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05)
로판 속 공무원 805화(806/945)
라인하르트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 크라시우스 가문의 전전대 가주이자 내 조부님 되시는 분.
그러나 에리히가 막 태어났을 때쯤 세상을 떠나서, 이 몸의 원래 기억 속에도 남지 않은 미지의 인물.
‘능력은 역대 가주 중 손에 꼽힐 정도였지.’
물론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향한 기억만 없는 것이지, 현 가주로서 선대 가주에 대한 기록은 충분히 살펴볼 수 있었다. 사실 조부님에 대한 기록은 외면하려고 해도 제국 곳곳, 가문 곳곳에 존재했으니 외면할 수 없었지만.
조부님이 가주였던 시기는 황제들의 화려한 트롤링으로 인하여 황권이 추락하고, 황제와 운명 공동체인 제국백들의 입지도 곤란한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황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충신, 상황을 적극적으로 보필한 능신이 조부님이었다. 기록이 없을 수가 없다.
아무튼 조부님은 상황을 보필하는 제국백으로서, 흔들리는 황권을 수호하는 방패로서, 상황의 명에 따라 불손분자들을 짓누르는 검으로서 맹활약했다. 품위 있는 귀족이자 능력 있는 영주였으며, 강력한 무인이자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가장으로서는 썩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처럼 표현이 서툰 것도 아니었어.’
크라시우스 가문의 기록, 조부님 시절을 기억하는 가문의 가신들과 사용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조부님은 진짜배기 냉혈한이었다. 겉만 무뚝뚝하고 속은 부드러운 성품이 아닌, 겉과 속이 똑같이 차가운 사람이었다.
덕분에 조부님 시기의 크라시우스 가문은 딱딱하고 싸늘했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가족 전원을 도구로 바라본 가주 때문에. 부인들은 정략의 증표, 자식들도 미래의 정략 도구로 본 가주 때문에.
그리고 적극적인 정략혼을 펼친 조부님은 당연히 여러 부인을 두었고, 아버지를 포함하여 총 일곱의 자식을 두었다.
장남이자 첫째인 아버지 외에 세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나에게는 숙부와 고모인 분들을.
…
‘조부님의 일생을 벌써 뛰어넘었네.’
조금 미묘한 기분이다. 모든 걸 도구로 본 조부님조차 평생 일곱의 자식을 두었거늘, 나는 벌써 여덟의 자식을 보았고 부인도 여섯이다. 철저한 정략의 괴물을 능가한 진짜 괴물이 되어버렸어.
“일단 준비만 해둬. 내가 신호 주면 그때 움직이고.”
– 예, 각하.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조부님을 능가한 손자가 된 것이 아니라, 다소 좋지 않은 이유로 고모 중 한 분과 접촉하게 생긴 것이다.
내가 숙부, 고모들과 친하지는 않아도 사이가 나쁜 것 또한 아니다. 나와 안면은 없을지언정 핏줄은 확실하게 이어져 있다.
그것도 나로 인한 핏줄이 아닌 아버지를 통한 핏줄이. 내가 어떤 결단을 내리든 아버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핏줄이.
‘이를 어쩐다.’
빛을 잃은 통신구를 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관 비서가 감찰을 준비할 정도면 그냥 넘어갈 만한 사안은 아니라는 뜻이다. 적당히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면 비서 선에서 진즉에 무마했을 테니까. 감찰을 실행하는 것보다 넌지시 구두 경고를 하거나 약점 잡듯이 보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많아.
허나 비서는 나에게 직접 보고했다. 단순 구두 경고나 묵인이 아닌, 나르젠 백작가를 직접 감찰해야 한다고. 내 고모가 있는 가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판단을 내렸다.
비서 입장에서도 상당히 힘들었을 보고. 그러니 내가 비서를 신뢰하고 전권을 맡겼다면─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라면 이 판단 역시 수용해야 한다.
‘핏줄이냐, 질서냐.’
