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12)
로판 속 공무원 812화(813/945)
첫째 장인어른의 은퇴 결정은 철저히 함구하기로 했다.
장인어른께서도 새해부터 소란스러워지는 걸 원치 않으실 것이며, 은퇴하기도 전에 은퇴 소식이 퍼지면 온갖 귀족들이 몰려와 진의 여부를 확인하려고 할 거다. 자유를 얻기 위해 은퇴를 결정하신 걸 텐데, 은퇴 직전까지 귀찮음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장인어른의 은퇴로 소란스러워도 되는 건 은퇴 직후뿐이다. 수십 년 동안 제국을 위해 헌신한 노장의 은퇴를, 새로운 공작의 탄생을 축하하는 연회. 그때만이 제국이 온 마음을 모아 축하하며 박수를 칠 것이다.
“때부.”
“예, 전하.”
“은때가 모야?”
“우웅.”
허나 장인어른을 비롯하여 나, 전승공, 황금공은 함구를 다짐하였으나, 이 자리에는 차마 귀족 따위가 막을 수 없는 입이 둘 존재했다.
아니, 정확히는 하나가 존재했다.
‘어쩌지.’
황태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입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 은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 대하여 누구보다 완벽히 설명할 자신이 있으나, 내 주관이 너무 많이 깃들 것 같아 조심스러워진다.
은퇴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성스러운 행위라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갈망해야 할 개념이라고 설명할 것 같으니까.
‘안 돼.’
그건 곤란한 일이다. 부모님의 말, 대부의 말이면 그대로 흡수하는 황태녀다. 그런 황태녀에게 ‘은퇴 = 인생의 진리이자 종착점’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건 곤란하다.
까딱 잘못하면 차기 황제를 탈주 닌자 예비군으로 기를 수가 있다.제국의 모든 것, 대륙의 모든 것을 짊어져야 할 황제에게 책임감이 아닌 자유로움을 심어줄 수 있다.
“은퇴는, 말입니다…”
슬쩍 세 공작을 바라봤다. 나보다 긴 세월을 살아온 노련한 귀족들이며, 자식을 넘어 손주들까지 본 가장들이다. 아이의 순수한 질문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충분히 알지 않겠나.
허나 나와 눈이 마주친 공작들은 너도나도 시선을 피했다. 네가 알아서 대답하라는 것처럼.
‘망할.’
이 야박한 사람들. 그러고도 당신들이 제국의 공작이냐.
물론 공작이니까 감찰성 장관의 간절한 시선을 외면할 수 있는 거다. 공작이 뭐가 아쉬워서 남을 도와주고자 사지로 걸어올까.
“…전하. 술래잡기는 아시지요?”
“웅! 어제도 뻬디랑 해써!”
“술래가 열심히 돌아다녀야 하는 것도 아시고요.”
“웅! 나! 엄쳥 뛰어다녓써!”
처절한 술래 생활을 생각하자 심통이 났는지, 섭섭함과 분노가 가득한 황태녀의 표정에 웃음이 터졌다.
그 와중에 황자도 누나를 따라 하듯 아주 조금 성이 난 표정을 지었다. 하여간 남매 사이가 좋은 것 같아 다행이야.
“은퇴는 그 술래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겁니다. 한 사람이 계속 술래를 하면 힘들지 않습니까.”
아무튼 술래의 고통에 제대로 이입을 한 듯하여 적당히 둘러댔다.
은퇴는 길고 긴 시간 동안 홀로 술래로 지내온 사람이 그 역할을 벗는 것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술래 자리를 양보하고 편히 쉬는 행위라고.
이러면 은퇴에 대한 무조건적인 갈망과 환상은 피하되, 그 의미는 대략적으로나마 설명할 수 있다. 공작위든 술래든 타인에게 넘기면 은퇴지 뭘.
“그런거야?”
“예, 전하. 여기 계시는 페디의 외할아버지는 오랜 시간 술래를 했습니다. 그럼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술래를 시켜야겠지요?”
“마쟈! 혼자 오래 하면 힘드러!”
예상보다 더욱 격렬한 공감에 쓴웃음이 나왔다.
페디야. 황태녀한테 적당히 잡혀주지 그랬니. 얼마나 진심으로 피해 다녔으면 이렇게 뿔이 났어.
“빨간 하라부지! 고생 마나써! 이제 안뛰어두대!”
“프흣.”
