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13)
로판 속 공무원 813화(814/945)
다섯 공작 중 가장 최근에 공작이 된 인물은 현명공. 예나 지금이나 현명공이 꽐라 주정뱅이인 건 변함이 없었으나, 당시 황제였던 상황이 현명공의 능력만큼은 높이 샀기에 무려 ‘현명’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아마 현명이라는 이름을 지으면서도 갈등이 심했을 거다. 과연 저런 인간에게 현명이라는 칭호를 소모하는 것이 맞나 싶은 의문. 어쩌다 경건공 아래에서 저런 인물이 나온 건가 싶은 탄식.
동시에 현명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품위를 보여줬으면─ 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황제가 상황으로 물러나는 그 순간까지 현명공은 현명공이었지만.
아무튼 상황 재위 기간 중 마지막 공작이 현명공이었다면, 현 황제 재위 기간 중 첫 공작은 여명공이 되었다.
“축하드립니다, 형님.”
황실의 발표를 듣자마자 새로운 울켄 공작이 된 형님께 연락을 보냈다. 다행히 남들보다 내 손이 더 빨랐는지, 다른 사람과 통화중은 아니었다.
“다소 갑작스러운 일이지만, 형님이시라면 훌륭히 울켄 공작령을 이끄실 겁니다. 이미 공작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았습니까.”
통신구 너머에 있는 형님을 향해 온갖 덕담을 쏟아냈다.
공적으로는 제국의 새로운 공작이요, 사적으로는 마르의 오빠다. 이 정도 덕담과 응원은 얼마든지 쏟아낼 의향이 있다.
– 고맙네, 막내 매부. 이거 같은 바렌티보다 매부에게 먼저 축하를 들었어.
작게 웃음을 흘린 형님─ 여명공은 오른손으로 뒷목을 매만졌다.아무래도 자신의 어깨에 올라온 공작이라는 짐이 무겁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형님에게는 미안한 생각이지만 가장 적절한 반응이다. 공작은 제국 귀족들의 정점. 그러한 위치에 올랐음에도 부담감보다 기쁨이 더 크다면 사고를 거하게 칠 양반이라는 거 아닌가. 역할에 대한 권리보다 의무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한 귀족이다.
– 하지만 매부 말처럼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스럽기는 하군. 준비할 시간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장인어른께서도 너무하시기는 했습니다. 신년하례식 때 언급하셨으니 1주가 겨우 넘─”
– 난 어제 들었어.
?
“예?”
형님의 말에 머리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어제 듣다니. 뭐를? 설마 공작이 되는 걸 어제 들었다고?
– 어제 저녁 식사가 끝나고 갑자기 방으로 부르시더니, 내일부터 네가 공작이라 하셨지.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다시 웃음을 흘린 형님의 표정에는 씁쓸함이 가득했다. 지금 보니 저 웃음마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미친.’
덕분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장인어른이 이번 일에 대해 철저히 함구할 것을 요구했지만, 설마 자기 아들이자 차기 공작에게도 함구하실 줄은 몰랐다. 이거 함구의 범위가 과하게 넓은 거 아니냐고.
‘자고 일어나니 공작이라.’
내가 타일글레헨 백작위를 물려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다섯 공작 중 하나가 아닌 서른 제국백 중 하나가 되었을 때도 부담스러웠다. 아버지한테 미리 언질을 받았음에도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름 준비 기간이 길었음에도 막상 물려받게 되니 착잡했다.
그래서인지 형님의 부담감과 당혹감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내 감정의 수십, 수백 배는 불려야 겨우 이해할 수 있을 터.
– 그래도 예전부터 준비하던 일이라 다행이지. 내가 공작위를 물려받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 습니까?”
– 그래. 물론 하루 만에 물려받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형님의 눈물 어린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형님 말처럼 예전부터 준비하던 일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장인어른은 실권을 형님에게 넘긴 상태였고, 공작의 얼굴을 비쳐야 할 때만 활동했다. 실질적 공작은 이미 형님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갑작스러운 공작위 양도에도 충격이 덜한 거겠지.
