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15)
로판 속 공무원 815화(816/945)
황제도 두 아이의 아비다. 게다가 훗날 세르베트 공작위를 물려받을 마리아처럼 황위를 물려받을 황태녀가 있다.
그렇기에 황제도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 내가 무슨 심정으로, 어떤 결단으로 세르베트 공작이 될 거라 선언했는지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황제의 표정은 다소 느슨해졌다. 아비들끼리는 같은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통을 공유하는 법이니.
“그래도 안 돼.”
“예?”
허나 느슨한 표정과 달리 목소리는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짐도 장관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네. 짐에게도 황위를 물려줘야 할, 이 대륙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줘야 할 딸이 있지 않나. 어찌 그 심정을 모를까.”
“폐하, 하오면─”
“그렇기에 짐은 더더욱 허락할 수 없어. 장관이 마리아 공녀를 걱정하는 것처럼, 짐 또한 황태녀에게 단 하나의 불안 요소도 물려줄 수 없으니까.”
그렇게 말한 황제는 거칠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에 들고 있던 보드카를 거칠게 들이켰다.
“공작은 건국 이래로 오직 다섯 가문에서만 배출했지. 에이만카 대제의 뜻을 받들기 위해, 제국의 천명을 세우는 것에 일조한 다섯 공신들을 존중하기 위해.”
순식간에 병을 비운 황제는 아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론 후작도 열셋이나, 장관도 알다시피 이는 계승 후작위에 국한된다네. 단승 후작은 제국 역사에서도 제법 등장하지 않았나.”
그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후작위는 오직 열셋뿐이지만, 단승으로 끝난다면 얼마든지 하사할 수 있다. 당장 아인테르만 해도 이드라펜 후작위를 받았지 않나.
“허나 공작은 그조차 불가능해. 황족에게 하사하는 단승 작위로도, 막대한 공을 세운 공신에게도 줄 수 없는 작위가 공작이야. 이건 에이만카 대제께서 다시 부활하시지 않는 이상 깰 수 없는 제국의 근간이지.”
“폐하. 소신도 여섯 번째 공작이 되고자 하는 욕심은 없습니다. 크라시우스의 가주로서 공작위를 탐하는 것도 아니지요. 카토반 가문의 부군으로서 잠시 공작위를 맡고자 할 뿐입니다.”
“그 또한 용납할 수 없네. 다섯 공작가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만 작위를 승계했으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넘긴 경우는 없었어.”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는 책상 옆 바닥을 뜯어내더니, 그곳에 숨겨져 있던 보드카를 두 병 꺼냈다.
“지금 장관이 주장하는 건 선례가 없는 일이야.”
이윽고 한 병은 나에게 건네주었다.
“짐은. 황태녀를 위해서라도 후대에 분란이 될 선례를 짐의 손으로 만들 수 없다네.”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굳은 의지를 담으며. 네가 딸을 걱정하는 만큼 나도 걱정한다는 눈빛을 보내며.
덕분에 입을 열 수 없었다. 내가 마리아를 위해 공작위를 짊어지고자 하는 것처럼, 황제는 황태녀를 위해 이 기괴한 선례를 막고자 한다. 공작위가 잠시나마 다섯 공작가 외부로 튕겨져 나갈 가능성은 원천 차단해야 하니까.
내가 카토반 가문의 부군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럴 리는 없지만 내가 트릭시와 이혼하면 카토반 가문과의 연이 사라지니까. 공작위를 외부인이 들고 나르는 꼴이다.
황제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나는 다른 마음을 먹을 생각이 없으나, 후대에는 무슨 놈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 귀족이라는 건 온갖 음모와 수작을 부리는 것들이니.
‘설득은 글렀나.’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설득을 이어나가는 건 ‘네 딸은 어떻게 되든 관심 없다.’ 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 내 대녀이기도 한 황태녀의 치세에 큼지막한 변수를 던지겠다는 의미다.
그런 짓을 하는 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황제가 공작위 계승이라는 개소리에 성실히 화답해 준 것도 내가 마리아를 위한 선택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잖아. 나와 내 딸을 배려하여 황제의 권위로 짓누르는 대신 설득을 택한 거다.
“폐하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보드카를 양손으로 받으며 허리를 숙였다.
기껏 어려운 말을 꺼낸 트릭시, 훗날 상당한 짐을 짊어지게 될 마리아. 이 둘에게는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하지만, 이건 안 되는 일이다. 이 이상 고집을 부리는 건 황제와 갈 때까지 가자는─
“차라리 억지를 부렸으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폐하?”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황제는 한숨 섞인 중얼거림을 내뱉더니, 책상으로 다가가 통신구를 쥐었다.
“궁내성 장관. 짐이다.”
– 황제 폐하 만세! 궁내성 장─
“급한 일이니 인사는 됐다. 사법성 장관과 함께 집무실로 오도록.”
– 예, 폐하. 바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소환령에도 불구하고 궁내성 장관은 당황한 기색 없이 대답했다.
오히려 당황스러운 건 나였다. 이 타이밍에 궁내성 장관과 사법성 장관을 나란히 부르다니. 이건 아무리 봐도 그거잖아.
“장관.”
“…예, 폐하.”