그리고 황태녀의 위풍당당한 위로에 황금공은 웃음을 흘렸다.
사실 나도 반사적으로 나오려던 웃음을 겨우 참았다. 술래를 예시로 들기는 했는데, 정말 장인어른이 술래로 뛰어다닌 줄 알고 있다. 어린아이의 상상력은 순수하기도 하지.
‘저 덩치에 술래라.’
문득 장인어른이 술래로 쫓아오는 술래잡기를 상상했다.
2M에 이르는 근육질 무인이 쫓아오는 추격전. 길고 긴 술래에 분노한 얼굴로 쫓아오는 장인어른.
‘어후.’
반사적으로 나오려던 웃음이 도로 가라앉았다. 상상만 해도 공포스럽네 그거.
“감사합니다, 전하. 전하께서 친히 이 늙은이의 공로를 다독여주시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다행히 장인어른은 황태녀의 말에 당혹감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수많은 자식들과 손주들을 상대로 단련된 노련함은 황태녀 앞에서도 굳건했다. 황태녀의 기습에도 아무런 동요가 없잖아. 나였다면 안면 근육이 고장 나거나 한참은 입을 열지 못했을 텐데.
‘확실히 경험은 무시할 수 없구나.’
내 나이의 3배 정도는 살아온 장인어른. 아무리 내가 육아 경험자라 으쓱거려도 장인어른 앞에서는 보름달 아래의 반딧불이에 불과했다.
“참, 전하. 방금 얘기는 아무한테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웅? 왜?”
“여기 빨간… 할아버지 다음 술래가 몰래 잡아야 할 사람들이 있거든요. 술래가 바뀐 걸 알면 몰래 잡지 못하니, 마지막까지 숨겨야죠.”
“웅! 알겟써! 비밀!”
내가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설득이었지만, 황태녀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고 했으면 됐다. 황태녀가 고집은 조금 세도 거짓말을 하거나 약속을 어길 아이는 아니다.
“칼 군도 능숙한 아빠가 다 됐군. 이거 외손녀를 뺏긴 것 같아 질투가 날 정도야.”
“그러게나 말이오. 이거 누가 전하의 가족인지 모르겠소.”
“남의 딸을 훔쳐 가더니. 이제는 외손녀도 가져간단 말이냐.”
전승공의 말에 장인어른과 황금공도 픽 웃음을 흘렸다.
졸지에 도둑놈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오묘했다.
***
올해 신년하례식은 별다른 소란 없이 끝났다. 작년 연말에 나름 큰 소란이 있었으니, 새해 연초는 조용히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다.
분명 그럴 것이라 생각했었다.
“은퇴라 하였소?”
“예, 폐하. 부끄럽게도 소신은 늙고 우둔하여 더 이상 폐하를 보필할 수 없사옵니다.”
신년하례식 마지막 날. 은밀히 독대를 청한 철혈공은 공작위에서 물러나는 걸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더 이상 황제를 보필할 정도의 활력과 총명함이 없다면서.
안타깝고 아쉬운 말이나 말릴 수 없었다. 오히려 철혈공은 나와 상황 폐하의 바람보다 오래 자리를 지켜주었으니까. 진즉에 물러나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비록 후계자에게 실질적인 업무와 권한을 다수 넘겨주었으나, 그래도 공작가의 얼굴이자 제국의 기둥은 여전히 철혈공이었다.
“공이 늙고 우둔하다면 이 제국에서 젊고 총명한 귀족이 얼마나 있겠소. 또한 공의 존재만으로 동부의 열국들은 제국을 두려워하고,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거늘.”
“어찌 그들이 소신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소신은 위대한 황실과 제국을 대신하여 무도한 자들을 벌하였을 뿐이니, 그들은 검이 아닌 그 검을 든 폐하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철혈공의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철혈공이 이렇게 나온다면 만류할 수도 없다. 철혈공의 은퇴를 막고자 했다면 실권을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것부터 막아야 했다.
그러나 상황께서는 철혈공의 은퇴 준비를 받아들이셨었다. 긴 시간 제국을 위해 헌신한 공작을 위해. 동시에 막강한 권위를 자랑하는 공작을 슬슬 물러나게 하기 위해.
“오늘날 대륙인들은 감찰성 장관을 대륙 제일이라 칭하나, 짐과 상황 폐하는 젊은 적의 공 또한 대륙 제일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잘 알고 있소. 그 무력을 황실과 제국을 위해 써주어 고맙소.”
