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01)
로판 속 공무원 801화(802/945)
유벤 때와 달리 신성교국에는 나 홀로 입국하기로 했다.
에리한테 같이 갈 생각 있냐고 물어보니까 격렬하게 고개를 젓더라. 아무래도 부인들 사이에 ‘다른 사람이 간 여행지는 중복해서 가지 않기.’ 같은 신사협정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 사람의 추억은 그 사람만의 것으로 남겨주자는 가슴 따뜻한 배려지.
사실 나도 신성교국은 혼자 입국하는 게 편하다. 신혼여행을 겸한 여행이라면 몇 주 정도는 신성교국에 있어야 하는데, 나는 살아있는 복자이자 대형 선물을 준 당사자잖아. 너무 오래 교국에 머무르면 온갖 환호와 악수에 시달릴 수 있다.
그러니 혼자 입국한 다음에 타니안과 적당히 대화를 나누고, 용무가 끝나자마자 빠르게 귀국하는 것. 이게 최선의 일정이다.
“형은 혼자 가?”
“어. 그렇게 됐다.”
다만 부인 없이 솔로로 간다는 의미지, 정말로 나 혼자 가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는 에리히와 동시에 입국하기로 했다. 유벤에 갈 때는 여행을 위해서 조기 입국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제수들도 남편 잘못 만나서 고생이 많아. 얘가 국경 밖에도 친구가 많으니 원.”
“괜찮아요. 오히려 자랑스럽죠.”
“맞아요.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국경을 넘어보겠어요?”
그리고 에리히 옆에 있던 제노비아와 세라에게 인사를 건네자, 둘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받아주었다.
고마우면서도 안타까웠다. 에리히의 인맥이 온 대륙에 퍼진 것만 아니라면 저 둘도 국경까지 넘을 필요는 없으니까. 제도에서 평온하게 휴식을 취하고, 가끔 바람을 쐬고 싶으면 제국 내 명소를 구경하는 걸로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어쩌겠나. 저 둘이 반한 남자가 대륙구 인맥을 자랑하는데. 게다가 누구는 가족 단위로 축하하고, 누구는 개인 단위로 축하하면 축하받는 사람이 서운해할 수 있다.
“우리 조카, 태어나자마자 여기저기 유학 다니느라 바쁘네. 그래도 아카데미는 제국에서 다녀야 한다?”
“우우-”
아무튼 제노비아의 품에 안겨있던 로베르트에게 손가락을 뻗자, 로베르트는 내 손가락을 잡으며 옹알거렸다.
덕분에 마음이 급속도로 평온해졌다. 누구보다 작은 손이지만 누구보다 따스하고 포근한 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에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마법 같은 힘이 있다.
‘이 맛에 아빠로 지내는 거지.’
지금은 아빠가 아닌 큰아빠지만 뭐 어떤가. 세 글자 중 두 글자나 맞으면 과반수잖아. 그거면 돼.
“그런데 형.”
“엉?”
“선물로 그런 걸 준비하면 어떡해. 내가 괜히 민망해지잖아.”
타당한 투정이라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형과 동생이 나란히 얼굴을 비친다면 당연히 선물도 비교되는 법. 헌데 형이라는 놈이 성지와 신전을 선물로 제시했다? 에리히가 무얼 준비했든 밀릴 수밖에 없다. 나와 에리히가 별생각이 없어도, 하다못해 선물을 받는 타니안이 우리 모두에게 고마워해도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리게 된다.
“민망할 게 있나. 동생이 줄 선물을 형이 대신 냈다고 생각하면 되지.”
그렇기에 적당히 에리히를 다독였고,
“진짜 그렇게 생각하면 날로 먹는다고 뭐라 했을 거면서.”
연이어 반박할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와 조용히시선을 돌렸다.차마 나를 빤히 바라보는 로베르트 앞에서 당당할 수 없었다.
“…넌 뭐 준비했냐?”
결국 조카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이기지 못해 슬쩍 입을 열었다. 에리히의 선물이 약소한 편이라면 내가 다른 걸 얹어줄 생각으로.
