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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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후로 대외 활동이 뜸한 가주가 추모 자리에 오는 건 의외지만, 그냥 제국의회에서 대표자로 가라고 하니 왔을 확률이 높다. 제국백에게 기본적으로 딸린 직함이 제국의회의 의원직이니까.
아무리 의원이라는 이름이 휘황찬란해도 본질은 공무원이다. 내가 행정 공무원이면 가주는 입법 공무원…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나. 애초에 타일글레헨 백작령에서 제도가 먼 거리도 아니니.
“어라, 벌써 오셨어요?”
“왔냐.”
추모 일정 시작까지 집무실에 멍하니 앉아 있으니 간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온 것은 손에 빵 하나를 쥐고 오물거리며 도착한 1과장. 아침은 챙겨 먹는 스타일이구나. 어쩐지 건강하더라.
“부장님 파견 중인 거 맞죠? 무슨 파견 기간 동안 세 번이나 봐요?”
“나도 세 번이나 널 볼 줄은 몰랐다.”
처음 아카데미로 팔려갈 때는 기일 때나 한 번 돌아올 줄 알았는데, 거짓말같이 박람회 때 1과장이 아카데미로 오고 마종공 사건 때는 내가 제도로 끌려왔다. 예정에 없던 일을 두 번이나 겪었다. 두 번이나 겪었다…
“드실래요?”
“됐어. 너 다 먹어라.”
“넹.”
손에 들고 있던 빵을 반 찢어서 주길래 사양했다. 부하 밥 뺏어 먹는 것 같아 느낌이 좀 그러네.
“오, 마침 배고팠는데.”
“어?”
그리고 2과장은 출근과 동시에 1과장의 손에 들린 반쪽을 강탈했다. 아침 인사치고는 화려하구나. 순식간에 빵을 자기 입에 쑤셔 넣은 2과장은 나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나한테 인사할 시간에 도망치는 게 좋을 텐데.
“당장 뱉어요!”
1과장의 넥슬라이스가 2과장의 울대를 후려쳤다.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5과장은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현명한 선택이다.
이번 추모 자리에는 작년과 달리 거물 인사도 여럿 참가했다. 관료를 대표하여 궁내성 장관, 군을 대표하여 전쟁성 장관과 전승공, 의회를 대표하여 타일글레헨 백작, 참전했던 나와 장관.
작년에는 나도 겨우 시간을 냈을 정도로 사이좋게 갈려나가던 시기였으니까 다른 인사들은 참가할 수가 없었지. 올해는 황제가 6검을 띄우기 시작했으니 그럭저럭 참가할 명분이 섰고.
“제국을 향한 충신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어찌 제국이 천명을 지녔음을 자처했겠는가.”
대토벌 전쟁 전사자를 위한 황제의 추도사를 대독하는 궁내성 장관의 목소리가 국립묘지에 울려 퍼졌다. 그대들의 희생으로 제국의 천명이 지켜졌다, 황제가 할 수 있는 칭찬 중에서는 최상위권에 랭크된 발언이다. 천명은 제국이 제국으로 군림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요소니까.
“고난을 끌어안은 영웅의 헌신은 디딤돌이 되어 제국이 미래로 나아가니, 그 이름은 영원토록 불멸할 것이다.”
‘불멸이라.’
작년에 조용히 넘어간 걸 올해 몰아서 하는지 발언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면 황제도 제국을 위해 죽은 자들을 향한 애틋함 정도는 가지고 있는 걸까? 하긴 황권을 위협하는 건 살아있는 신하지, 죽은 영웅이 아니다.
그렇게 궁내성 장관의 대독이 끝나자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묵념을 했고, 고개를 들자마자 서로 인사를 나누며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작년에 비하면 여유가 생겼다지만 아직 일이 많은 양반들이니.
“칼.”
일이 밀렸는지 급하게 돌아가는 전승공과 눈인사를 하고 슬슬 그 녀석들 묘비로 가려던 찰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보이는 흑발의 남성.
“가주님을 뵙습니다.”
의회를 대표하여 온 가주, 타일글레헨 백작. 국립묘지에 왔을 때 적당히 눈만 마주치고 지나가서 끝나고도 그냥 갈 줄 알았더니 먼저 말을 걸 줄은 몰랐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죄송합니다. 진작 찾아뵀어야 했는데.”
“탓하려는 게 아니니 신경 쓸 것 없다.”
