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00)
로판 속 공무원 800화(801/945)
아무래도 에넨이 기도를 반송한 모양이다.
‘안 뜯기네.’
에넨의 발자국이 찍힌 땅을 공룡 발자국 화석처럼 소중하게 보관하려 했으나, 아무리 용을 써도 보관은커녕 손에 넣지도 못했다.
손으로 땅을 파려고 해도, 검으로 땅을 자르려고 해도 효과가 없었다. 심지어 하늘 베기를 발자국 옆을 향해 날렸음에도 미동조차 없었다.
마치 에넨이 온 힘을 다해 막는 것처럼. 제발 이 발자국을 가져가지 말아 달라고 하는 것처럼.
‘…이거 에넨이 막고 있는 거죠?’
– 응. 네 힘으로도 안 될 정도면 신이 막고 있는 거지. 어지간히 부끄러운 과거였나 보네.
영원한 푸른 하늘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흘렸지만, 졸지에 최고의 선물을 눈앞에서 놓친 나는 웃지 못했다.
통탄스럽다. 저 앞에 다이아몬드가 있는데.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최고의 보석이 있는데. 이 아름다운 보석을 두고 돌아가야 하나?
‘어쩌지 이거.’
진지하게 고민된다. 다른 존재도 아닌 에넨이 막고 있다면 나와 영원한 푸른 하늘의 힘으로는 절대 깰 수 없다.
만일 깬다고 해도 그 뒤가 문제다. 자신의 흑역사를 본 나를 물리적으로 쫓아내는 대신 필사적 방어로만 그쳤잖아. 에넨 입장에서는 천벌을 내려도 무방한 일임에도 최대한 자비로운 반응을 보인 거다.
그런 상황에서 자비를 무시하고 발자국을 뜯어간다? 종교 전쟁 시절의 불지옥맛 에넨을 맛볼 수도 있다.
‘포기하기는 아까운데.’
하지만 무려 신의 흔적이다. 그것도 신이 이 세상에 처음 발을 디딘 증거다. 예전 세계로 비유하면 예수가 태어난 마구간이 아직까지 보존되고 있는 수준이나 다름없지.
여명 교단에 슬쩍 찔러주기만 한다면 도리어 온갖 보물과 이권을 페이백 해주고도 남을 선물인데… 타니안의 지인으로서도 나름 생색낼 수 있는 선물인데…
“어쩔 수 없군요.”
결국 한숨을 내쉬며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 포기하게? 하긴, 에넨이 작정했으면 어쩔 수 없─
“이 자리에 신전을 세우겠습니다!”
– 어?
하늘을 바라보며 육성으로 외치자, 영원한 푸른 하늘은 다소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당신께서 이 대륙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이요, 모든 생명을 보듬고자 다짐한 곳입니다! 당신의 종들은 당신의 역사를 고귀하게 여기며 감격히 따를 것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더욱 우렁차게 외쳤다.
에넨이 작정했다면 영원한 푸른 하늘과 함께였어도 이 발자국에 도달조차 하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에넨은 이 발자국을 가져가는 걸 막을지언정, 내가 오는 걸 막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방향으로 타협할 여지가 있다. 발자국은 가져가지 않되, 이곳을 성지로 삼는다는 타협을.
“당신들의 종은 이 발자국을 보며 당신의 존재를 더욱 따르고 믿을 것입니다! 신의 한 걸음은 종들의 일생이요, 종들의 일생은 대륙을 바꿀 것입니다!”
– 와.
대충 생각나는 대로 내뱉자 잠시 침묵 상태였던 영원한 푸른 하늘은 나지막한 탄성을 흘렸다.
아마 선물에 눈이 멀었던 놈이 대륙 운운하는 게 놀라운 모양이지. 사실 내가 생각해도 추한 태세 전환이라 좀 민망하기는 하다.
그래도 추함을 감수하고 성지를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수치는 찰나지만 영광은 불멸일지니.