환장하겠다. 어느 쪽이든 단호히 선택할 당위성이 존재하잖아.
‘원칙대로 하는 게 최고기는 한데.’
일단 감찰은 원리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게 무난하고,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게 적절하다. 전자는 무엇보다 명확한 기준이, 후자는 귀족으로서 당연한 기준이 세워지는 것이니.
반면 핏줄이나 사적인 정에 따라 움직인다면 그 확고한 기준이 무너지게 된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기준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준이 아니라 만행. 경외와 공포, 공정함과 신뢰를 갖추어야 할 감찰의 권위가 망가지게 된다.
결국 감찰을 진행하기도, 내 선에서 무마하기도 애매한 상황.
– 칼?
“갑자기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혹시 시간 되십니까?”
그래서 고심 끝에 아버지에게 연락을 걸었다.
무엇을 택하든 아버지와의 상의는 필수다. 내가 아버지의 원망을 받게 될지언정, 적어도 아버지와 대화는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아버지도 고모를 볼 면목이 설 테니.
회동 장소는 타일글레헨 백작령이 아닌, 안심과 신뢰의 호수로 정했다. 백작성으로 가면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으니까.
그리고 날이 추워서 그런지, 다행히 호수에는 나와 아버지 외에 다른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멀리 가지 말고 근처에서만 놀아.”
– 멍멍!
다만 심각하고 중요한 대화를 나누어야 하기에 티티를 데려왔다. 외부인이 접근하면 맹렬히 짖는 파수견 역할을 맡기기 위해서.
이걸로 드넓은 호수에 나와 아버지, 티티만이 존재했다. 여기서 나눌 대화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겠지.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갑자기 보자고 할 때부터 짐작했다만.”
내 당부를 듣자마자 쪼르르 달려가는 티티를 보던 중,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여셨다.
“제법 중요한 대화가 오고 갈 것 같구나.”
그것도 대답하기 난감하고 죄송스러운 말과 함께.
내가 먼저 아버지를 뵙자고 한 건데도, 내가 이 장소를 정한 건데도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가족에 대한 정이 깊다는 걸 아는데, 어찌 ‘고모님 가문에 감찰 걸 예정입니다.’ 같은 말을 할까.
“저, 아버지.”
물론 사람을 불러 놓고 용건을 말하지 않는 건 가족 사이에서도 예의가 아니다.
게다가 이 일은 늦게 말할수록 서로에게 불편하고 난감한 일. 최대한 빨리 말하는 것이 아버지와 고모, 감찰성을 위한 일이다.
“나르젠 백작가 말입니다만.”
내 말에 아버지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덕분에 죄책감은 더욱 커졌다. 이 조카라는 놈은 나르젠 백작가를 잠시 잊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당신의 여동생이 있는 가문인 걸 알고 바로 반응하셨잖아.
“그곳에서 작은 소란이 생겨서, 아무래도 감찰을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더냐.”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나도 아버지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호수만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겠나. 이 제국에서 감찰이 갖는 의미가 흉악하기 짝이 없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장관인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도 감찰부에 잠깐이나마 몸을 담았던 분이니까.
“네 막내 고모의 이름은 엘린 크라시우스다. 이제는 엘린 나르젠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말이다.”
“소가주의 부인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나르젠 가문의 차기 안주인이 될 예정이라고…”
“맞다. 그건 네 다른 숙부들과 고모들도 마찬가지다. 네 조부께서는 당신의 자식들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으셨으니까.”
씁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정략은 나름 대등한 관계끼리 하는 것.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각 가문과 정략혼을 맺은 숙부, 고모들은 그럭저럭 괜찮은 가문에서 괜찮은 입지를 가질 수 있었다. 미약한 가문에 귀중한 정략 카드를 소모하는 건 낭비에 불과하니까.
허나 방금 아버지가 말씀하신 허투루라는 단어에서 아버지와 동생분들이 겪은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대체 얼마나 기계적인 정략혼이 오고 갔을까.
