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11)
로판 속 공무원 811화(812/945)
나르젠 백작가를 포함한 14개 가문 감찰. 사법성과 법원에 걸친 광범위한 감찰은 때아닌 인사 발령을 일으켰다.
‘이 정도면 새해 선물이네.’
본래 11월 말에서 12월 초 정도면 이듬해 승진 명단, 직책 이동 명단이 나온다. 그렇기에 승진이 좌절되거나 요직 이동에 실패한 자들은 술로 연말을 보내나, 올해 사법계만큼은 씁쓸함의 건배가 아닌 환호의 건배를 하게 됐다.
이번에 칼춤을 당한 가문들은 무려 명가라 불리는 가문들이었다. 그만큼 가문 구성원들이 차지한 직책은 많고도 중요했는데, 그 자리가 일제히 비었다? 심지어 정상적인 퇴직이 아니라 급히 자리를 채워야 돼?
들리는 얘기로는 사법성 장관의 집무실과 저택은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물먹은 줄 알았던 승진 기회, 요직 이동 기회가 사법성 장관의 손에 달렸으니.
‘이렇게 관심 못 받은 감찰은 처음인데.’
픽 웃음을 흘리며 최종 감찰 보고서를 확인했다.
감찰이 몸을 일으키면 피가 흐르는 법. 덕분에 감찰이 진행 중일 때는 내 일거수일투족이 주목받는다. 과연 어디까지 박살이 날지 계산하면서, 혹여나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나 않을지 걱정하면서.
허나 이번 감찰은 이전과 달랐다. 솔직히 사법계의 부패는 일반 귀족들과 거리가 먼 이야기잖아. 같이 돈을 만지기에는 전문성이 필요한 일이니까. 오히려 사법 명가 놈들에게 돈을 뜯기면 뜯겼지, 같이 벌 일은 적다.
그래서인지 이번 대규모 사법 감찰에 대해 일반 귀족들은 낄낄거리며 구경만 했다. 저 양아치 새끼들 저렇게 될 줄 알았다고.
‘같은 사법 귀족들도 공포보다는 탐욕에 눈이 돌았지.’
그나마 동요해야 할 사법계는 때아닌 깜짝 승진 기회에 그저 기뻐했다.
솔직히 조금 씁쓸했다. 난 이번 감찰에 진심이었는데… 막내 고모와 사촌들을 해칠 각오를 하며 칼을 뽑은 건데…
“나르젠은 제외했어도 아무도 몰랐겠네.”
절로 실소가 나왔다. 씁쓸한 중얼거림이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욕망에 충실한 사법계 놈들이 밉다. 내 고심을 알아주지 못하는 야속한 것들이 밉다.
그래도 연말이 나름 조용히 끝나서, 막내 고모와 사촌들이 건강히 풀려나서 다행이다…
신년하례식은 예년과 다를 거 없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평온한 분위기를 위해 나, 사법성 장관, 황제가 광속으로 감찰을 진행했었지.
“누우나! 누나!”
“져쪽으로 가고시퍼?”
“우웅!”
“죠아!”
그 보답이라고 해야 할지, 황자를 품에 안고 신년하례식 장소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황태녀를 볼 수 있었다.
뿌듯하다. 아직 감찰이 진행 중이었다면 신년하례식 분위기가 다소 무거웠을 거다. 그랬다면 황태녀와 황자가 해맑게 돌아다니지 못했을 터. 어른들의 노력이 아이들의 웃음을 지켰다.
“때부!”
“댜부!”
“전하. 뛰시면 위험합니다.”
이윽고 나를 발견하여 오도도 달려오는 황태녀. 그런 황태녀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안아 올리자, 황태녀와 황자는 꺄르르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보니 황자도 1년 사이에 많이 자랐구나. 걷는 건 무리인 것 같지만, 기어다니거나 간단한 단어는 충분히 말하고 있다.
“오, 며칠 사이에 많이 크셨군요.”
“진쨔!?”
“예. 전보다 조금 묵직해지셨습니다.”
