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1)
묘비를 훑던 시선이 헤카테의 묘비에서 멈췄다. 혼자 나이를 먹기 시작한 지 2년이 흘렀는데 3년을 더 보내야 헤카테와 동갑이다. 그나마 여섯 중에서는 헤카테가 막내인데.
‘내가 이상한 거지.’
공무원 생활을 너무 일찍 시작했다. 정상적인 루트라면 작년이나 올해부터 시작해도 빠른 편으로 취급할 정도니까.
그렇게 한참이나 묘비를 바라봤다. 이제 돌아가야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 녀석들이 묘비로 반기는 꼴을 보기 싫어 기일이 아니면 오지 않는 편이지만, 막상 오게 되면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다. 사람 마음이 참 특이하지.
하지만 더 남아있어 봤자 뭐 할까. 이미 두 병이나 마신 상태라 내가 있든 말든 취한 상태로 뻗어있을 거다. 만약 멀쩡하더라도 내 꼴을 보면 유난 떨지 말고 꺼지라고 하겠지, 뻔하다.
‘내년에 보자.’
어쩌면 내년 기일보다 빨리 올 수도 있다. 그때는 맨손으로 올 테니 기대하지 말고.
그런데 진짜 더럽게 많이 뿌렸네. 조심스럽게 매만졌는데도 묘비를 만진 손바닥이 축축하다. 냄새까지 제대로 밴 것 같은데.
“우냐?”
“뭘 웁니까. 안 웁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뒤로 돌자 장관이 훅 치고 들어왔다. 잘못했으면 참배하고 웃는 사이코패스 될 뻔했네. 그래도 이 양반 나름의 위로 방법이니까. 오늘은 장관도 분노 바이러스가 잠잠해지는 날이다.
아무래도 나한테만 각별한 동료였던 게 아니라 장관에게도 각별한 부하들이었으니.
“부장님, 여기요.”
“고맙다.”
장관 뒤에서 눈치를 보던 1과장이 쪼르륵 달려와 손수건을 건넸다. 손이 너무 축축해서 털면서 왔더니 신경 쓰인 모양.
손을 닦으니 보랗게 물들어 버린 손수건을 돌려주자 1과장이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눈물 닦으라고 드린 건데 염색해서 돌려주면 어떡해요?”
“안 운다고.”
픽 웃음을 흘리며 1과장의 입술을 잡아당겼다. 잡기 좋게 내밀었으니 잡아달라고 과시한 거나 다름없지.
“으으으읍─!!”
얘는 매번 아파하면서 왜 매번 이럴까. 그 와중에 자기 울대를 만지며 만족스럽게 끄덕이는 2과장은 못 본 척했다. 너는 자업자득으로 처맞은 놈이.
“적당히 하고 가자. 쟤들 앞에서 폭력 상사로 자란 모습이나 보여줄 거냐?”
이 개판인 꼬라지에 장관이 태클을 걸었지만.
“그건 이미 장관 각하가 과장일 때 많이 봤을 겁니다.”
“이 새끼가.”
한 마디로 방어가 가능했다. 반박할 말이 없는지 먼저 발걸음을 옮기는 장관의 모습은 좀 인상적이었다. 애초에 내가 폭력 상사로 자랐으면 누굴 보고 배웠겠냐고.
그리고 문득 입술을 잡힌 1과장에게 시선이 갔다. 물론 얘네를 보고 독학한 것도 조금 있기는 한데.
“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래야지. 제도에 있어봤자 할 일도 없고.”
차장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장에게도 오전 중에 끝내고 돌아오겠다고 했으니 바로 아카데미로 가야지.
“부장님. 1과장 울 것 같습니다.”
“아.”
3과장의 말에 뒤늦게 1과장의 입술을 놔줬다. 놓아준다는 걸 깜빡했네. 워낙 촉감이 좋아서 한 번 잡으면 계속 잡게 된다.
“부장님은 부하를 더 아끼고 사랑하셔야 돼요.”
눈물이 맺힌 채 칭얼거리는 1과장의 말은 무시했다.
제도에 더 용무도 없으니 빠르게 아카데미로 귀환했다. 사실 오전 중에 아카데미에 귀환해도 할 일 없는 것 같지만, 제도에 오래 있을수록 예상 외 소환을 당할 확률만 높다. 괜히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부원들이 오자마자 에리히를 자리에 앉혔다.
“너 요즘 집에 연락 안 하냐?”
“어?”
원거리 기숙생활을 하는 학생이면서 가족한테 연락 한 번 안 하는 동생 덕에 형이 대신 안부를 전해야 하는 상황. 참담하기 짝이 없다.
“가주님이 안부 묻더라.”
가주라는 말이 나오자 몸을 흠칫 떠는 에리히. 얘가 예전부터 가주를 어려워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렇구나.
“가주님은, 뭐라고…?”
“너 잘 지내냐던데.”
“그게 다야?”
의심이 뚝뚝 흐르는 눈으로 되묻는 것이 ‘가주가 고작 안부 따위만 묻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도 가주가 안부 물을 때는 뭔 일인가 싶었지만 너도 그러는 건 좀.
‘나는 친부가 아니기라도 하지.’
물론 육체 자체는 확실히 가주의 피를 이은 가주의 아들이다. 하지만 그 안에 든 내용물은 가주와 남남이고, 4년 전에 크게 데인 것도 있어서 가주와 친한 편은 아니다. 그런데 사실상 유일한 자식인 너도 그러면 어쩌냐.
“더 있어.”
“역시.”
“무인에게는 빨리 가는 것보다 멀리 가는 게 중요하다고 전해달란다.”
그 말에 에리히는 더 아리송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평범한 안부 인사이자 염려 섞인 조언이었으니까.
