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14)
로판 속 공무원 814화(815/945)
언제나처럼 장생이를 물고 빨고 있던 세쌍둥이와 놀아주던 중. 내 미천한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재앙이 찾아왔다.
“트릭시. 방금, 뭐라고?”
그리고 재앙을 가지고 온 주인공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와중에 최대한 웃는 얼굴로, 장난을 치는 것같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 건 내 마지막 이성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심각한 분위기를 풍길 수는 없으니까.
“그게…”
내 질문에 트릭시는 슬며시 눈치를 보더니, 스르륵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세르베트 공작위를 잇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단다.”
다만 눈치를 보는 눈과 달리 트릭시의 입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잘못 들었기를 간절히 바란 말이 나왔다. 농담이기를 바란 말이 나왔다.
‘꿈인가?’
덕분에 즉시 현실 도피를 시작했다.
그래, 이건 현실이 아닌 꿈일 거다. 최근에 공작이 바뀐 대형 이벤트가 있어서, 내 머리가 무의식적으로 공작에 관한 꿈을 꾸는 걸 거야.
지독한 꿈이다. 공작 교체 이벤트는 현실에서 겪는 걸로 충분하거늘, 어찌 꿈에서도 겪게 한단 말인가. 그것도 세르베트 공작이 트릭시에서 나로 교체된다는 기괴한 꿈을.
‘차라리 전승공이면 몰라.’
전승공이 제국군 부사령관 업무에 집중하기 위하여 공작위를 물려준다고 선언한다? 그건 충분히 있을 법한 이벤트다. 전승공의 후계자인 에발트 공자도 이번에 공작이 된 형님처럼 준비된 후계자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다. 준비된 후계자는커녕 후계자조차 아니다. 나와 카토반 가문의 연관점은 성이 ‘ㅋ’으로 시작하는 것밖에 없어.
‘내가 뭘 잘못했나?’
이윽고 합리적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트릭시에게 서운한 짓을 저질러서, 트릭시가 그에 대한 보복을 하는 게 아닐까?
혹시 트릭시의 생일을 깜빡했나? 아냐, 트릭시 생일은 2월이야. 지나기는커녕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생일 파티를 준비 중이다.
내가 세쌍둥이에게 다소 소홀해서 서운한 건가? 아니, 그것도 아니다. 내가 우리 아이들과 열심히 놀아주는 건 나 자신이 알고, 부인들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면 트릭시의 외조모님께 연락을 안 드려서? 그것도 아니다. 외조모님한테는 새해가 되자마자 안부 인사드렸다.
‘없는데?’
최대한 머리를 굴려봤지만 내가 잘못한 건 없다. 내 처신은 이론상 완벽하다. 아무런 흠결이 존재하지 않는 훌륭한 남편이자 아빠, 외손녀사위로 활약했다.
“…왜?”
그래서 직설적으로 물었다. 왜 그런 못된 말을 하는 거냐고.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공작위 계승이라는 끔찍한 말을 하는 거냐고.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말이라 평정을 유지하기 어렵다. 제국백이라는 작위도 무거운데, 어떻게 공작위를 감당할 수 있을까. 감히 꿈도 꾸지 않은 어마어마한 짐이다.
애초에 공작위를 꿈 꿀 귀족은 이 제국에 존재하지 않지만. 다섯 공작가가 아닌 주제에 공작을 꿈꾸는 건 제국에 대한 반역이지.
“나도 이 짐을 누군가에게 넘기고 싶지는 않단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짊어지고 싶지.”
그렇게 말한 트릭시는 내 옆에 주저앉아 장생이를 만지작거리는 마리아를 바라봤다.
그러자 트릭시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보기만 해도 행복하다는 것처럼.
“하지만 그럴 수 없잖니. 언젠가는 이 짐을 우리 마리아에게 줘야 하잖니.”
“우웅?”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마리아는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리아. 엄마한테 오렴.”
“웅!”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마리아는 아장아장 걸어가 트릭시 품에 안겼다.
덕분에 장생이는 자유를 되찾았으나, 그 옆에 있던 세실리아가 낚아채 도로 인형 신세가 되었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다.
“언젠가는 우리 마리아도 공작이 되겠지.”
“그렇겠지. 부모의 것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건 피할 수 없으니까.”
씁쓸함이 감도는 트릭시의 모습에 내 마음도 편치 않았다.
