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10)
로판 속 공무원 810화(811/945)
나는 좋은 아비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자라나는 중요한 시기에 제대로 된 사랑을 주지 못한 못난 아비였다.
좋은 남편 역시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정을 줘야 한다는 부인의 요구를 외면하고 크라시우스의 방침을 고집한 끔찍한 남편이었다. 나 자신도 그 방침 때문에 고통받았음에도.
그렇다고 좋은 아들도, 좋은 형이나 오라비조차도 아니었다. 타일글레헨 백작 빌헬름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크라시우스 가문의 빌헬름은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내가 더 유능했더라면.’
만일 내가 유능했다면, 아버지의 기대에 닿을 정도로 유능했더라면 모두가 행복했을 거다.
내가 유능한 놈이었다면 아버지는 훌륭한 후계자를 만들었다고 기뻐하셨겠지. 눈을 감는 그날까지 나를 언짢게 여기고 못미덥게 여긴 아버지니까.
아버지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면 동생들에게 아버지의 시선이 갈 일은 없었겠지. 장남인 내가 엉망이라 동생들을 후계자로 만들 생각도 하셨으니까.
허나 애석하게도, 아니면 다행스럽게도. 우리 일곱 남매 중에서는 그나마 내가 아버지의 선택을 받았다. 동생들을 상대로 이것저것 시험하던 아버지는 결국 나에게 집중하셨다.
‘어차피 그렇게 될 거라면 처음부터 내가 짊어져야 했는데.’
동생들은 내 부족함으로 인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었다. 차마 첫째로서 고개를 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가 크라시우스의 이름을 이어받았을 때. 동생들이 크라시우스를 떠나는 걸 막지 못했다. 이제 가문은 바뀔 것이라고, 앞으로는 제국백 가문의 일원으로 편히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외치지 못했다.
동생들은 그걸 알고 있음에도 크라시우스가 아닌 다른 길을 택했기에. 크라시우스에서 쌓아갈 즐거운 추억보다, 살아가면서 쌓은 끔찍한 고통이 더욱 짙을 것이기에.
그래서 내가 크라시우스의 가주가 된 후로는 동생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저 남편, 혹은 부인의 가문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과 자식까지 보았다는 소식. 그런 소식들을 들으며 만족할 뿐이었다.
“나르젠 백작가 말입니다만.그곳에서 작은 소란이 생겨서, 아무래도 감찰을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를 이어 크라시우스 가문의 가주가 된 칼. 동시에 감찰성 장관이라는 중책을 수행 중인 칼.
그런 칼에게서 막내 여동생의 가문이 감찰에 휘말릴 거라는 말을 들었다. 휴가 중인 칼이 직접 말할 정도라면 결코 작게 끝날 감찰은 아니겠지.
복잡한 심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칼에게 한 번만 눈감아줄 수 없겠냐고 부탁하고 싶었다. 아마 칼이라면 이 못난 아비의 부탁을 못 이기는 척 들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동생들에게 진 빚은 내 나름대로 갚기 위해 노력했다. 반면 칼에게 진 빚은 평생이 지나도 갚지 못할 빚이다.
‘그러니 막을 수 없었지.’
아비의 마음이 편하자고 아들을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다. 아들의 드높은 명예에 ‘혈육은 봐주는 물렁한 감찰.’ 이라는 비아냥을 끼얹을 수 없었다.
그래서 칼에게 모든 걸 맡겼다. 이 아비는 신경 쓰지 말라고. 네가 옳다고 여기는 길을 가라고.
“공명정대하게 처리하여 억울한 자가 나오지 않게 하겠습니다.”
부디 엘린이 공명정대한 판결 속에서도 무고한 사람이기를 바라며, 전부 칼의 판단에 맡겼다.
– 막내 고모와 제 사촌들은 전부 석방했습니다. 정보부가 몇번이나 검증해도 작은 혐의조차 없더군요. 아무래도 나르젠 내에서도 공직에 오른 자들만이 이번 일에 개입한 모양입니다.
다행히 그 믿음과 바람은 빛을 보았다.
부끄럽지만 칼의 연락을 받자마자 손이 떨렸다. 혹여나 엘린이 잘못되지는 않을까, 우리 부자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지는 않을까 두려웠었다.
그 우려가 순식간에 사라졌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내 동생과 조카들이 깨끗하다는데 어찌 기특하지 않을까.
– 그래서 말인데. 잠시 나르젠 저택으로 가보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말이냐?”
– 저택에 있는 가신들과 사용인들도 전부 잡아가서 아무도 없습니다. 딱 막내 고모와 사촌들만 있을 테니, 몰래 만나고자 한다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다만 기쁨은 잠시, 칼의 제안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엘린을 찾아가도 될까? 거의 20년은 보지 못한 아이를 이제야 보러 가도 괜찮은 걸까? 그것도 가문이 뒤흔들려 마음이 복잡할 시기에?