“필부의 작은 재주를 높게 평가해 주셔서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작은 재주라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장관이 대륙 제일의 검이라면 철혈공은 대륙 제일의 무인이었다. 무기를 가리지 않고, 심지어 맨손으로도 적들을 분쇄하는 최강의 무인. 그것이 작은 재주면 큰 재주는 무엇일까. 상상만 해도 두려운 일이다.
“공의 이름은 제국이 영원히 기억할 것이오. 열여덟 번째 울켄 공작이자,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원인 올리버 바렌티를.”
“크펠로펜의 올리버로 살아올 수 있어 영광이었나이다.”
철혈공을 향한 마지막 덕담에 철혈공은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수십 년 동안 제국을 지탱한 기둥 중, 철혈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되었다.
‘후계자는 리처드 바렌티였지.’
대제께서 보우하셨는지, 다음 울켄 공작이 될 리처드 바렌티는 훌륭한 인재다. 지난 세월 동안 철혈공을 대신하여 바렌티 공작가와 울켄 공작령을 잡음 없이 이끌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게다가 철혈공의 슬하의 첫째이자 유일한 아들이라서 그런지, 부친의 무재도 짙게 물려받았다.물론 남매 중 짙게 물려받았다는 거지 철혈공 수준이라는 건 아니지만.
‘철혈공 수준의 무인이 연달아 나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어차피 이제는 무력이 필요한 난세가 아닌, 행정 능력이 절실한 치세다. 심지어 리처드 바렌티보다 훨씬 젊은 대륙 제일 검이 제국의 귀족 아니던가.
그러니 기쁜 마음으로 열아홉 번째 울켄 공작을 맞이하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철혈공이 물러간 것도 벌써 몇 시간 전의 일이나, 나는 아직도 공작위 양위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새 칭호는 어떻게 지어야 하지?’
바로 새로 등극할 울켄 공작의 칭호. 한 번 정하면 그 공작이 평생 간직해야 할 두 번째 이름을 정해야 하기 때문에.
공작의 칭호를 정하는 방식에는 정해진 관습이나 전례라고 할 것이 없다. 그저 당대 황제가 새로운 공작의 성향, 능력을 고려하여 임의로 정하는 것이다. 차라리 명확한 법적 근거가 있으면 편했을 텐데 말이야.
‘전승, 철혈, 마종, 황금, 현명.’
우선 현 다섯 기둥의 칭호를 떠올렸고,
‘투쟁, 혈검, 설검, 청해, 정의.’
뒤이어 에이만카 대제를 보필한 다섯 1등 공신들을 떠올렸다.
무려 공작의 두 번째 이름이다. 그 위엄을 드높여야 하는 이름이니 허투루 지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전에 있었던 이름을 중복해서 짓는 것도 최대한 피해야 한다. 공작의 이름이 겹치는 건 성의가 없어 보이니까.
‘암군들도 공작의 이름만큼은 잘 지었다.’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제국을 망국의 위기에 몰아넣었던 직계 막바지의 황제들도 공작의 이름은 아무런 논란 없이 지었다. 그 암군들보다 못한 황제가 될 수는…
‘아.’
울켄 공작령이 제국 동쪽에 있다는 것이, 리처드 바렌티가 내 재위 기간 중 처음으로 공작위에 오른 인물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마침 리처드 바렌티는 딱딱하기보다 유순하고 쾌활한 성품이라고 하던가? 그렇다면 방금 떠오른 칭호를 붙이기에 딱이다.
***
신년하례식이 끝나고 1주 후. 황실에서 발표한 내용은 제국을 뒤흔들었다.
[ 열여덟 번째 울켄 공작이자 바렌티 가주, 올리버 바렌티 오브 울켄의 뒤를 이어 리처드 바렌티가 열아홉 번째 울켄 공작이자 바렌티 가주가 되었다. ]수십 년 동안 제국을 지탱한 기둥이 교체되었다는 충격적 소식.
[ 에이만카 17세의 이름으로 열아홉 번째 울켄 공작인 리처드 바렌티 오브 울켄에게 여명(黎明)의 이름을 하사한다. ]현명공에 이어 실로 오랜만에 새로운 공작의 이름이 등장한 흥미로운 소식.
덕분에 고요하게 시작되나 싶던 새해는 순식간에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