누군가는 공작이라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물려받으면 좋은 거 아니냐고, 싫어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허나 나는 그 공작들의 진짜 모습을 잘 알고 있다. 제국의 공작들은 그저 군림하고 지배하는 자가 아닌, 이끌고 책임지는 자들이다. 인생을 막 사는 것 같은 현명공마저 그 어깨에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짐이 올라가 있다.
백만 제국군을 관리하는 전승공. 존재 자체로도 전쟁 억지력이었던 철혈공. 조금이라도 쉬면 제국 경제가 마비되는 황금공. 제국의 식량 안보와 이종족 관리를 책임지는 현명공. 수도권 방위와 제국 마법계를 책임지는 마종공. 다섯 공작 중 그 누구도 가벼운 존재가 아니다.
‘작은 아이가 짊어지기에는 너무 큰 짐이야.’
트릭시에 품에 안겨 방싯방싯 웃는 마리아. 그런 마리아를 보니 씁쓸함이 몰려왔다.
물론 마리아가 공작이 될 즈음이면 작은 아이라고 할 수 없다. 트릭시는 생전에 작위를 물려줄 생각이라 했으니, 백 년 단위가 아닌 수십 년 정도 후에 공작이 될 수 있다.
‘그게 문제다.’
수십 년. 이미 트릭시가 집권한 백 년에다가 마리아가 성장해야 할 수십 년도 포함해야 한다. 다른 가문이라면 공작이 몇 번이나 바뀔 시간 동안 트릭시 홀로 군림하게 된다.
그리고 마리아는 트릭시가 홀로 쌓은 존재감과 업적을 물려받아야 한다. ‘세르베트 공작은 마종공.’이라는 굳건한 인식을 이겨내야 한다.
‘그래서구나.’
서서히 공포감 대신 착잡함이 가슴을 채우기 시작했다.
트릭시가 공작위 계승이라는 흉흉한 부탁을 한 이유. 바로 마리아가 짊어질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였다. 트릭시한테 바로 공작위를 물려받는 것보다는 한 단계 거쳐서 받는 것이 좋으니까.
가주가 누구인지, 영주가 누구인지에 따라 그 가문과 영지의 분위기가 결정된다. 노련한 주인이 오래 버티고 있으면 모든 가신들은 그 주인에게 익숙해진다. 철저한 규칙 대신 주인의 성향이나 관습을 따르게 되며, 주인이 정한 옛날 관습을 시간이 흘러도 유지하게 된다.
그렇게 가문과 영지를 좌지우지하던 주인이 물러나고 새로운 주인이 집권하면─ 이전 주인의 흔적이 새로운 주인을 막아선다. 전통과 관례라는 이름으로. 선대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그 이름은 이전 주인의 집권 기간과 업적에 비례하여 더욱 두터워지겠지.
“다음 공작이 힘들기는 하겠네.”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트릭시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구나. 내가 너무 오래 버텨서…”
“미안할 게 어딨어. 엘프의 피가 흐르는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이건 트릭시의 잘못이 아니다. 종족 차이로 인한 장수가 어찌 죄가 되겠나.
‘누가 나서기는 해야 돼.’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을 고려하면 고려할수록 트릭시와 마리아 사이의 누군가가 구원 투수로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리아는 대륙 역사상 유례없는 인수인계 난이도와 마주할 거다. 대륙의 그 어떠한 군주나 귀족도 백 년이 넘게 군림하지는 않았으니.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트릭시가 쌓아 올린 흔적을 아무 부담 없이 조정할 수 있는 건 대등한 남편인 나밖에 없다. 마리아가 물려받기 편하게 조절할 사람도 아빠인 나밖에 없다.
“트릭시.”
“으응… 말하렴.”
“고개 들고. 트릭시가 잘못한 건 없다니까?”
픽 웃음을 흘리며 트릭시를 품에 안았다.
“압빠! 답답해!”
“아.”
정확히는 안으려다가 실패했다. 트릭시 품에 있던 마리아가 앞뒤로 눌릴 뻔했으니까.
“아무튼 무슨 마음인지는 알겠어. 마리아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 나였어도 그런 생각을 했을 거야.”
“이해해 주는 거니?”
“나도 마리아 아빠니까.”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마리아를 쓰다듬자, 마리아는 다시 활짝 웃으며 내 품으로 건너왔다.
이 천진난만한 아이가 공작위에 짓눌려 고통스러워하는 것. 차마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재앙이다. 차라리 내가 고생하고 말지.
“그런데 내가 잇는 게 가능해?”
“으, 응?”
“내가 카토반 가문은 아니잖아. 데릴사위가 작위를 잇거나 남편이 아내의 작위를 받은 전례가 없는 건 아니지만, 공작가는 철저히 부모 자식 간의 승계만 이어지지 않았어?”