…덜한 거 맞나? 맞아야 할 텐데.
– 다만 조금은 걱정이야. 아버지는 수십 년 동안 철혈이라는 이름으로 군림하신 분이잖나. 내가 그분의 공백을 온전히 채울 수 있을는지.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씁쓸함이 느껴지는 형님의 말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수십 년 동안 군림한 거목을 대체하는 건 누구라도 힘든 일. 빈말로 위로하는 건 오히려 형님에게 독이 된다.
– 아무튼 축하 고맙네, 매부! 최대한 빨리 축하연을 열 테니 꼭 와주게!
“물론입니다. 형님이 만족하실 만한 선물을 준비해서 가겠습니다.”
– 흐흐, 페디를 데려오는 거면 선물로 충분해.
다행히 형님의 고뇌는 짧았다.
아니, 정확히는 고뇌가 짧은 게 아니라 마음을 가다듬은 시간이 빠른 거겠지. 형님이 공작이 된 건 순응해야 할 진실이니.
장인어른이 작정하고 함구하기는 한 모양이다.
“오, 오라버니가 공작이요?”
“응. 이제 여명공이라 부르면 돼.”
장인어른이 누구보다 아끼는 막둥이인 마르조차 공작위 양도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혼란스럽다. 공작위 양도가 중요한 일이기는 한데, 가족들에게도 숨길만한 일인가? 오히려 가족들은 알아야 하지 않나?
‘다 생각이 있으셨겠지.’
복잡한 기분이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장인어른의 결정이다. 다 그럴 이유가 있었으니 함구하시지 않았겠나. 공작 중에서도 고령에 속하는 장인어른이니 일개 애송이가 헤아릴 수 없는 뜻이 있었을 거다.
“형님도 당황하신 것 같기는 하더라. 그래도 유능하고 성실한 분이니 금방 적응하시겠지.”
아무튼 혼란에 빠진 마르를 토닥이며 최대한 긍정적인 말을 꺼냈다.
철혈이 아닌 여명이 군림하는 시대. 앞으로 수십 년을 이어갈 새로운 공작의 시대. 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사람으로서 당황한 얼굴보다는 웃는 얼굴로 박수를 치는 것이 도리다. 당사자인 형님은 고뇌하고 부담을 느낄지언정, 주변인인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축하해 줘야 한다.
막말로 자기도 심란한데 주변에서도 수군거리면 얼마나 답답하겠어.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역량을 의심하는 기분이겠지.
“물론 장인어른의 공백을 채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야. 장인어른의 존재감이 짙었던 만큼, 사람들이 형님에게 기대하는 수준이 클 테니까.”
“그렇겠죠…”
“하지만 전전대 울켄 공작인 용맹공도 굳건한 기둥이었잖아. 용맹공께서 세상을 떠나셨을 때, 과연 장인어른이 그 공백을 메울 수 있을지 우려하는 시선도 많았고.”
17대 울켄 공작인 용맹공. 이름 그대로 어마어마한 용맹함을 자랑했고, 당대 제국 최강자 라인에 속했던 무인.
그랬던 용맹공의 위명을 아들인 철혈공이 성공적으로 이었다. 장인어른이 해낸 걸 형님이라고 못 할 것은 없다.
“무인으로서는 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녀석이다. 허나 행정 능력과 사람을 다루는 능력은 나보다 위지. 그거면 충분하지 않더냐. 치세에 필요한 건 강한 기사가 아닌 현명한 관료니까.”
게다가 장인어른은 단순히 쉬고 싶어서 은퇴한 것이 아니다. 형님을 믿어서 떠넘긴 것이다.
그 과정이 다소 급박하고 기괴했지만 어쨌든 믿어서 그런 거다.
“아, 축하연 때 페디는 꼭 데려와 달라고 하시더라. 그걸 선물로 치겠대.”
“페디만 가는 게 아니라 나르도 갈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반사적으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맞는 말이다. 제레노에서 얻은 소중한 보물 나르. 어느덧 그 존재감을 강렬하게 과시 중인 나르는 다음 달이나 다다음 달 정도에 태어나지 않을까 추측 중이다. 형님에게 페디뿐만 아니라 나르도 선물로 보여줄 수 있다.