정작 저택에서 가주는 나나 에리히가 어떻게 단련하든 목표로 삼은 수치에만 도달하면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와서 몸을 걱정하는 말을 하니 인지부조화가 올 수밖에.
“멀리 떨어져 있으면 연락 좀 하고 살아라. 제도에 있던 나도 한 주에 한 번은 연락했는데.”
“형이? 누구한테?”
“집사장.”
장난하냐는 눈빛은 조금 따가웠다. 아니, 솔직히 나도 가주나 어머니한테 직접 연락하기는 좀 어색해서.
“부친께서 엄격하신 것 같은데.”
형제의 가정사 얘기가 끝나자 조용히 있던 부원들이 슬쩍 다가왔다. 가볍게 웃으며 말을 건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류티스.
“살가운 분은 아니지.”
단호히 답한 에리히지만 사실 저것도 좋게 포장해서 말한 편이다. 엄격이라기 보다는 그냥 무뚝뚝과 무관심에 가까운 사람이니. 오늘 국립묘지에서 보여준 모습이 너무 이례적이라 그렇지.
“고문 선생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난 몇 년 전에 독립해서 기억이 안 난다.”
“하하, 그건 그렇겠군요!”
4년 전 공무원 생활과 함께 난 독립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애초에 가주에게 혈연의 정도 없어서 살갑고 엄격하고를 따질 생각도 없고.
“저는 남매가 많아서 부친의 관심을 받는 게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류티스는 위로 형만 둘에 누나도 둘 정도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심지어 동생들도 쭈르륵 있으니 많고 많은 자식 중 다섯 번째에 불과하지.
그런데 저렇게 말하니 아르메인 국왕이 자식을 홀대하는 냉혈한으로 들리잖아. 자식이란 놈이 아버지 평판을 위태롭게 만드네. 머리가 빨간색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불속성 효자였나.
아르메인 국왕은 정말 자식이 많아서 하나하나에게 줄 수 있는 관심이 적어서 그렇지, 나름 자식을 아끼는 군주로 유명한 양반이다.
“부황께서 아르메인 국왕의 반만 같으셨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갑자기 불러놓고 혼자 깡와인을 마시던 황태자의 말이라 기억한다. 결국 술에 제대로 취해서 황태자비가 어쩔 줄 몰라하며 달래던데, 그 자리에 나를 왜 불렀는지는 아직까지 의문이다.
아무튼 피바람과 냉기가 흘러넘치는 리브노만 황가에 비하면 로벤스 왕가는 화기애애하지.
“남매가 많다면 좋은 일 아닌가. 부담도 분산되겠군.”
“그건 그렇다만.”
삼남매 중 둘째인 라테르의 말에 류티스가 할 말이 없는지 머쓱하게 대답했다. 평범한 가문이라면 삼남매여도 무방하지만 왕가 입장에서 삼남매는 많이 위태롭다. 왕세자가 죽을 때 대체할 수 있는 왕자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물론 경우에 따라서 여럿이면 서로 죽이면서 숫자를 조절하기도 한다. 지금 입 다물고 있는 아인테르가 그런 집안의 예시고.
“오늘 주제는 집안 얘기입니까? 저는 할 말이 없어서 아쉽군요.”
두 왕자의 대담을 보던 타니안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동아리 시작과 동시에 가정사를 얘기해서 그런지 대화 주제도 그쪽으로 흐르는 기분이다.
“성자님 집안이 제일 대단하지 않나? 에넨께서 아버지신데.”
“하하, 그건 교리상 그렇지요. 저는 고아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하는 셀프 패드립에 류티스마저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대단하네, 쟤가 입 다물게 하는 건 진짜 힘든데… 애초에 강제 탈룰라를 시전한 꼴이 됐는데 입을 열 수 있으면 그게 더 미친 거지만.
졸지에 ‘너네 아버지 하늘 나라에 있어’를 한 꼴이 된 류티스의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왜 나를 봐, 나 할 말 없어.
슬쩍 시선을 돌려 외면하려고 했지만, 돌린 시야에 루이제의 어두운 표정이 들어오자 생각이 바뀌었다.
“가정사는 이 정도로 끝내지. 이러다 왕실 기밀을 듣게 되면 귀라도 잘라야 한다.”
“이런, 그것도 그렇지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판을 접으려는 내 말에 류티스는 이게 유일한 동앗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적극 호응했다. 딱히 도와줄 생각은 없었는데 이번만 도와준다.
“루이제?”
“아, 네, 네! 부르셨어요?”
루이제의 표정은 아직도 어두웠으나 내가 부르자 급하게 밝은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다, 나도 오늘은 정신이 없어서 잠시 잊고 있었네.
“마카롱 괜찮았는데 오늘도 만들어 줄 수 있어?”
“네! 금방 만들어 드릴게요!”
“그래, 부탁해.”
금방 어두운 모습이 사라지고 헤실거리는 것이 언제나의 루이제였다. 사정을 몰랐다면 내가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겠지.
‘알고 있는 놈이 신경 써야 했는데.’
미안한 마음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아마 이 세계에서 나이어드 가문 사람들을 제외하면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일 거다. 웹툰 무료분에 나왔던 내용이니까. 부원들이 아무리 루이제를 좋아해도 꼬꼬마 시절 루이제를 알 수는 없겠지.
당시 루이제는 단순히 가주를 꺼리고 두려워하는 에리히, 동복형이 죽었지만 이미 각오를 하고 있던 아인테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참사를 겪었다.
‘작가가 미쳤지.’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원작 작가는 미친 사람일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8살 꼬마한테 그런 시련을 줄 수가 없지.
하나뿐인 언니가 자기를 원망하고 죽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