내 타당한 의문에 트릭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은 귀족 위의 귀족이며, 황실이 보장하는 영구적인 정점이다. 아무리 귀족들 사이의 관례가 존재해도 공작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공작위 계승법이 꼬이면 황실 입장에서도 귀찮은 일이잖아.
“사실 나도 확신은 할 수 없단다. 그래서 네가 괜찮다면, 폐하께 말씀을 드리려고 했지.”
이 역시 타당한 대답이었다. 일단 작위를 주고받을 사람들끼리 의견을 모으고, 최종 승인을 할 황제에게 문의하는 게 맞다.
만약 의견 종합 없이 냅다 황제한테 작위 승계를 문의했다면 울었을 거다. 트릭시가 나를 암살하려 했다는 서글픔 때문에.
***
손에 들고 있던 보드카를 쳐다봤다.
이윽고 내 눈앞에 있는 장관을 한 번. 다시 보드카를 한 번. 또다시 장관을 한 번.
“장관.”
“예, 폐하.”
“혹시 취했나?”
술을 마신 건 분명 난데, 주정은 왜 저놈이 부리는 거지?
진심으로 의아했다. 혹시 집무실 내에 풍기는 보드카 향기에 취한 건가? 장관이 그 정도로 술에 약한 놈이었어?
“취했으면 여기서 난동 부리지 말고 저택으로 가게. 장관이 취해서 팔만 잘못 휘둘러도 짐은 위험해지니까.”
장관의 주먹에 스치기만 해도 나는 상황 폐하보다 먼저 세상을 뜨게 된다. 역대 최단기 황제가 되어 황태녀가 최연소 황제로 즉위하거나, 제위에서 물러나신 상황 폐하께서 다시 즉위하는 미친 사태가 벌어질 거다.
“송구하오나 소신은 멀쩡하옵니다.”
“멀쩡한데 그런 말을 한 거라고?”
그건 그거대로 놀랍다. 장관의 맨정신은 취한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건가.
어떻게 보면 현명공과 미묘하게 닮았다. 늘 술을 마셔서 취한 현명공과 마시지 않아도 취한 장관이라.
“장관. 사내로 태어나 야망을 가지는 건 좋으나, 그렇다고 공작위를 넘보는 건 곤란하네. 차라리 후작위를 노리면 장관 생전에는 얼마든지 오를 수 있어.”
그러나 놀라움은 잠시 억누르고 진심을 담아 장관을 다독였다.
애초에 영지나 작위에 욕심이 없던 장관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백작령을 달라고 했으면 적당히 하나 던져줘서 부려 먹었을 거다.
헌데 공작이라니. 알 거 다 아는 인간이 어찌 그런 말을.
“황실 직할령의 지도를 가져올 테니 거기서 원하는 백작령을 마음껏 고르게. 그러니 공작위 같은 얘기는 하지 말고─”
“폐하. 남편이 부인의 작위를 받는 건 드문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허어.”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이놈 이거 진심이다. 진심으로 세르베트 공작위를 계승할 수 있는지 묻는 거야.
“…왜?”
그렇기에 나 또한 진심을 담아 물었다. 내가 무언가 주려고 하면 이 악물며 피하던 놈이, 왜 스스로 공작이라는 자리를 탐내는 거냐고.
“소신의 딸이 짊어질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습니다.”
“짐을 덜고 싶다?”
장관의 답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딸이 한두 명이 아닌 장관이나, 세르베트 공작위를 논하는 자리이니 아마 장녀인 마리아를 말하는 것일 터. 즉 장관이 공작위를 탐내는 건 훗날 공작이 될 마리아 공녀를 위한 선택이라는 것.
‘으음.’
마종공, 마리아 공녀의 입장에 황실을 대입하자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만약, 만약 상황 폐하께서 30년 정도가 아닌 100년 동안 즉위하셨다면 어떨까. 100년 동안 위대한 군주로 군림한 그분이 물러나고, 내가 황제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제국의 귀족들과 신민들은 물론, 온 대륙의 시선이 나에게 몰릴 거다. 내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상황 폐하와 비교 받을 거다. 내가 무언가 하려고 하면 상황 폐하 시절의 관습을 가져올 거다.
그것도 10년이나 20년이 아닌 무려 100년이나 쌓아온 관습을. 사실상 하나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한 관습을.
‘미친.’
단순히 가정임에도 욕이 목 끝까지 치솟았다.
사람이라면 그딴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