“그러니 이 발자국 위에 당신의 신전을 세우고, 당신의 종들이 기도를 올릴 수 있게 하겠습니다! 당신의 따스한 빛 아래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이 아닌, 당신의 길을 걷고자 하는 종들을 위하여!”
만인에게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들에게만 공개하겠다는 말. 적어도 에넨의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지킬 수 있는 제안이다.
실제로 에넨도 이 제안에 솔깃했는지,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꽃이 다소 잠잠해지는 게 느껴졌다.
– 이게 통한다고…?
통할 수밖에 없다. 사제들은 에넨을 부모이자 황제, 스승이자 주인처럼 따르는 존재들.
일반 신도들에게는 보여주기 부끄러운 모습도, 사제들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사제들은 자신이 뭘 해도 열렬히 추종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솔직히 일반 신도들도 에넨의 발자국을 보면 열광할 거다. 저 발자국이 흑역사라는 건 당사자인 에넨과 영원한 푸른 하늘, 나밖에 모르잖아. 모르고 보면 위대한 신의 흔적으로밖에 안 보인다고.
하지만 어쩌겠나. 발자국의 주인이 수줍음으로 가득한 상황인데. 물건을 빌려 가는 입장이니 배려해야지.
“태양의 첫 번째 발자취를! 그 영광을 당신의 종들에게 허락해 주소서!”
그 말을 끝으로 완전히 고개를 내렸다.
처음 봤을 때보다 명백하게 작아진 불꽃.
‘좋아.’
슬쩍 검으로 누르자 튕기지 않고 수월하게 꽂히는 땅.
여기서 기습적으로 발자국만 도려낼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에넨의 진심 분노를 당할 수도 있다. 신화 속에 나오는 ‘신의 뒤통수를 쳤다가 벌을 받은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짓겠다고 선언한 신전이지만 내 돈으로 짓는 건 조금 아까운 일이다.
북방은 제국의 영토고, 여명 교단과 우호 관계를 체결한 것도 제국이다. 내가 에넨의 신전을 발자국 위에 짓는다면 결국 제국에게 이로운 일이지 않나. 소식을 들은 여명 교단의 수뇌부와 사제들이 우르르 몰려와 감동의 눈물을 흘릴 테니까.
“장관. 지금 뭐라고 했나?”
“에넨이 이 대륙에 처음 강림했을 때, 처음으로 발을 디딘 흔적이 북방에 있었습니다. 그 위에 제국의 이름으로 신전을 세우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황제에게 보고했다. 이거 잘만 활용하면─ 아니, 그냥 발표하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성지로 지정될 곳을 발견했으니 위에 신전 하나 세우자고.
“마침 차기 성자와 추기경의 결혼식이 코앞입니다. 그 신전을 여명 교단에게 선물로 주겠다고 하면 교단이 기뻐하겠지요.”
겸사겸사 여명 교단에게 선물로 주는 건 어떻겠냐고.
“신전을 선물로?”
내 제안에 황제의 미간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에넨의 발자국이라는 희대의 흔적이 발견되어 당황한 와중에도, 제국 영토 일부를 떼어주게 생기자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대단한 본능이다. 사람이라면 에넨 발자국 화석을 앞에 두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할 텐데. 역시 황제는 사람이 아니야.
“물론 신전과 영토의 소유권을 여명 교단에 넘기자는 건 아닙니다. 세속은 오롯이 황제의 것. 아무리 교단이어도 어찌 황제의 것을 가지겠습니까.”
허나 지금은 감탄 대신 발작 버튼이 눌리려는 황제를 다독이는 게 먼저다.
신전을 관리하는 사제들은 여명 교단이 임명하고, 신전과 그 인근 영토에서 나오는 재화 또한 해당 교구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대신 신전과 영토의 소유권 만큼은 해당 국가가 가지고 있다.
그러니 신전을 선물로 주자는 건 소유권까지 넘기자는 말로 들릴 수 있으나,소유권은 우리가 가지면서도 생색을 낼 방법은 충분하다.