사실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동안 가주를 보고 지낸 게 몇 년인데 성향 정도야 알고 있지. 오히려 억지로 시간을 내서 가주를 찾아갔으면 나랏일을 허술하게 한다고 잔소리를 들었을 거다.
실제로 그게 정답이었는지 가주는 별 다른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에 미세한 만족감이 깃든 모습. 나 닮은 모습으로 저러니 뭔가 기분이 묘하다. 내가 나이를 먹으면 딱 저 모습일 텐데.
“블로첸 백작.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저야 늘 그렇지요. 타일글레헨 백작도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리고 가주의 시선은 내 옆에 있던 장관에게 향했다. 둘도 나름 안면을 튼 사이라 그럭저럭 안부 인사를 나눌 수준은 되니까. 길게 대화할 정도로 친한 건 아니라 금방 대화가 끊겼다는 게 문제지만.
“에리히는 잘 지내느냐?”
잠시 말이 없던 가주는 다시 나에게 말을 건넸다. 와, 이 사람이 원래 아들 안부를 묻는 사람이었나?
“예, 건강합니다.”
“그렇군. 대신 전해주거라. 무인에게는 빨리 가는 것보다 멀리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알겠습니다.”
내 대답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이거 조금 놀라운데.
“무뚝뚝한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가주가 멀어지자 장관이 중얼거렸다. 빨리 가는 것보다 멀리 가는 것이 중요하다. 언뜻 들으면 무의 방향성을 지도하는 정도의 발언이지만, 실제로는 ‘서두르면 다치니 여유를 가져라.’ 라는 의미다. 자식 방임주의인 양반이 웬일이지.
“뭐, 나이를 먹으면 달라지는 법이지.”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장관에게 시선이 꽂혔다. 그러는 당신은 그렇게나 나이를 먹었으면서 왜 초지일관…
“더 늦기 전에 가자.”
“아, 예.”
마침 뒤쪽 라인에 서있던 간부들도 이쪽으로 왔다.
국립묘지 중 전사자 구역, 그 중에서도 대토벌 전쟁 구역, 마지막으로 감찰부 구역까지 가야 그 녀석들 묘비가 나온다.
“먼저 주고 오마.”
“예, 그러십쇼.”
6개의 묘비가 나란히 세워진 곳에 이르자 장관이 먼저 보야르 와인을 들고 앞에 나섰다. 그래, 연장자 술을 먼저 받는 게 맞지.
묘비 하나에 병 하나를 들이붓는 장관의 모습. 마음껏 마셔라, 구하기 힘든 귀한 물건이니 1년에 한 번밖에 못 줘.
“부장님.”
“그래.”
술을 다 뿌린 장관이 묘비를 몇 번 매만지고 등을 돌리자 차장이 들고 있던 상자를 건네줬다. 내가 가지고 있어도 되는데 앞줄에 있는 사람이 뭔가 들고 있으면 시선이 끌린다나. 차장 나름의 배려니 결국 지금까지 맡기고 있었다.
건네받은 상자를 들고 묘비 쪽으로 가자 장관이 어깨를 두드리고 스쳐 지나갔다. 이 양반도 오늘은 조금 감성적이게 됐네.
‘이거 줘도 되나.’
흠뻑 젖은 묘비를 보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안 그래도 독한 편인 보야르 와인인데 연달아 두 병이면 정말 취하지 않을까? 잠시 고민이 됐지만 그냥 그대로 붓기로 했다. 연중행사인데 까짓 취하는 게 대수냐.
우선 이 사태의 원흉인 주당 새끼부터.
제라드, 성력 1348 ~ 1375
‘넌 애초에 술 때문에라도 단명했을거다.’
첫 병을 까자마자 묘비에 적힌 글자 위에 바로 들이부었다. 다른 팀장 여섯의 주량을 합한 게 이 새끼 혼자 마시는 걸 못 따라잡았지. 그렇게 처마시는 놈이 창은 어찌나 잘 다루던지.
“오, 잘하는데? 300년만 더 수련하면 나 정도는 하겠어.”
“드디어 미친 건가.”
그래도 가르치는 건 영 소질이 없었다. 그 놈한테 배워서 이 정도로 큰 내가 대단한 거지.
올리버, 성력 1346 ~ 1375
반면 이 녀석은 어지간하면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 마시면 많이 마신 거였을 정도로.
