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02)
로판 속 공무원 802화(803/945)
각별히 모시라고 지시한 건 예의상 한 말이 아닌 듯, 교황의 집무실로 향하자 정중히 맞이해 주는 교황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결혼식의 주인공인 타니안도 집무실에 있었다. 교황에게 인사를 하면 바로 타니안에게 가려고 했는데, 다행히 여기저기 돌아다닐 필요는 없겠어.
“어서 오시지요, 형제님. 먼 길을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노고라니요. 제국과 교국은 누구보다 가깝고 친밀한 이웃이지 않습니까. 심지어 텔레포트로 왔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그거 참 다행인 말씀입니다.”
아무튼 먼저 인사를 건네는 교황에게 살며시 허리를 숙였다.
교황은 황제와 더불어 이 대륙의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존재. 아무리 내가 교단의 VVIP 대우를 받아도 대등한 모습을 보이는 건 많이 곤란하다. 해석하기에 따라 교황 = 타일글레헨 백작 = 황제라는 기적의 공식이 성립되니까.
아니, 애초에 교황은 상황보다도 나이가 많은 어르신이다. 그것도 나이를 뒤로 흡입한 양반이 아닌 제대로 된 어르신. 그런 어르신과 대등한 대접을 받는 건 좀.
“흐음. 뒤에 계신 분이 에리히 형제님이시겠군요. 과연 칼 형제님의 동생답게 똑 닮으셨습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늘 보는 얼굴이라 그런지 잘 모르겠군요.”
“가까이 있기에 도리어 모르는 것이 있는 법. 피를 나눈 형제라도 다르지는 않은가 봅니다.”
작게 웃음을 흘린 교황은 이윽고 타니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자신과 어울려 줄 필요는 없으니 주인공과 얘기하라는 것처럼.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제님. 경사스러운 일로 다시 뵙게 되어 기쁠 따름입니다.”
그 배려에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후, 타니안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에리히의 말에 따르면 타니안은 혼전 임신이라는 기막힌 업적을 달성했다고 한다. 덕분에 결혼식을 다소 급하고 갑작스레 준비한 감도 없잖아 있다고 했지.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일까. 피임 마법이나 성법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차기 성자가 피임에 실패한 것은 조금 아이러니한 일이나, 그래도 원치 않은 사랑을 나눈 건 아니잖아. 과정과 결과가 약간 뒤바뀐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순수한 마음으로 축하할 수 있었다. 솔직히 나도 혼전 임신만 아니었지, 결혼 과정이 무난하고 평탄하지는 않았어.
“저 역시 그리운 인연을 좋은 일로 만나게 되어 감격스럽습니다. 성지 순례를 위하여 제국을 방문한 것도 주의 자비라고 생각했는데, 이처럼 빨리 재회할 줄은 몰랐습니다.”
“전부 주의 인도하심이겠지요.”
“형제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께서 안배하심이니.”
기분 탓인가. 어째 ‘내가 피임 실패해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 거니, 내 피임 실패는 주의 안배임.’ 이라고 항변하는 것 같았다.
물론 기분 탓일 거다. 타니안이 사제치고는 많이 독특하고 진취적이기는 하나, 신앙심만큼은 의심할 여지 없는 진짜다. 그런 녀석이 자신의 실수를 신의 탓으로 돌릴 리 없다.
“에리히 형제님과 제노비아 자매님, 세라 자매님도 귀한 발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 같은 분들은 많아도 친구라 할 수 있는 분들은 적어 아쉬웠는데, 제 결혼식에도 친구가 자리를 빛내주겠군요.”
“먼 곳의 친구도 봤는데 가까운 곳에 있는 친구를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에리히의 존대에 타니안의 눈이 잠깐 커지더니,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형제님, 편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성하께서도 저와 형제님의 우정은 잘 알고 계시니까요.”
교황 앞이라고 겸손 떨 것 없이 반말해도 된다는 말. 그 직설적인 말에 에리히도 어색히 웃음을 흘렸다.
이해한다. 아무리 당사자가 괜찮다고 해도 교황 앞에서 차기 성자에게 말을 놓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앞에 차기라는 딱지가 붙었어도 성자는 성자. 성자는 교황조차 동등하게 대우하는 신성한 존재─
“그럼 그럴까?”
“물론이지요.”
그 부담스러운 걸 기어이 해내는 에리히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
통탄스럽다. 내 하나뿐인 남동생은 어쩌다 저런 괴물로 자랐을까. 에리히가 부모님의 사랑을 조금 덜 느끼고 자란 건 맞지만, 그래도 유모의 정성스러운 케어를 받았을 텐데.
“그건 그렇고. 이 아이가 제 조카입니까?”
그래도 타니안은 물론, 교황도 에리히의 반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제노비아의 품에 안겨 두 눈을 깜빡이는 로베르트에게 관심을 보였다.
다행이다. 에리히가 성자 모욕으로 파문 당하면 그만한 망신도 없잖아.
“맞아. 우리 아들 로베르트. 귀엽지?”
“하늘에서 내려온 아기 천사 같습니다. 뻔하고 흔한 표현이지만 그 말 외에는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실제로 타니안은 다소 멍한 얼굴로 로베르트를 바라봤다.
원래 미운 다섯 살이라 불리는 단계면 모를까, 막 태어난 아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다. 게다가 타니안은 며칠 후면 새신랑이 되고, 몇 달 후면 아빠가 될 몸. 로베르트가 더욱 각별하게 보일 거다.
“…형제님. 잠시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조심해서 만져. 우리 애가 얌전한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낯은 좀 가리거든.”
“걱정 마십시오. 주께서 누구보다 따뜻하게 다독이실 겁니다.”
“응?”
