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03)
로판 속 공무원 803화(804/945)
오늘따라 태양이 밝다.
아니, 밝은 수준을 넘어 뜨겁게 느껴진다. 한겨울임에도 햇볕이 나를 불태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뜨겁게 내리쬐었다.
이것이 신의 분노인가. 이것의 종교 전쟁 시절 태양신으로 군림하고, 무수히 많은 경쟁자들을 쥐어 팬 승리자의 시선인가.
‘우리 기도로 원만히 합의 봤잖아.’
태양을 올려다─ 보는 건 무리니 태양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숙였다.
서럽고도 원통했다. 에넨의 자존심과 체면을 고려하여 발자국 화석은 북방에 남겨두었다. 발자국을 도려내서 교국에 보내는 대신, 발자국 위에 신전을 세워서 사제들만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분명 우리의 합의는 그걸로 끝난 거였다. 에넨도 만인에게 공개하는 건 꺼릴지언정 사제들에게 보여주는 건 용납했다.
‘이런 더러운 배신을.’
그래놓고 뒤에서는 교황에게 무시무시한 계시를 내리고 있었다. 이미 살아있는 복자인 나에게 생전 시성을 하라는 미친 계시를.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성인으로 불리게 만들라는 공포스러운 계시를.
화전양면전술도 이 정도면 예술이다. 앞에서는 합의하는 척을 하면서 뒤에서는 가차 없이 비수를 날리다니. 이래야 그 지옥 같은 종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건가.
“형제님께서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계십니다. 그동안 쌓아 올린 기적과 업적도 화려하지만, 주께서 그걸 원하시기 때문이지요. 이 늙은이의 마지막 불꽃을 태워서라도 반드시 형제님을 시성하겠습니다.”
이윽고 교황이 했던 말이 떠올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생전 퇴위를 마음먹은 교황이 마지막 업무로 내 시성을 지목했다.
긴 세월 동안 교단과 교국의 정점으로 군림하고, 공의회를 성공적으로 이끈 기적의 교황. 그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 시성이 확실시되는 교황이 마지막 정치력, 마지막 열정을 불태워 나를 성인으로 만들겠다고 한다.
이건 누구도 못 막는다. 저 정치 괴물의 행보를 막으려면 현 황제로도 부족하다. 황궁 구석에서 두덕리 온라인 중인 상황이 다시 무대 위로 올라와야 가능할 거야.
‘인생…’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 있는 통신구를 꺼냈다.
교황의 생전 퇴위 결정과 내 생전 시성 소식. 이 정신 나간 소식을 대체 뭐라고 보고해야 좋을까. 황제는 그 보고를 듣고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일단 후자를 듣고 비웃을 거라는 건 알겠다. 아주 신나게 비웃을 거야.
***
이상하다. 겨울인데도 추위가 아닌 따뜻함이 느껴졌다.칼처럼 매서운 바람이 아닌 부모님의 품처럼 따스한 공기가 나를 감싸 안았다.
물론 날씨가 순리를 거스른 건 아니다. 오늘은 여전히 겨울이고, 여전히 추운 날이다. 바람은 순리대로 차가움을 머금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을 어떠한 날보다 따스하고 포근한 날로 기억할 것이다. 겨울바람조차 이겨낼 기쁨이 나에게 다가왔으니까.
“어때요?”
“아름답습니다.”
추기경의 상징인 붉은색 사제복이 아닌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알렉산드리아나 자매님.
결혼을 하면 누나와 동생이 아닌 부부가 되니 최대한 부드럽고 편하게 말하고자 노력하는 알렉산드리아나.
어느 때보다 수줍게 미소 짓고 민망하다는 듯 배를 매만지는 나의 부인.
‘나의 가족.’
이런 소중하고도 사랑스러운 사람을 눈앞에 두고 어찌 추위에 먹힐 수 있을까. 어찌 추위 따위에 굴복하여 몸을 떨 수 있을까.