무려 공작 등극 축하연을 하루아침에 준비하지는 않을 테니까. 신년하례식의 열기가 식고, 겨울의 차가움이 아닌 봄의 따뜻함이 다가올 때. 그때 여명공을 위한 축하연이 열릴 거다.
“페디는 나를 많이 닮았으니, 나르는 엄마를 닮았겠지?”
“후후, 그러면 아버님과 오라버니도 기뻐하실 거예요. 어쩌면 아버님은 나르를 품에서 안 놓아주실 수도 있고요.”
“진짜 그럴 것 같아서 무서운데.”
막둥이 겸 늦둥이인 마르를 격렬히 사랑하는 장인어른이다. 그런 마르와 똑 닮은 손주가 태어나면 품에 가둔 채 잠적하실지도 모른다.
그건 곤란한 일이다. 은퇴하신 분이니 어디 한적한 곳으로 작정하고 숨으시면 답이 없어.
‘내가 계속 안고 있자.’
우리 나르. 외할아버지 집에 놀러 가게 되면 계속 아빠 품에만 있자.
***
울켄 공작이 바뀌었다. 체네스 공작이 경건공에서 현명공으로 바뀐 이후, 실로 오랜만에 있는 공작 교체다.
‘이걸로 몇 번째인지.’
문득 내가 마종이라는 이름을 달고 공작으로 있는 동안, 몇 명이나 되는 공작이 스쳐 지나갔는지 떠올리게 됐다.
뉘렌 공작가, 바렌티 공작가, 오시덴 공작가, 살론 공작가. 카토반 공작가가 꿋꿋하게 버티는 동안 네 개의 공작가에서는 여러 공작들이 사라지고 등극하기를 반복했다.
’19대 울켄 공작이라고 했던가.’
세르베트 공작은 아직 11대인데. 내가 자리를 지키는 사이 다른 공작들은 정말 많이 변했구나.
씁쓸했다. 인간과 엘프의 수명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철혈공조차 노환을 이유로 물러났다. 나보다 늦게 공작위에 올랐음에도 오래 군림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럼 나는.’
내가 공작으로 지낸 100년은 얼마나 긴 세월일까. 내가 쌓아 올린 존재감을 마리아가 짊어지게 된다면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칼은 새로운 울켄 공작─ 여명공이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선대의 공백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그보다 몇 배는 될 부담을 우리 마리아가 짊어져야 한다. 언젠가는 12대 세르베트 공작이 될 그 아이가.
‘너무 오래 있었어.’
어느새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선대의 존재감이 클수록 후대의 부담은 커진다. 내가 당장 물러나도 후대가 감당해야 할 부담은 상당할 터인데, 마리아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면 더욱 무거워진다.
곤란하다. 대체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마리아의 부담이 조금이나마 줄어들까.
‘중간에서 조율해 줄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공작위를 물려받아 공백을 채우고, 마리아가 장성하면 공작위를 물려줄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 걱정도 사라질 거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중책을 맡아줄 사람이 없다. 내 공백을 메울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 드문 건 둘째 치고, 카토반 공작가의 일원은 나와 우리 세 아이들밖에 없으니.
아니지. 부군인 칼도 카토반이라고 여겨야 하나?
‘나도 참, 대체 무슨 생각을.’
한숨에 이어 쿡쿡 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에서 어찌 칼을 생각하는 걸까.
물론 칼이 내 뒤를 이을 만큼 유능하고, 아이들을 위해 공작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마리아가 장성하면 기꺼이 넘길 성품이기는 하다. 카토반 공작가와 세르베트 공작령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는 하다. 결혼으로 인해 카토반 공작가와 연이 있는 귀족이기는 하다.
마침 가문과 작위를 계승하기 위해 딸이 아닌 사위가 작위를 잇거나, 아내의 작위를 남편이 받은 경우가 없지는 않…
‘어?’
나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떨었다.
왜… 생각할수록 괜찮은 것 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