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95)
로판 속 공무원 795화(796/945)
내가 근육이 불타는 듯한 고통은 자주 느껴봤으나, 전두엽이 지져지는 듯한 고통은 처음이다.
나는 수학과 과학이 두려워 이과는 쳐다보지도 않은 성골 문과생이다. 국어나 역사에 목숨을 걸었던 문돌이 인생을 살아왔다. 21세기 국가가 아닌 고대 그리스나 로마로 가야 겨우 취업 가능성이 존재하는 가련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한테 뭐? 삼원색이니 대기 중 수분이니 밀려난 지각이니─ 듣기만 해도 흉흉한 난제를 물어봐? 그러고도 너희가 사람이냐.
‘난 마종공 남편이지, 마종공이 아니라고.’
차라리 리제를 이 자리에 앉혔다면 그럭저럭 좋은 대답이 나왔을 수 있다. 리제는 트릭시의 유일무이한 제자. 우리 세쌍둥이를 제외하면 마종의 유일한 후계자나 다름없으니까.
반면 나는 유일한 남편이지만, 딱히 마법에 대한 지식이 없다. 그저 마법사들의 텔레포트를 감사히 이용하는 기생충에 불과하지.
“천상은 대륙과 구분해야 하는 별개의 존재입니다. 제가 알기로 정령계조차 이 대륙의 법칙과 다른 모습을 보이니, 천상도 비슷하겠지요. 대륙의 마법으로 다른 세계의 존재를 구현하는 건 다소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지는 드넓습니다. 그리고 바다는 대지보다 넓지요. 바다가 세상을 감싸고 있는데 고작 인간의 마법으로 무한한 바다를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바다의 수분이 하늘로 올라 비로 떨어지고, 그 비는 대기에 머무릅니다. 아무리 마법을 난사해도 대기 중의 수분은 동요조차 안 하겠지요.”
“대지가 갈라지는 건 인간으로 치면 피부에 생채기가 난 수준입니다. 생채기가 났다고 인간의 몸이 갈라지겠습니까?”
허나 질문을 받았음에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건 곤란한 일.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내고, 철저한 근거보다는 ‘전 이럴 것 같은데요?’ 같은 감평 위주로 말했다. 어쭙잖은 전문가 행세보다는 철저한 민간인 방청객 역할을 수행했다.
어차피 의원들도 진지하거나 획기적인 대답을 바라고 물어본 건 아닐 거다. 그저 귀빈을 앉혀두고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게 민망해서, 마종공의 남편에게 ‘과연 그렇군요!’라는 리액션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의상 물어보는 거겠지.
그 예의상만으로도 내 멘탈은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과연. 마법사가 아닌 비마법사의 시선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편견에 잡히지 않은 자만이 가능한 대답이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부의장 중 한 명의 덕담에 그저 웃음으로 돌려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비마법사를 마법사들 토론장에 두는 것이 옳은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비마법사를 토론장에 앉히는 것부터가 이 골수 마법사들 입장에서는 극상의 예우일 수 있으니.
‘아.’
씁쓸한 심정으로 슬쩍 고개를 돌리니, 내 옆에 있던 린은 웃는 얼굴로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럽다. 나도 잠시 정신을 놓은 채 도망치고 싶어.
***
의원들의 1차 토론이 끝났다.토론 전체가 끝난 것이 아니라 고작 1차가 끝났다.
그리고 1차 토론이 끝난 뒤, 나와 오빠는 킬라나스 공작이 직접 안내해 준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괜히 마도라는 이름이 붙은 게 아니었네.”
방문을 닫자마자 소파에 풀썩 주저앉는 오빠. 마치 우리 아이들과 8시간 내내 놀아준 후, 홀로 구석에 앉아있을 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오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어색히 미소만 지었다. 의회에 ‘마도’라는 단어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라는 듯, 의원들의 마법 토론은 너무 열정적이었다. 의회가 아니라 아카데미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아니, 아카데미조차 이 정도는 아닐 거다. 아카데미는 젊은 학생들이 배움을 위해 다니는 곳이지만, 이 마도의회는 아카데미를 수십 년 전에 졸업한 노련한 마법사들이 머무는 곳이잖아.
“조금 피곤하기는 해도 의원들 나름의 호의일 거예요. 자존심 강한 마법사들이 마법사가 아닌 저랑 오빠를 같은 자리에 앉힌 거잖아요? 심지어 의견도 묻고 있고요.”
“그건 그렇지…”
그럼에도 나와 오빠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건, 이 기괴한 토론이 마법사들의 호의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여 자존심이 강하고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내가 마법사들을 자주 만난 것은 아니나, 마법의 정점인 트릭시 언니가 말해주는 일화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언니는 마탑주로서 온갖 마법사들을 보고 다니잖아. 그 일화 중 10%만 진실이어도… 마법사들은 일반인이 아니야…
그런 의미에서 리제랑 트릭시 언니가 정상적인 건 다행인 일이다. 진심으로.
“그런데 오빠.”
“응?”
“아까 어떤 의원이 읽고 있던 자료를 봤는데, 2차 토론 때는 소리가 내는 진동의 위력과 중력으로 인한 빛의 굴절에 대해 논한대요.”
“아.”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겠어요?”
그 말에 오빠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봤다.
“5층 정도니 그냥 뛰어내릴까? 급한 일이 생겨서 돌아간다고 하면 될 것 같은데.”
정신적으로 상당히 몰린 듯한 말과 함께.
안타깝다. 아카데미 입학 대신 관료의 길을 택해 일반적인 교육 과정도 밟지 못한 오빠다. 그런 오빠에게 저런 전문적이고 복잡한 토론 주제를 들이밀다니. 이 얼마나 가혹한 일일까.