“은광. 여명 교단에서는 은 자주 쓰잖아. 선물로 주면 알아서 필요한 곳에 쓰겠지.”
“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내 예측을 아득히 벗어난 선물이었다.
내 선물이 명분의 결정체라면 에리히의 선물은 실용성의 결정체다. 에리히의 말처럼 은은 종교적으로 다양하게 쓰이는 물질이니까. 교단 입장에서 은은 다다익선이니 기쁨 마음으로 채광하겠지.
다행히 내가 더 얹어줄 필요는 없겠다. 하필 내가 에넨의 발자국 같은 치트를 동원해서 문제지, 에리히의 은광도 선물로서는 적절하다 못해 훌륭한 수준이다.
‘미안하다.’
속으로 에리히에게 소소한 사과를 건넸다. 나도 좋은 선물을 찾고자 하는 욕망에 그만.
그래도 에넨의 발자국 같은 게 나올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어. 누가 그런 걸 예상하면서 선물을 찾겠냐고.
따질 거면 힘 조절에 미숙했던 뉴비 시절 에넨한테 따져라.
신성교국에 입국하자마자 VVIP 대접을 받게 되었다.
“어서 오십시오, 형제님. 교국을 대표하여 형제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텔레포트 마법진 위로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반겨주는 중년의 사제.
목에 멘 십자가와 붉은 의복을 보면 일반 사제가 아닌 추기경이다. 그리고 입국하기 전에 간략히 살펴봤던 교국 주요 인사 명단을 떠올려 보면─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예하. 외교성 업무로 바쁘실 터인데 직접 맞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국 외교성 성장인 빌렘 추기경. 외교 책임자이자 의전 책임자가 직접 행차했다.
“그런 말씀은 마시지요. 아무리 바쁜들 형제님을 맞이하는 것보다 중한 일이 있겠습니까?”
바로 자신을 알아보자 빌렘 추기경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너무 정중한 대우라 조금 민망했다. 아우스엔 대교구장인 리시우코 추기경조차 의전 서열로는 나보다 위인데, 교단에서 열셋뿐인 성장 중 하나인 이 양반은 오죽하겠나. 적어도 제국 공작 정도는 데려와야 성장들과 대등하다고 할 수 있을 거다.
“성하께서도 형제님을 각별히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교단이 형제님 덕에 큰 은혜를 입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평범한 제국 귀족이 아닌 복자이자 성지를 발견한 자. 내가 난색을 표한다면 도리어 교단 측에서도 어쩔 줄 몰라 할 거다.
그러니 어쩌겠나. 모두의 행복을 위해 이 대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수밖에.
“참으로 감사한 말씀입니다. 헌데 저 홀로 방문한 것이 아닌지라…”
살짝 말을 흘리며 뒤를 바라보니, 빌렘 추기경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걱정 마시지요. 당연히 형제님과 함께 오신 가족분들도 형제님을 대하듯 모시겠습니다. 저희가 그 정도 융통성은 있습니다.”
“교단 분들이 유연하고 자비로우신 건 타니안 형제님 덕에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그분을 기준으로 삼으신 거면 곤란하군요. 타니안 형제님은 저희 중에서도 유독 특출난 분인지라.”
그 말에 나도, 뒤에 있던 에리히도 반사적으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렇지. 타니안이 모든 사제들의 평균이자 기준이라면 많이 곤란하지. 교단이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수준을 넘어서 뒤틀린 황천의 무언가가 될 테니까.
***
성하와 독대를 하게 됐다.
평소라면 성하 옆에 계시는 스승님도 잠시 물러난 채, 오직 나와 성하만이 집무실에 남았다.
“이제 며칠 후면 신앙의 가족이 아닌 진짜 가족이 생기겠군요. 축하드립니다.”
“어찌 가족에 구분을 두겠습니까. 저에게는 성하를 위시한 모든 형제자매님들도, 저와 부부가 될 알렉산드리아나 자매님도 소중한 가족입니다.”
“기꺼운 말씀입니다만, 어디 가서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새신부께서 상당히 서운해할 겁니다.”
“아, 확실히 그렇겠군요. 명심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성하께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셨다.