나는 영광스럽고도 과분하게도 신의 아들이라 불리는 성자다. 우리를 굽어살피는 태양의 아들이다. 그러니 사소한 추위 때문에 소중한 것을 놓칠 수는 없다.
“붉은색도 화사한 매력이 있었는데, 하얀색은 순수하고도 깨끗한 매력이 느껴지는군요.”
그리고 자매님의 드레스를 본 후, 화려한 언변으로 칭찬하는 것보다 진심 어린 감탄을 택했다.
어차피 나는 누군가를 칭찬하고 애정을 표하는 것에 미숙하다. 미숙함으로 상대를 난감하게 할 바에는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진심을 담는 게 최고다.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이 진심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가장 편한 것이 진심에 책임지는 것이니.
“우리 보물이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 그럴까요?”
“물론이지요.”
내 확신 가득한 대답에 자매님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나와 자매님에게 보물처럼 찾아온 우리 아이. 보물처럼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소중한 우리 아이. 그렇기에 보물이라는 태명을 붙인 우리 아이.
분명 보물이도 엄마를 보며 예쁘다고 칭찬할 거다.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기뻐할 거다.
“둘이서만 결혼식을 치를 생각이 아니면 슬슬 나가라.”
그렇게 보물이를 향해 손을 뻗으려던 찰나, 경신성사성 성장인 알디노 형제님께서 입을 여셨다.
덕분에 조금 민망했다. 대기실에서 잠깐 매무새만 확인하려고 했는데 그대로 정신이 팔려버렸으니까.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형제님이 독촉을 하실 정도로.
“죄송─”
“오늘은 저희를 위한 날인데 조금은 참아주시면 안 돼요?”
허나 내 사과보다 자매님의 투정이 더 빨랐다.
“참아서 이제 말한 것 아닌가. 평소 같았으면 당장 나가라고 밀었지.”
애석하게도 순식간에 반박 당한 투정이었지만.
“할 말은 많지만 오늘은 참도록 하지. 그러니 당장 나가서 주께서 보시는 곳에서, 하객들이 보는 앞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면 된다.”
“귀중한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형제님.”
“그래도 타니안 형제님은 제 말에 귀를 기울여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알디노 형제님이 힐끗 자매님을 바라보자, 자매님의 어깨가 잠깐 움츠러들었다.
사실 우리의 혼전 임신을 들켰을 때. 내가 스승님에게 충고를 들은 것처럼 자매님은 알디노 형제님에게 긴 충고와 꾸지람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자매님은 형제님의 눈빛에 움찔하는 경우가 잦지.
하지만 어쩌겠나. 혼전 임신은 우리가 너무 서두른 것이 맞고, 형제님의 충고는 실로 지당한 것. 그저 묵묵히 감수해야 할 일이다.
“보물아. 철없는 엄마 아래에서 고생이 많겠구나. 부디 삼촌들과 이모들에게 의지하여 밝게 자라거라.”
“살다 보면 조금 빠르게 움직일 수도 있지…”
“그런 말을 하는 게 철이 없다는 거다.”
비록 자매님은 묵묵함보다 적극적인 항변을 택했지만 이 역시 자매님과 형제님 나름의 정일 터.
아마 정이 맞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조금 곤란해.
결혼식 사회는 감사하게도 성하께서 직접 맡아주셨다.
처음에는 수석 추기경이기도 한 스승님이 맡을 예정이었으나, 스승님은 내 가족석에 앉아야 한다는 성하의 주장 덕에 이런 영광스러운 상황이 펼쳐졌다.
“행복은 스스로 쟁취하기도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 자리에 선 신랑과 신부가 만난 것은 스스로 쟁취한 행복이지요.”
세 번째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도 모르게 다가온 행복이고요.
성하께서 그렇게 덧붙이시자 하객석 쪽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쁜 일이다. 처음에는 자매님의 배를 보고 경악하던 하객들도 우리 보물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축하해 줬다. 뭐가 그리 급했냐며 농담을 건넬지언정 어찌 사제가 그럴 수 있느냐고 분노를 표하지 않았다.
