었으나, 라테르 저하께서 만류하시더군. 늦게나마 신혼여행을 온 부부를 귀찮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면서 말이오.”
“…신혼부부의 마음을 알아주는 건 같은 신혼뿐이군요.”
“허허, 그런 것 같소. 덕분에 국왕 전하께서 어찌나 민망해하시던지.”
껄껄 웃음을 흘리는 킬라나스 공작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이거 까딱 잘못했으면 유벤 국왕과 소개팅을 할 뻔했어.
고맙다, 라테르. 네가 짝을 찾더니 사람이 되기는 했구나.
“해서, 감히 전하 대신이라고 하기는 부끄러우나 이 늙은이가 백작에게 찾아오게 되었소. 혹 실례가 된 건 아닐는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타지에서 과거의 연을 뵙게 되어 기쁠 따름입니다.”
이건 진심이다. 내가 킬라나스 공작과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몇 년 만에 본 사람에게 반가움 정도는 가질 법하지.
게다가 킬라나스 공작은 트릭시에게 국경을 초월한 존중과 경외를 보였다. 나도 트릭시의 남편으로서 공작의 작위와 연배를 존중해야 하지 않겠나.
“과거의 연이라. 짧은 만남을 그렇게 각별히 여겨줄 줄은 몰랐소.”
“짧음이 이어져 긴 것이 되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킬라나스 공작은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짧음이 이어져 긴 것이 된다라. 맞는 말이오. 이거 백작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다시 선물을 받았군.”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적당히 내뱉은 말에 선물이라니.
허나 킬라나스 공작은 내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작은 패를 하나 건네주었다.
“받으시오, 백작. 늙은이가 풋풋한 젊은 부부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오.”
“이건…?”
“마도의회 입장 권한을 증명하는 물건이지. 간단히 관광지 입장표라 생각해도 무방할 거요.”
너무 덤덤하게 말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아니, 그게 무슨 미친 발언이야. 마도의회는 유벤 귀족들한테도 쉽게 개방하는 곳이 아닌데, 그런 장소를 관광지처럼 말하는 게 어디 있냐고.
‘1급 기밀 시설을.’
마도의회는 마도강국이라 불리는 유벤의 마탑이요, 연합 체제를 이루는 이 독특한 국가의 심장이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논의가 유벤의 이정표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오죽하면 유벤의 왕은 다섯이 아니라 여섯이라는 말이 있겠나. 연합을 이루는 각국의 왕들과 마도의회 의장까지 여섯 명.
“과분한 선물입니다.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백작이 라테르 저하께 준 선물은 저하 개인의 홍복이 아니라, 우리 유벤 마법계 전체의 홍복이오. 그 기쁨의 사절을 아무 대접도 하지 않고 보내는 건 우리가 용납할 수 없소.”
진심 가득한 목소리에 조금 난감해졌다. 비겁하게 마법계 전체의 총의를 물고 오면 거절할 수가 없잖아.
이걸 단호하게 거절하면 유벤 마법사들의 호의를 거절하는 꼴이고, 더 나아가 마종공의 부군이 유벤과 거리를 두게 되는 꼴이다. 과한 해석이지만 본래 소문이라는 건 진실과 다르게 퍼지는 경우가 잦으니까.
“그리고 물소가 나름 전략 물자라서 말이오. 수출하려면 결국 마도의회의 동의도 있어야 하는지라, 처음부터 우리와 협의하는 게 편할 거요.”
‘아.’
결정적으로 킬라나스 공작의 꼬드김이 너무 강력했다.
사흘이 지났다지만 신혼인 지인에게 찾아가 일 얘기하기, 처음부터 실권자들과 이야기해서 결론짓기. 이건 당연히 후자를 택해야 하잖아.
물소 수입을 노리는 걸 어떻게 알았지─ 같은 의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놓고 유벤 서부 초원을 돌아다니며 소들을 구경했는데 모르는 그게 더 이상한 일.