보기만 해도 푸근해지는 미소라 나도 미소를 짓게 되었다. 성하께서는 존경받아 마땅한 사제시고, 교황이라는 직책에 비해 상당히 소탈한 분이시다. 가족을 잃은 나에게 할아버지처럼 다가와 주신 분이기도 하니 나도 모르게 반응하고 말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복되고도 복된 인연이다. 아버지처럼 돌봐주신 스승님과 할아버지 같은 성하라. 이 두 분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겠지.
“형제님.”
“예, 성하.”
“이 늙은이는 감히 형제님을 손자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의 아들인 성자에게 품기에는 참으로 교만한 마음이지요.”
“성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주의 아들이라면 성하께서는 주의 대리자요, 수석 제자의 후예 아니십니까.”
이윽고 나와 성하의 관계가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말에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허허, 고해성사를 위해 한 말이 아닙니다. 그저 손자 같은 형제님의 결혼도 지켜보게 됐고, 몇 개월 후면 증손도 생길 터이니. 주의 가호 덕에 많은 걸 누리고 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성하는 내 손을 조심스레 잡으셨다.
“이제 물러나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요.”
“예?”
이어지는 충격 선언에 절로 몸이 굳어버렸다.
물러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 물러나기는 누가 물러난단 말인가.
“서, 성하. 어찌 그런 농담을 하십니까?”
아무래도 성하께서 결혼을 코앞에 둔 나를 위해 작은 농담을 하신 모양이다. 이 손자 같은 어린 녀석을 위해 노력하신 게 분명하다.
저 농담이 내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함이라면 성공하셨다. 가슴을 은근히 옭아매고 있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지기는 했으니까.
내 노력이 아닌 외부 충격으로 인한 해소라는 게 문제지만.
“형제님. 이 늙은 놈은 과분한 자리에 올라, 많은 걸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상 자리를 지키는 건 욕심이겠지요.”
그러나 내 바람과 달리 성하는 야속한 말씀을 이어가셨다.
“공의회를 열었고, 세계수의 부활을 지켜보았고, 다시 부활한 사왕을 토벌했습니다. 저보다 젊었던 제국의 황제는 어느덧 상황으로 물러났습니다.”
“그, 것은.”
“이 이상 저의 시대가 길어지면 안 됩니다. 제가 계속 자리를 지키게 된다면 사람들은 주의 종인 교황이 아닌, 교황의 자리를 차지한 발트사크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성하의 심정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성하는 당신께서 과도한 관심과 경외, 추앙을 받는 걸 피하고자 하신다. 공의회를 통하여 신도들의 미움을 살 각오를 하셨으나, 주의 가호 덕분인지 성하가 주도한 공의회는 만인의 축복을 받게 되었다. 그로 인해 성하의 권위와 명성은 드높고도 드높게 치솟았다.
그렇기에 성하의 말씀이라면 누구나 믿고 따를 것이다. 성하의 손짓이면 모든 신도들이 나아갈 것이다.
마치 우리가 주를 섬기는 것처럼.
‘종이 주인처럼 여겨지는 상황이라.’
일평생 주를 위해 살아오신 성하니 그런 미래는 피하고 싶으시겠지.
“적어도 제 아이에게 증조부가 교황이라는 건 보여주고 싶습니다.”
“제가 그때까지는 반드시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성하를 만류하는 대신 성하의 뜻을 지지하자, 성하는 고맙다는 듯 다시 미소를 지으셨다.
‘…잠깐만.’
이거 설마.
“저기, 성하? 성하께서 물러나시는 것. 저 외에는 누가 알고 있습니까?”
성하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런.’
없구나. 아직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
‘당분간 시끄럽게 싸우겠어.’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이거 졸지에 성하의 생전 퇴위를 만류하는 형제자매님들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스승님을 포함한 모든 추기경들의 공격을 받으며, 모든 사제들과 신도들의 간절한 외침을 외면하며 성하의 뜻을 지지해야 한다.
상상만 해도 아찔한 미래다.
“성하. 칼 형제님과 그 가족분들께서 오셨습니다.”
그래도 문 너머에서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빌렘 형제님의 목소리가 들려, 아찔한 미래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