“너에게 말하기는 부끄러운 과거다만, 우리는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싫어했다. 덕분에 내가 가문을 이은 후로는 네 숙부와 고모들, 할머니들은 크라시우스를 떠나셨지.”
“그, 아버지께서 이으셨다면 오히려 가문에 남아도 되는 거 아닙니까?”
“남기에는 좋은 추억이 없었다. 차라리 정략으로 맺어진 가문에서 신세를 지는 게 낫다고 판단할 정도로.”
안타까운 말이라 절로 탄식이 나왔다. 사랑이 아닌 정략으로 이어진 가문을 택하다니, 대체 얼마나 크라시우스가 지옥 같았으면.
“실제로 그 뒤로 우리는 어떠한 교류도 없었다. 그저 살아있다는 것만, 각 가문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만 알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일입니다.”
“허나 그 대우는 그냥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말씀하신 아버지는 안타까움이, 씁쓸함이, 죄책감이 담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그들이 크라시우스와 손을 잡은 건 이득을 위해서다. 네 숙부들과 고모들을 대우하는 건 그들이 크라시우스와 맺어진 증거이기 때문이다. 헌데 상처를 간직한 동생들이 크라시우스를 외면한다고, 맏이인 나조차 동생들을 외면하면 어찌 되겠느냐.”
“괄시를… 받으셨겠지요.”
바로 예상할 수 있는 미래다. 가문과 가문의 정략혼은 결국 이득을 위해서, 상대 가문의 덕을 보기 위해서다. 그런데 상대 가문과 정략혼 상대의 연결이 끊어졌다? 사랑도 이득도 없는 상대가 어떤 대우를 받을지는 뻔하지.
“그래. 그렇기에 나는 맏이가 아닌 크라시우스의 가주로서 행동했다. 동생들과 접촉하지 않을지언정, 가주로서 정략으로 맺어진 가문들을 도와줬다.”
“지금은 괜찮은 겁니까?”
괜히 불안해졌다. 현시점에서 크라시우스의 사령탑은 아버지가 아닌 나다. 그런데 나는 나르젠 백작가가 고모의 가문인 것도 잊고 있었잖아. 다른 가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행히 네 존재 자체로도 그 가문들에게는 힘이 되는 것 같더구나.”
정말 다행인 얘기라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고,
“이제는 너도 선택을 해야 할 때지만.”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칼.”
“예, 아버지.”
“너는 이 아비를 마음에 두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예?”
생각보다 단호한 조언이라 당황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숙부들과 고모들을 향해 애틋함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동생들이 맏이에게 연락조차 주지 않아도 먼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크라시우스의 이름을 짊어진 자의 업보라는 것처럼.
“나는 너에게 부탁할 자격이 없다. 단호한 감찰을 부탁해도, 자비로운 판결을 부탁해도 모든 업보는 네가 짊어지겠지. 핏줄조차 잔인하게 쳐낸다는 공포를. 핏줄이라 감싼다는 비아냥을.”
“괜찮습니다. 감찰이 원래 욕먹는 자리지 않습니까.”
“그 원망과 증오는 오롯이 네 선택으로 받아야 할 것들이다. 은퇴한 아비의 말에 귀를 기울인 대가로 받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것들이야.”
이윽고 아버지는 내 어깨를 토닥이셨다.
“그러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이 아비는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걷거라. 나는 지난 세월 동안 동생들을 향한 도리를 다하였으니, 이제 아비의 도리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아주 희미하고 가냘픈 미소와 함께.
“…공명정대하게 처리하여 억울한 자가 나오지 않게 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아버지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셨다.
이게 내 최선이라는 걸 아시기에. 내가 선택한 길이라는 걸 아시기에.
‘제발 무고나 오해였으면.’
좋지 않은 예시지만 나르젠이 요룬처럼 모함을 받은 거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