심지어 저 주제들은 전부 트릭시 언니와 언니의 부친께서 다룬 주제잖아. 마법의 거두들이 택한 주제를 어떻게 오빠가 감당하겠어. 오빠가 검사가 아닌 마법사였어도 입을 열기 어려운 주제들이다.
‘안 되겠어.’
점점 몸이 기울어지는 오빠를 보다가 품속에 있던 통신구를 꺼냈다.
“오빠. 이왕이면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게 좋겠죠?”
“그렇, 지. 초대받은 손님이 도중에 나가면 좀 그렇잖아.”
“그럼 딱 자리만 지켜요.”
오빠의 대답을 듣자마자 통신구를 작동했다.
자리를 지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 진짜 문제는 비전문가인 우리에게 전문가 수준의 지식이 필요한 질문이 날아오는 것.
그렇다면 그 질문만 차단하면 된다. 그러면 자리 정도야 얼마든지 지킬 수 있어.
마도의회 의원들이 우리를 극진히 대접하는 건 오빠가 제국의 실세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트릭시 언니의 가족이라서 그렇다.
그러면 트릭시 언니의 가족이라는 입지를 활용하면 된다. 우리가 쥔 최강의 카드로 위기를 극복하면 된다.
– 다들 잘 들리니?
“예, 각하! 구석구석까지 확실하게 들립니다!”
– 대답은 작게 해도 된단다.
“예, 각하.”
의원들의 토론 장소에 트릭시 언니를 투입하는 것.이것이야말로 가족인 우리만이 쓸 수 있는 최고, 최강의 카드다.
‘됐어.’
100이 넘는 인원들이 작은 통신구를 바라보는 광경. 통신구를 통한 소통이라 몸 전체가 보이는 것도 아닐 텐데, 모두 경건한 자세로 고쳐 앉는 광경.
역시 이게 맞았다. 트릭시 언니에게 부탁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운 방향이야.
– 내가 보낸 논문에 대해 열의를 가지며 토론 중이라고 들었단다. 작고하신 아버지께서도 기뻐하실 거야.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분께서는 이 부족한 후배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나아갈 길을 가리키신 것이니, 오히려 저희가 기뻐하며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 후후, 듣기 좋은 말이구나.
언니가 웃음을 보일수록 영광이라는 듯 눈을 반짝이는 의원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1차 토론 때만 해도 서로를 향해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한 논쟁을 벌였는데, 단 한 사람의 존재로 인해 그 광기가 제압되었다. 이게 마종이라는 이름이 갖는 힘이구나.
‘진즉에 이럴걸.’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는데 고난을 짊어진 오빠가 안타까웠다.
동시에 고마웠다. 나도 생각한 방법을 오빠가 쓰지 않은 건 나를 향한 배려였으니까. 나와 신혼여행 도중에 다른 부인과 연락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분명 그런 이유일 거다. 오빠는 이상한 곳에서 둔한 모습을 보이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배려를 보이니까.
“린.”
“네, 오빠.”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저 민망함이 담긴 미소를 보니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오빠가 고민하던 방법을 내가 대신 실행해 줬으니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이 들겠지.
“고맙긴요. 저도 맨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어서 언니한테 떼를 쓴 거잖아요.”
그러니 지금은 내 덕이라고 으스대는 대신, 나도 힘들었다는 동질감을 내세우자.
오빠 성격은 내가 잘 알잖아. 정말로 고마우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더 잘해줄 거야. 괜히 생색을 내면 오빠의 부담감과 사명감이 커지고, 그 결과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로 돌아올 테니.
– 참. 내가 보낸 논문 외에도 궁금한 것이 있다면 이참에 물어보렴. 이렇게 느긋한 토론을 할 기회가 얼마나 있겠니.
그 와중에 언니의 파격적인 배려는 의원들의 열렬한 환호를 이끌어냈다.
***
마도의회 의원들은 마치 교황이 직접 진행하는 미사에 참석한 신도들처럼 경건했다. 동시에 아이돌 공연에 참석한 팬들처럼 열정적이었다.
경건과 열정을 같이 쓸 수 있는 표현인가 싶으나, 트릭시는 그걸 가능하게 했다. 트릭시는 마법계의 교황이자 슈퍼스타니까.
‘진즉에 이럴걸.’
1차 토론 때와 달리 나에게 시선도 안 주는 의원들을 보니 후련하면서도 씁쓸했다. 진즉에 이랬으면 아까 고생할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어쩌겠나. 린과 신혼여행 중에 다른 부인과 연락하는 건 너무한 일이고, 트릭시에게 내 일을 떠넘기는 것도 미안한 일이다. 남편이 해외에서 겪은 일을 본국의 아내에게 맡긴다? 너무 치졸하고 없어 보이잖아.
그런데 없어 보이는 걸 택한 대가로 몸과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전문적인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맞았다.
“백작 덕분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연달아 겪는구려.”
앞으로 마법 관련 일이 터지면 바로 트릭시에게 말하자고 다짐하던 중, 킬라나스 공작이 슬쩍 다가왔다.
“고맙소, 백작. 마법사로서 평생 잊지 못할 영광을 누렸소.”
“별말씀을. 저야말로 의장 각하와 의원들의 환대 덕에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내 말에 살포시 미소를 지은 킬라나스 공작은 서류를 하나 건네주었다.
“이건 우리의 작은 선물이오. 백작이 원하는 짐승을 원하는 만큼 가져가시오. 운송 절차와 비용은 전부 마도의회가 책임질 것이오.”
“원하는 만큼, 말입니까?”
“그렇소. 사실 백작이 귀국할 때 주려고 했는데, 이런 선물을 받고 어찌 입을 다물고 있겠소.”
생각보다 통이 큰 선물이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남이 주는 백지수표는 언제나 아름다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