“신전의 이름을 차기 성자의 이름으로 짓는 것. 이 정도면 선물로 충분하겠지요.”
“호오.”
바로 새롭게 만들 신전을 ‘타니안 대성당’으로 짓는 것.
보통 신전의 이름은 신전을 세우는 국가가 짓는다. 비록 여명 교단의 성인이나 복자, 뛰어난 업적을 세운 여명 교단 성직자의 이름으로 지어야 한다는 제한이 있으나, 그 제한만 지킨다면 무엇으로 짓든 교단은 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제국이 신전 이름을 차기 성자의 이름으로 짓는다? 딱히 교단이 부탁하지도 않았고, 교단이 아닌 제국의 힘으로만 찾은 성지에 차기 성자의 이름을?
‘무조건 감동하지.’
엄격 근엄 진지한 늙은 추기경들도 눈물을 흘리며 감격할 수밖에 없다. 100% 확신할 수 있다.
“과연. 그렇군. 꼭 죽은 자의 이름을 붙이라는 법은 없으니.”
다행히 황제도 내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찌푸려졌던 미간이 도로 풀렸다.
“장관.”
“예, 폐하.”
“리시우코 추기경과 함께 에넨의 발자국이 깃든 곳으로 향하게. 제국의 일방적인 주장보다는 교단의 추기경도 함께 증언해야 교단이 믿지 않겠나.”
“실로 현명하신 말씀입니다.”
제국 내 사제 중 최고위 사제인 리시우코 추기경. 교황이 직접 임명한추기경이자 아우스엔 대교구장이니, 리시우코 추기경이 제국과 같은 증언을 한다면 교단도 믿을 거다.
설령 믿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텔레포트로 직접 보라고 하면 되니까.
“그리고 장관.”
“하명하소서.”
“앞으로 이런 보고를 할 거면 어느 정도 조짐은 보이고 해주게. 갑자기 신의 발자국이 발견됐다고 하면 내 심장이 버틸 수가 없어.”
“황공하옵나이다.”
진심이 가득 담긴 투정인지라 덤덤히 고개를 숙였다.
이해한다. 나도 영원한 푸른 하늘에게 에넨의 발자국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랬던가. 그동안 신과 관련된 온갖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선 채로 기절했을지 모른다.
“흐으으음.”
“왜 그러십니까?”
“신전의 이름 말일세. 성인은 아니지만 성자니 성 타니안 대성당이라 불러도 되겠지?”
그 말에 내 미간도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러네. 성인으로 시성 된 건 아니지만 성자잖아. 성자면 성인으로 취급해도 문제없을 것 같은데.
아닌가? 교단 교리에는 능숙하지 않아서 확신할 수가 없다.
***
아우스엔 대교구에서 믿을 수 없는 보고가 올라왔다.
[ 제국 북방 영토에서 주의 발자국을 발견. 발자국에 깃든 신성력과 꺼지지 않는 불꽃을 볼 때, 주의 흔적임이 확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유목민의 영역이었던 북방에서 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보고.
[ 신격 존재인 영원한 푸른 하늘의 증언에 따르면, 주께서 처음 대륙으로 강림하셨을 때 남긴 발자국임. ]그것도 평범한 흔적이 아닌, 주의 첫 발걸음이라는 보고.
[ 제국은 주의 흔적 위에 주의 집을 세우고, 성 타니안 대성당이라 이름을 붙일 예정. 곧 결혼을 치를 타니안 형제와 여명 교단을 위한 선물이라 강조. ]마지막 문장에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주여.’
이 늙은 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자 기쁨이다.
공의회를 이끌고 다섯 번의 종소리까지 울린 늙은이지만, 그럼에도 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이다.
‘성 타니안 대성당.’
심지어 그 흔적을 결혼 선물로 받았다면 더더욱.
“이 은혜를 대체 어찌 갚아야 할지.”
제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큰 선물은 대체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