실로 다행인 일이다. 우리의 결혼식을 고성이 아닌 축복 속에서 진행할 수 있었으니.
“타니안 형제님과 알렉산드리아나 자매님은 교단과 교국의 기둥입니다. 비록 누구보다 젊지만 누구와 비교해도 부족함 없는 자질을 갖추고 계시니, 미래의 교단은 이 두 분이 함께 이끌어 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극찬까지 듣게 되었으니.
성하께서 나를 높게 평가해 주시는 건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미래의 동량이라고 선언할 줄은 몰랐다. 이것이 성하의 애정 표현이자 신뢰의 증거겠지.
너무 신뢰하셔서 생전 퇴위 같은 어마어마한 일도 알려주셨지만 말이다. 그런 건 좀 숨기셔도 됐을 텐데.
“또한 두 미래 사이에서 태어날 새로운 미래 역시. 위대하신 주의 가호를 받아 찬란한 길을 나아갈 것이라 믿습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보물이를 향한 축복. 그 과분한 축복을 마지막으로 성하는 환하게 미소 지으셨다.
결혼식을 이끌어야 할 사회자가 아닌, 내 할아버지이자 보물이의 증조할아버지로서 웃으셨다.
***
사람에게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장관의 운명은 몇 사람의 운명이 엮인 것인지 궁금하다.
저게 어떻게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운명인가. 못해도 10명 이상의 운명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국경을 넘을 때마다 온갖 소란의 중심에 설 리가 없다.
“됐다.”
허나 지금 중요한 건 장관이 소란의 중심에 선 것이 아니다.
중심에 선 장관이 벌레 씹은 얼굴로 돌아온다는 것이 중요하다.
“완벽하군.”
덕분에 아무도 없는 집무실에서 홀로 중얼거렸다. 그만큼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요동쳤다.
황궁의 중심인 태양전. 태양전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소인 집무실. 황제가 모든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기에 황제의 집무실에는 에이만카 대제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대제께서 지켜보시는 곳이니 사소한 일에도 허투루 임하지 말라는 고귀한 뜻.
그리고 그 초상화 맞은편에 장관의 초상화를 걸었다.
그냥 초상화가 아닌 성인처럼 그려진 장관의 초상화를 걸었다.
“크흐─”
절로 튀어나오는 웃음에 황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혼자 웃음을 터뜨리면 문밖에 있는 헨드릭 경이 의문을 가질 터. 지금은 이 악물고 참아야 한다. 이 초상화를 볼 장관을 기다리며 참아야 한다.
교국에게 받은 이 초상화를 함께 구경하기 전까지, 반드시.
‘이걸 벌써 꺼낼 줄이야.’
동시에 경이로운 감정이 치솟았다. 내가 죽은 뒤에야 빛을 볼 줄 알았던 초상화를 벌써 사용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아마 이 초상화를 준 교국도 몰랐을 거다.
‘생전 시성과 퇴직이라.’
이윽고 씰룩거리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왔다. 장관의 이름 앞에 ‘성’이 붙을 상황이라 웃음이 멈추지 않지만, 교황이 생전 퇴위를 생각 중인 것 또한 가벼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현 교황은 우직하고 추진력 있는 인물. 그런 인물이 생전 퇴위를 정했다면 그것은 확정된 일이나 마찬가지다. 남은 건 차기 교황으로 누가 선발되느냐지.
‘무난하게 진보파 추기경이 뽑히겠지만.’
공의회를 통해 대대적인 변화를 이루어낸 교단이다. 그런 상황에서 보수파 추기경이 교황으로 등극하는 건 과거로 회귀하는 꼴. 높은 확률로 진보파 추기경이 새로운 교황으로 등극하지 않겠나.
그러니 우선은 진보파 추기경 목록을 다시 확인하자. 이왕이면 제국과 우호적인 인물이 교황으로 등극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니까.
‘…살아있는 성인이 제국인이니 교황과 어색해도 괜찮으려나?’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살아있는 성인이 제국의 귀족이고 장관이라니. 너무 든든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