망설여졌다. 가문의 위기니 이참에 위로를 해야 한다는 마음, 무슨 낯짝으로 엘린을 찾아가냐는 마음이 공존했다.
– 정보부의 말을 들어보니, 고모께서 저와 크라시우스의 명예를 더럽힐까 우려가 많으셨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그만큼 저희와 선을 긋는 것이라 볼 수 있으나, 반대로 생각하면 저희의 명예를 생각할 만큼 애정과 관심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
– 이번 기회에 가십시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두 번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칼의 설득에 점점 마음이 기울어졌다. 20년 정도의 세월 동안 참았던 마음이 꿈틀거렸다.
정말 지금을 놓치면 다시는, 누군가가 죽기 전까지는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갔다. 체면을 잠시 내려두고, 민망함을 내던지고 나르젠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큰 오, 라버니…?”
“오랜만에 듣는 말이구나.”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엘린과 마주할 수 있었다.
내 가족과. 내 동생과. 그 뒤에 있는 내 조카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히 찾아온 것이다.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면 벌써 아득하니, 쫓아내지 말고 대화를 해줄 수 있겠느냐?”
조심스러운 부탁에 엘린은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사용인들이 없어서 차는 제가 직접 우려야 합니다.”
“오히려 좋다. 네가 우린 차는 얼마 만에 마시는 건지.”
그 말과 함께 엘린 뒤에 있는 조카들을 보자, 조카들은 움찔하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우리 아이들보다 다소 어린 외견. 실제로도 저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보다 어린 걸로 기억한다. 그런 아이들이 감찰성에 끌려가는 경험을 하게 되다니. 나르젠 백작가가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구나. 빌헬름이라고 한다. 너희한테는 큰 외숙부지.”
“조, 존함은 익히 들었습니다. 두 차례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신 명장이시라고…”
아이들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아이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기특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인사를 하는 걸 보면 심지가 굳은 아이야.
“아이들은 방으로 올려 보내겠습니다.”
“그러려무나. 많이 놀랐을 터이니 쉬게 해야지.”
엘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조카들과도 대화를 나누고 싶었으나, 한 번에 많은 걸 탐내지는 말자. 지금은 엘린과 마주한 걸로도 만족해야 한다.
***
고요한 접견실에서 나와 큰 오라버니, 이렇게 둘만이 앉아 서로를 바라봤다.
“차는 입에 맞으십니까?”
“좋구나. 어릴 때 마셨던 그 맛이야.”
그 말에 조용히 찻잔을 매만졌다. 크라시우스 가문에서 내가 즐겼던 유일하다시피 한 취미가 찻잎을 모으고, 차를 우리는 거였으니. 가족들에게 차를 우려주며 맛을 평가받는 것이었으니.
“고생이 많았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큰 오라버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였습니다. 어찌 당연한 일을 고생이라 하겠습니까.”
“네가 무고하다는 건 들었다. 너는 크라시우스라 덕을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크라시우스이기 때문에 피해를 본 것이다. 칼과 아무런 연이 없었다면 보여주기식으로 구금되지도 않았을 테니.”
정보차장에게 들었던 말과 비슷하여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그 말이 조금, 아주 조금은 기꺼웠다. 내가 크라시우스 가문의 현 가주를 위하여 무언가를 했다는 말이니까. 아버지께 듣던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아닌, 크라시우스를 위해 희생양이라도 되었으니까.
“네 조카가 미안하다고 하더구나. 동시에 크라시우스의 명예와 감찰성의 체면을 살려줘서 고맙다고도 했지.”
“저는 크라시우스가 아닌 나르젠입니다. 그분과 아무런 연이 없는데, 어찌 남들과 다른 처우를 바라겠습니다. 그저 순리에 순응했을 뿐입니다.”
“고집은 여전하구나.”
미소 짓는 큰 오라버니의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큰 오라버니는 과거에도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아버지의 요구에 따라 감정을 억눌렀었지. 웃을 시간에 조금이라도 검을 휘두르고, 책 한 권을 더 읽었었지.
“놀랐느냐?”
“제가 아니라 다른 오라버니와 언니들이었어도 많이 놀랐을 겁니다.”
“슬픈 말이구나. 가족의 웃음이 놀라운 것이라니.”
그렇게 말한 큰 오라버니는 다시 차를 마셨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따스한 눈빛으로.
“나도 너처럼 고집이 강했다. 크라시우스의 핏줄은 참으로 진했지.”
마치 어린 동생을 달래는 듯한 자상한 목소리.
낯설다. 큰 오라버니가 아버지에게서 우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건 안다. 우리가 크라시우스를 떠난 후로도 우리의 입지를 위해 노력한 것을 안다.
그러나 이렇게 살가운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음은 아버지와 닮지 않아도, 겉으로는 누구보다 아버지스러웠던 큰 오라버니였다.
“그 고집은 소중한 걸 잃기 직전에서야 꺾이더구나. 내 자식이 죽을 위기에 처하고 나서야 겨우 꺾였어.”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감찰성 장관인 그분을 말하는 거겠지. 그분도 큰 오라버니처럼 두 차례나 종군했으니.