전에 안았을 때보다 확연히 느껴지는 무게감. 황자가 황태녀 품에 있는 걸 고려해도 결코 적지 않은 묵직함이다. 역시 이 시기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구나.
“그럼 전하. 다시 내려드릴까요?”
“아냐! 깨속 안아져! 까롤루쑤한태 노픈곳 보여줄래!”
“알겠습니다.”
황태녀의 소소한 바람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부인들은 각각 자신의 본가, 혹은 동료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흩어졌다. 어차피 홀로 남아서 할 일도 없었으니 황태녀와 황자를 위한 임시 가이드가 되는 것도 괜찮겠지.
게다가 황태녀, 황자를 안고 있으면 감히 다른 귀족들이 다가오지 못한다. 황족과 안면을 트는 건 귀족으로서 영광스러운 일이나, 그 황족이 꼬꼬마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막말로 꼬꼬마 마음에 거슬려서 미움을 받으면 곤란하니까.
“전하. 저기 외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 전승공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자신한테 몰리는 귀족들이 귀찮기라도 한 듯, 상당히 구석에 숨어 있던 전승공을.
“외하라부지! 볼래!”
“아우!”
아이들의 열렬한 외침을 들었는지, 우리에게 뒤통수를 보이고 있던 전승공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황태녀와 황자를 보자마자 온화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었다. 외손주들을 향한 외할아버지의 사랑은 공작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전승공을 향해 다가가다가 움찔하고 말았다.기둥에 가려져서 몰랐는데, 첫째 장인어른도 함께 계셨─
“아, 장관도 왔군.”
‘뭐야.’
첫째 장인어른 몸에 가려져있던 황금공도 눈에 들어왔다.
다섯 공작 중 셋이나 구석에 모여있던 기적의 상황. 딱 봐도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도망칠까?’
지금이라도 황태녀 내려놓고 튈까?
아냐, 황태녀를 제물로 바치면 괘씸죄 때문에 한 대 맞을 거 다섯 대로 늘어날 거다. 게다가 이미 셋의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도주는 무리일 거고.
“너도 온 김에 같이 듣거라.”
“아, 예.”
장인어른의 부름에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
옛 시대가 지나고 새로운 시대가 다가왔다.
아들 녀석에게 실권을 넘긴 때부터 느낀 진실이나, 근래 들어 더욱 절절하게 느끼고 있다. 나 같은 늙은이들의 시대는 아득히 지났다고.
‘폐하께서도 물러 나셨지.’
30년 동안 제국을 이끌고 대륙을 호령하신 폐하. 그런 폐하께옵서도 제위에서 물러나셨거늘, 어찌 새 시대가 오지 않았다고 부정하랴. 나 같은 구 시대의 상징이 어찌 자리를 지키랴.
부끄럽게도 상황 폐하보다 오래 공작위를 지켰고, 나이도 상황 폐하보다 많다. 사실 물러난다면 진즉에 물러나는 것이 옳았다. 그저 황위 계승 분쟁의 소란이 끝날 때까지만, 우리 마르가 혼인할 때까지만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어느덧 공작 중 공식 최고령이 될 정도로 말이다.
‘이제 나도 물러날 때가 됐다.’
실권을 물려주는 수준을 넘어서, 실질적인 은퇴를 넘어서 완전한 은퇴. 작위조차 자식에게 물려주는 공식적인 백수 생활.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그래도 우리 막내 손주에게 이 외할아비가 공작인 것을 보여주었으니, 나름 괜찮은 버팀이었다.
“이제 물러날까 하오.”
그래서 신년하례식이 열린 김에 내 은퇴 결정을 넌지시 말했다. 물론 폐하께 정식으로 청하기 전, 같은 공작인 전승공에게 먼저. 공작의 은퇴는 공작끼리 상의하는 게 도리이니.
아들 녀석한테는 미리 말할 필요가 없을 거다. 이미 공작의 업무를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중이잖나. 내가 완전히 물러나도 딱히 달라지는 건 없다. 기껏해야 신년하례식처럼 작위 귀족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 정도겠지.
“은퇴할 생각이오?”