미소를 머금은 타니안은 아주 조심스럽게 로베르트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천상의 주께 당신의 종이 청하나니. 이 가녀리고도 순수한 생명을 굽어살피시며, 이 아이의 앞날을 밝게 비추어 주소서. 이 아이에게 시련은 더욱 강인해질 수 있는 기회가 되기 하옵시고, 어둠이 감히 다가오지 못하게 하소서.”
‘오.’
그러고는 차기 성자의 정성 어린 축복을 내려주었다.
“우- 아-!”
로베르트도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선물이 찾아왔다는 걸 아는지, 타니안을 향해 빵싯 웃음을 지었다.
장하다, 우리 조카. 축복을 내려준 은인에게 그 정도 서비스는 해줘야지.
“형제님. 괜찮으시다면 이 늙은이에게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입꼬리가 귀에 걸린 에리히, 연신 감사를 표하는 제노비아를 보다가 교황의 부름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히와 타니안은 로베르트 덕에 시간 가는 줄 모를 테니, 잠시 자리를 비워도 별문제는 없을 터.
‘할 말이 많겠지.’
게다가 교황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거다. 방금 전에는 타니안을 위해 한 걸음 물러났지만, 그 타니안의 어그로가 로베르트에게 박혔잖아. 이럴 때가 아니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다.
교황의 독대 요청에 자리를 옮겼다.
교황 집무실 바로 옆에 있는 소회의실로.
“형제님도 아시겠지만 직책이 높아질수록 회의도 자주 열게 됩니다. 덕분에 집무실 바로 옆에 이런 흉한 방을 만들게 되었지요.”
“흉하다니요. 이 성스러운 곳에 어찌 흉한 곳이 있겠습니까.”
“이 방의 역사를 듣는다면 형제님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실 겁니다. 이곳에서 오고 간 주먹질은 헤아릴 수 없고, 고성은 셀 가치조차 없으니 어찌 흉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저런.”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오고 말았다.
교황 집무실 바로 옆에 위치한 회의실이면 그 입장 자격도 상당히 높을 거다. 기본이 성장직을 맡은 추기경, 최소로 잡아도 무보직 추기경이 아닐까?
헌데 그런 인물들이 회의 중에 레슬링을 벌였다고 한다. 절로 탄식이 나올 일이다.
“물론 그 다툼은 주를 향한 경외와 신앙의 증표였고, 다툼으로 인해 역대 교황들과 추기경들 사이에 앙금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이 방에서 생긴 일은 어디까지나 방 안에서 끝낼 것. 그것이 나름의 규칙이자 최후의 선이었습니다.”
“상당히 인상적인, 전통입니다.”
“조만간 전통 위에 새로운 역사를 쓸 것 같지만 말입니다.”
껄껄 웃음을 터뜨리는 교황을 보니 본능적으로 불안감이 들었다.
이 방의 기괴한 전통을 설명한 다음에 역사를 운운하다니. 설마 교황이 이 자리에서 나와 주먹의 대화를 나누자는 건 아닐 거잖아.
“형제님께서는 주의 축복을 받으시고, 여러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렇기에 살아서는 복자요, 죽어서는 성자로 시성 되는 게 확정되었지요.”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말입니다만, 사후 시성은 없던 일로 해야겠습니다.”
의외의 말인지라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이미 살아서 복자의 지위를 누리고 있고, 죽어서 받는 시성은 큰 의미가 없다. 그러니 사후 시성이 취소되어도 큰 지장은 없다. 그저 교단에게 밉보인 것도 없는데 취소된 것이 당혹스러울 뿐.
“사왕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아.’
이어지는 말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리시안느가 토벌되지 않고 살아있는 건 교황도 알고 있었다. 이 대륙 내에서도 극히 일부만 아는 사실이나, 교단의 흑역사인 사왕이 내 손에 있다는 건 교황의 심기를─
“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사왕이 형제님 곁에 있는 건 주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주께서 형제님을 인도하심이고, 그 증거가 이번에 형제님께서 발견하신 성지지요.”
그렇게 말한 교황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내 눈을 바라봤다.
호의와 감사. 어떠한 부정적 감정 없이, 오직 그 두 가지 감정이 교황의 눈에서 보였다.
“그렇기에 형제님의 사후 시성을 취소하고, 생전 시성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예?”
“사실 주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태양과 하늘, 초목의 축복을 받는 영웅은 누구보다 찬란하니, 인간이 누릴 영광 중 가장 무거운 영광을 짊어짐에 마땅하다─ 라고 말입니다.”
“주의 계시, 말입니까?”
“예.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미천한 놈이 다시금 주의 목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느새 교황의 눈이 몽롱해졌다. 에넨의 계시를 받았던 그 순간을 회상하는 것처럼.
“덕분에 이 늙은이는 소란스러운 교황이 돼버렸습니다. 임기 중에 공의회도 열고, 다섯 번의 종소리도 울리고, 생전 시성이라는 파격적인 일도 추진하게 생겼으니까요. 교황직에서 물러날 명분으로는 충분할 정도입니다.”
그 말에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교황의 생전 퇴위라니. 그런 폭탄선언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지 말라고.
애초에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건데. 황제가 신성교국으로 가는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걸 보니, 아직 제국의 첩보망조차 교황의 퇴위 결정은 모른다는 뜻이잖아.
“형제님.”
“예… 말씀하시지요.”
“주의 계시에 따라, 이 늙은이의 마지막 행보는 형제님의 이름 앞에 ‘성(Saint)’을 붙이는 것으로 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만약 제가 거절한다면…”
“형제님의 생각보다 이 늙은이의 무릎은 가볍습니다.”
거절하면 무릎을 꿇어가며 다시 부탁하겠다는 말.
너무도 가혹하고 잔인한 협박이라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