‘어쩔 수 없지.’
짧은 고민 끝에 패를 품 속에 넣었다.
그래, 유벤에 와서 마도의회를 구경하는 것만큼 확실한 추억이 어디 있을까. 킬라나스 공작에게 양심이 있다면 일반인이 봐도 신기한 것들 위주로 구경시켜주겠지.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찾아가겠습니다.”
“이런. 오늘부터 귀빈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구려.”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는 공작을 보니 괜히 밉다.
마도의회는 높은 곳에서 굽어살피는 건축물이 아닌, 드넓음으로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건축물이었다.
하늘에 닿을 정도로 치솟은 마탑과 달리 최고층이 5층에 불과한 건물. 물론 5층도 낮은 편은 아니나, 일국의 상징이라는 걸 감안하면 은근 평범한 높이다.
“엄청 넓네요…”
“그러게…”
다만 높이 대신 선택한 넓이가 어마어마했다. 낮은 층수 따위는 넓이로 커버하겠다는 듯이. 어차피 방만 많이 만들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듯이.
어떻게 보면 이게 더 무섭다. 일국의 수도에서 단일 건축물 주제에 엄청난 넓이의 땅을 처먹은 거잖아. 권세 높은 대귀족의 저택도 이런 넓이면 다른 귀족들에게 집중포화를 당하고, 왕에게 쪼인트를 까일 일이다.
그러나 마도의회는 그걸 해냈다. 마법의 중심이자 체제의 상징이기에 왕궁 다음가는 면적을 잡아먹었다.
‘관광지로는 좋긴 하네.’
새삼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일국의 1급 기밀 시설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관광지로도 괜찮은 곳이구나.
1급 기밀 시설만 아니었다면.
‘이게 맞나.’
뒤늦게 위화감이 들었다. 킬라나스 공작이 마법계를 들먹이며 부탁하기도 했고, 대규모 동물 수입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방문이기는 하다. 그래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언가 잘못된 방문이라는 인식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여기까지 온 것을. 이 사태를 뒤엎으려면 ‘미안. 트릭시가 불러서.’ 같은 치졸한 핑계를 댈 수밖에 없다.
“이왕 온 김에 제대로 구경하고 돌아가자. 평생 하지 못할 구경인 건 맞으니까.”
“아, 네.”
내 말에 멍하니 마도의회를 바라보던 린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내 신혼여행도 참 기이하다. 마르와의 여행 때는 제레노의 공주가 찾아왔고, 트릭시와의 여행 때는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리제와의 여행 때는 작가 둘과 협업하게 됐다. 가는 곳마다 독특한 사건이 터지더니 린과 올 때도 변함이 없었다.
이제는 남은 두 번의 여행이 기대될 정도다. 과연 그때는 무슨 일이 생길까.
[ 다섯의 별이 하나 되어 온 대륙을 진리로 이끌지어다. ]“오.”
그리고 마도의회 정문에 적힌 문구를 보며 작게 탄성을 흘렸다.
저게 유벤 연합왕국 초대 수뇌부가 피로 썼다는 그거구나.
***
“부군 각하와 그 부인께서! 정문으로 접근 중!”
의회 경비 역할을 맡은 마법사의 외침에 대회의실이 고요해졌다.
“의장 각하.”
“음.”
내 옆에 있던 부의장의 부름에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기립. 귀빈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그리고 대회의실에 모여 있던 의원들을 이끌고 정문으로 향했다.
타일글레헨 백작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정문 밖에서 맞이하는 건 피했다.허나 대회의실에 앉아서 맞이하는 건 초대한 자의 도리가 아니다. 적어도 의회 내에서는, 모두가 서서 맞이해야지.
타일글레헨 백작은 탐명공의 사위이자 마종공의 남편이고, 훗날 대륙 마법계를 이끌어 갈 카토반 공작가 공녀들의 아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