“허나 그때 꺾였다고 생각한 고집은 아직도 굳건했었다. 자식들을 향한 이상한 고집은 꺾었으나, 동생들을 향한 고집은 여전했어.”
큰 오라버니의 손이 어느새 내 손을 감쌌다.
이 역시 놀라운 일이다. 웃지도 않던 큰 오라버니가 손은 잡았겠나. 이 광경을 다른 오라버니들과 언니들이 본다면 기겁을 할 거다.
“나는 지금까지 너희를 위해 침묵하고 살았다. 너희가 크라시우스를 싫어하니, 부디 새로운 터전에서 행복하기를 바랐다.”
“큰 오라버니의 배려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고맙구나.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나는 너희의 형이자 오라비로서 너희를 보듬어야 했다. 너희를 방치하는 게 아니라 다독여줘야 했다.”
“그럴 필요는─”
“칼이, 내 아들이 나르젠 가문에 대한 감찰을 얘기했을 때. 혹시 너를 잃는 건 아닐까, 네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걱정했단다. 앞으로 너에 대한 소식도 듣지 못할까 두려웠지.”
과한 걱정이다, 라고 딱 잘라서 말할 수 없었다.
비록 나는 스스로에게 떳떳하나, 감찰이라는 것은 나에게 자신 있다고 순조롭게 풀리는 일이 아니다. 나도 모르는 이유 때문에 내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었다.
“엘린. 나는 아들을 잃을 뻔한 것처럼 동생도 잃을 뻔했다. 20년 동안 너와 마주하지 않은 것이 너무나 후회됐어.”
내 손을 잡은 큰 오라버니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다시 그 후회를 느끼고 싶지 않다. 지난 20년처럼 멀리서 지켜보고만 싶지 않다.”
“큰 오라버니.”
“그래. 내가 네 오라비다. 우리는 영원히 갈라질 수 없는 가족이야.”
잠시 눈을 감았다 뜬 큰 오라버니는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당장 평범한 가족처럼 지내자는 건 아니다. 그저 편지라도 나누고, 통신구로 연락도 해보고, 기회가 되면 얼굴도 보고, 식사도 하고. 조금씩 너와 가까워지고 싶구나.”
다른 다섯 명도 말이다.
그렇게 덧붙인 큰 오라버니는 양손을 거두더니, 어색히 헛기침을 했다.
“20년 동안 맏이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너희를 방치했다. 그러니 나는 20년이 아닌 40년이라도 너희를 기다리마. 너희가 나를 웃으며 만날 수 있는 날을.”
“40년이면… 큰 오라버니가 없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조금은 일찍 마음을 열어주면 좋겠구나. 그날이 온다면 네가 좋아하던 치즈 케이크를 잔뜩 들고 찾아가마.”
그 말에 무심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오라버니.”
“말하려무나.”
“치즈 케이크를 좋아하던 건 둘째 언니입니다.”
“뭣.”
“전 치즈 쿠키를 좋아했지요.”
좌우로 떨리는 큰 오라버니의 눈동자를 보니 피식피식 계속 웃음이 새어 나왔다.
케이크를 틀린 걸 서운하다고 해야 할지. 치즈라도 맞힌 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큰 오라버니는 여전히 코냑을 좋아하십니까?”
“그건 둘째다. 난 위스키를 자주 마셨지.”
“아.”
나도 다를 건 없었구나.
***
14개 가문을 동시에 감찰하는 것이지만, 황제의 승인과 사법성 장관의 적극적 지지 덕에 금방 감찰은 순식간에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다.
“14개 가문이 부당하게 쌓은 재산은 국고로 환수하였으며, 모든 공적 직책에서 해임하였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게 끝냈군. 노고가 많았네.”
“황송하옵나이다.”
황제의 치하에 덤덤히 고개를 숙였다. 이번 감찰은 황제의 배려 덕에 수월히 진행한 것이기도 하니까.
“이번에 해임된 자들은 5년 동안 관직에 진출할 수 없도록 조치하도록 하지. 다만 해임된 자들 외에 다른 가문원들은 해당하지 않으니, 고의로 막지는 말게.”
“실로 현명하신 판단이옵니다.”
“그럼 나가 보게. 신년하례식 때 다시 보지.”
“예, 폐하.”
황제의 축객령에 재빨리 물러났다. 괜히 얼쩡거리면 황제가 다른 퀘스트를 줄 것 같았고,
“아버지. 접니다.”
나르젠 저택으로 가셨을 아버지의 근황이 궁금했으니까.
– 칼? 미안하구나. 지금은 좀 바빠서, 이따 내가 연락 주마.
“예?”
– 지금 네 막내 고모와 잠시 외출을 나왔다. 카페에 들렀다가 바에도 가야 해서,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
“예?”
아버지가 먼저 연락을 끊으실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지.’
대체 황제한테 보고하는 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