아무튼 내 발언에 전승공은 잠시 침묵하더니, 덤덤히 입을 열었다.
“실로 아쉬운 일이나, 말린다고 듣지는 않겠지.”
“심사숙고한 결과니까. 나는 이제 물러나는 게 옳소.”
“옳다라. 옳고 그름을 가릴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존중하겠소.”
다행히 전승공은 만류나 질타를 하지 않고 순순히 내 뜻을 이해해 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같은 동지가 난색을 표하면 곤란했을 터이니. 그 곤란을 외면하고 내 뜻을 강행하는 건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늙은이의 고집이니.
그렇게 전승공과 은퇴를 논하던 중, 지나가던 황금공까지 참여하였고,
“너도 온 김에 같이 듣거라.”
“아, 예.”
때마침 황태녀 전하와 황자 전하를 돌보던 막내 사위 녀석까지 왔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괜찮은 조합이다. 공작 셋에다가 폐하의 최측근인 사위까지라. 늙은 공작의 은퇴를 논하기에는 오히려 과분한 수준이다.
전승공, 황금공에게 했던 말을 다시 들려주자 사위 녀석이 기겁을 했다.
“자, 장인어른. 은퇴라니요. 아직 장인어른은 정정하시지 않습니까?”
그 와중에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낮추는 것을 보니, 놀란 와중에도 기밀을 지켜야 한다는 본능이 치솟은 모양이다.
만족스럽다. 폐하의 명을 받아 감찰을 수행하는 장관이라면 사적인 감정보다 이성을 중시해야지. 만일 이 녀석이 호들갑을 떨었다면 공작으로서의 마지막 일정을 사위 꾸짖기로 썼을 거다.
“정정하기는. 내 나이를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느냐? 과장 좀 보태면 내 나이가 곧 백이다.”
“너무 과장이십니다…”
“너는 나보다 몇 배를 과장해도 백은커녕 쉰에라도 도달할 것 같으냐? 애초에 상황 폐하께서도 물러나셨거늘, 내가 아직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옳지 않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자들이 이끌어 나가야지.”
그 말에 사위는 전승공과 황금공을 바라봤다.
이 괘씸한 놈. 이참에 공작들은 전부 물러나라 이건가?
“장관. 난 아직 은퇴할 생각 없으니 그렇게 보지 말게.”
“나도 마찬가지일세, 칼 군.”
“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두 공작의 농담에 사위 놈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꿈틀거리던 주먹을 다시 풀었다. 빠르게 사과했으니 방금 전 무례는 넘어가자.
“아무튼 내 뜻에는 변함이 없다. 그동안은 마지막까지 지켜봐야 할 것이 많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더 이상 제국은 공작 하나의 손이 필요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이럴 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다.”
현 황제 폐하와 죽은 2황자 사이의 계승 분쟁. 북방 유목민들의 소란. 늦둥이인 마르의 혼인 등. 공작으로서 마지막까지 지켜보고자 한 일들이 전부 끝났다. 이 이상 욕심을 가진다면 죽을 때까지 공작위를 차지하는 걸 넘어, 감히 불사를 꿈꿀 수 있다.
그건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하고도 추한 일이다. 바렌티 공작가와 제국을 위해 헌신한 내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는 여정을 그딴 식으로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다.
“…장인어른이 아닌 다른 울켄 공작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리처드가 들으면 섭섭해할 말이로군. 그 녀석이 내 후계자로 지낸 세월도 수십 년이다. 그 녀석만큼 준비된 차기 공작도 없어.”
연신 단호한 대답을 돌려주자 그제야 사위 녀석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나를 말리지 않겠다는 듯이.
사실 이 녀석이 계속 말려도 달라지는 건 없다. 내가 은퇴하겠다는데 네가 뭐 어쩔 거냐.
난 이제 철혈공이 아닌 올리버로 살 것이다. 우리 귀여운 외손자 페디의 재롱을 보고, 조만간 태어날 나르의 옹알이를 들으며 지낼 거다.
‘그게 노인의 특권이지.’
어린아이들과 놀아주며 함께 웃는 것. 이보다 멋진 권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