“신을 모시는 사람이 쾌락에 몸을 맡기면 쓰나.”
그런데 어쩌냐, 너네 교단 차기 성자는 룰렛왕이던데. 그 꼴은 안 보고 에넨 곁으로 갔으니 나름 호상인가?
드레이크, 성력 1351 ~ 1375
얘는 술을 좋아하지만 정작 잘 마시지는 못하는 타입이었다. 그래도 마시면서 주량이 늘어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밌었지.
“양손에 검 한 자루씩 들면 두 배로 벨 수 있는 거 아니냐?”
“내가 이 새끼하고 같은 직급이라고?”
“야, 너 어디 가서 감찰부라고 하지 마.”
그 대가인지 갈수록 지능이 조금 이상해졌다는 게 문제지만. 그래놓고 정말 쌍검술을 터득해서 놀랍기는 했다.
발터, 성력 1350 ~ 1375
그래도 처음부터 지능이 의심스러운 놈에 비하면 드레이크는 양호한 거겠지. 이 놈은 진짜 여러 의미로 대단했으니까.
“…너 뭐하냐?”
“물 위 걷는 연습. 가라앉기 전에 다른 발을 내딛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럴 거면 허공을 걷는 게 낫지 않냐.”
“오.”
“오, 는 지랄. 당장 안 나와?”
그런데 마지막에는 진짜 물 위를 걷더라. 물론 발에 마나를 둘러서 한 편법이기는 한데, 아마 조금만 오래 살았으면 허공도 날았을 거다. 이세계판 라이트 형제 같은 새끼였는데.
이드리드, 성력 1349 ~ 1375
다섯 번째 병을 까며 이드리드의 묘비에 붓자 묘하게 마음이 평온했다. 어디서 이런 것들만 모았나 싶었던 4과 팀장 중에서 유일한 정상인이었지. 지금으로 치면 차장이나 5과장 포지션.
“전쟁 끝나면 이 개같은 감찰부 생활 때려치운다.”
정상인이라 제정신이 아닌 감찰부 탈주를 가장 먼저 꿈 꾼 선지자기도 했다. 감찰부 탈주가 그 녀석의 버킷리스트라 내가 대신 이루려고 했는데.
‘미안하다.’
아직도 못 이뤘다. 유일한 기회였던 군부 이적은 황태자 때문에 실패했고, 그 후로는 장관이 사표를 받을 생각을 안 하더라고. 다른 애들 소원은 얼추 이뤘는데 너는 앞으로도 힘들 것 같다.
그렇게 마지막 묘비까지 이르자 잠시 몸이 굳었다.
헤카테, 성력 1352 ~ 1375
그래도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병을 꺼내 조용히 묘비에 부었다.
괜히 마음 깊은 곳부터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쳤지만 애써 가라앉혔다. 그래도 정말 너무하지. 네가 떠나서 한 고생을 생각하면 한 번 정도는 제대로 따지고 싶은데.
‘왜 그랬냐.’
술에 젖은 헤카테의 묘비를 쓰다듬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국립묘지의 매장 구분은 철저하다. 전사자면 전사자끼리 병사자면 병사자끼리 매장한다. 헤카테는 전사가 아닌 자살이었기에 원래라면 이 자리에 같이 있지 못했다.
그걸 어떻게든 전사로 탈바꿈해서 이 녀석들하고 나란히 있게 했다.
‘왜 그랬어.’
내 손으로 네 사인을 적는 기분. 심지어 진짜가 아닌 거짓으로 조작한 사인을 적는 기분이 어땠을 것 같냐.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눈 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래봤자 전승공 정도였지만.
‘너무하지, 정말.’
사실 원망하기도 많이 했다. 다섯이나 먼저 떠난 건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았다. 너와 함께 그 녀석들이 원한 걸 대신 하고, 그 녀석들이 어떤 놈들이었는지 기억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가버리면 어쩌냐. 네가 죽은 걸 발견한 것도 나고, 수습한 것도 나였는데.
“미안해, 칼.”
미안할 짓을 왜 했냐. 네가 그런 선택을 한 것도 슬펐지만, 내가 네 버팀목이 되지 못해 떠났다는 생각에 더 마음 아팠다.
몇 번이나 묘비를 매만지다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보니 가관이네.
‘어떻게 아직도 내가 막내냐.’
나이를 처먹는 건 일곱 중 내가 유일한데 아직도 내가 막내다. 기가 막히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