“딸 가진 아비끼리 머리 좀 맞대 보지. 마침 궁내성 장관과 사법성 장관에게도 어여쁜 딸이 있다더군.”
황태녀를 위해 이상한 선례를 만들 수 없다면, 제국 300년 역사와 이전 세 제국들의 기록을 전부 털어보겠다는 의지.
황제가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양보이자 배려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집무실로 달려온 궁내성 장관과 사법성 장관은 황제의 설명에 탄식을 내뱉었다.
“방법이 없습니다.”
“소신이 알기로는 불가합니다.”
그리고 논할 것도 없다는 듯 즉답을 내놓았다.
“세르베트 공작위는 오직 카토반 가문의 것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감찰성 장관이 마종공의 부군이어도 엄연히 크라시우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성이 바뀐 방계의 인물을 양자로 들여 작위를 계승한 사례가 없는 건 아닙니다. 허나 그 역시 형식상으로는 부모 자식 간의 승계였습니다. 장관이 마종공의 양자가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것도 우리가 우려한 것과 비슷한 이유를 들어 불가를 외쳤다.
역시 사람이 생각하는 건 거기서 거기구나. 아니,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제국인의 상식과 직결된 문제라고 하는 게 맞나?
“장관이 지금껏 황실과 제국에 보낸 헌신과 충성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장관이 선례를 만들어버리면 후대에 장관의 업적과 충심은 생각하지 않고 선례만 바라볼 자들이 생길 겁니다. 다섯 가문의 공작위를 상실하는 끔찍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어찌 죽어서 대제를 뵙겠나이까.”
어느새 사법성 장관은 바닥에 엎드리며 외쳤다.
이해한다. 사법성 장관은 제국의 법과 관례, 예법 등 온갖 것을 최종적으로 관리하는 직책이다. 그런 사법성 장관 입장에서 공작의 권위에 흠집이 갈만한 일이 생긴다? 그것도 자신의 임기 중에? 아마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일 터.
“폐하께옵서 장관의 충성에 보답하고자 하신다면 후작위를 하사하소서. 우선 단승 후작위를 하사하시고, 훗날 위리디아 백작위를 후작위로 올리소서.”
이윽고 공작위가 아닌 후작위로 퉁치면 안 되겠냐는 딜까지 걸어왔다. 얼마나 절박하면 저런 말까지 나오는 걸까.
“카토반이 아닌 자가 세르베트 공작을 대리할 수는 있어도, 세르베트 공작이 될 수는 없사옵나이다!”
이제 사법성 장관의 이마가 바닥에 닿았다. 자신은 죽어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것처…?
“대리?”
“대리라 하셨습니까?”
나와 황제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보인 기분이다.
***
역시 사법성 장관을 부른 건 정답이었다.
“완전히 작위를 계승한 것이 아닌, 대리 상태로 권한을 행사한 전례가 존재하기는 합니다. 기존 작위 보유자가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대리인이 작위의 권리와 의무를 대신하지요.”
“작위 보유자의 대리인이면 집사장이나 소가주와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집사장과 소가주는 그 직책에 대리 권한이 있는 것이나, 대리인은 그 자체가 직책입니다. 작위 보유자가 대리인을 공식적으로 지목하면 집사장과 소가주보다 우선적인 명령권을 지닙니다.”
감찰성 장관과 사법성 장관의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막막했던 길에, 타협의 여지가 없을 거라 생각한 논의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황태녀와 마리아 공녀 양측에 이로운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마침 초대 세르베트 공작인 설검공에게도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아들이 너무 어려 유언으로 대리인을 지정한 적이 있었지요. 설검공이 남긴 대리인은 후계자가 장성할 때까지 7년 정도 활동한 걸로 기억합니다.”
“공작위가 공석인 상황에서 말입니까?”
“예. 그러니 마종공께서 공작위에서 물러나시고, 마리아 공녀가 물려받기 전까지 감찰성 장관이 공작 대리인으로 활동하는 게 가능하기는 한데…”
거기까지 말한 사법성 장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트릭시의 존재감을 옅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트릭시가 뒤로 물러나고, 제가 전면에 나설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감찰성 장관의 단호한 대답에 사법성 장관이 이마를 짚었다.
그 모습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난데없이 불러서 이런 복잡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다니. 사법성 장관에게는 봉변도 이런 봉변이 없겠지.
“…대리인은 그 작위에 대하여 최소한의 권한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감찰성 장관이 대리인이 되면 공작으로 대우는 받으나, 다섯 공작 중에서는 무조건 아래입니다.”
“당연히 감수할 일입니다.”
“대리인으로 활동하는 동안에는 일시적으로 작위명을 미들네임으로 가지게 됩니다. 칼 세르베트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처럼 말입니다.”
“일개 귀족이 미들네임을 갖는 건 황송한 일이나, 그것이 관습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허어.”
정녕 이게 맞는지 의문인 듯, 사법성 장관은 혼이 나간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봤다.
장관이 스스로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 건드리지 말자. 잘못하면 사법성을 관리할 인재가 정신적 충격으로 쓰러질 수 있으니.
“이제 감찰성 장관은 행정부 서열이 아니라 제국 서열로 따져야겠군요.”
그 와중에 침묵을 지키던 궁내성 장관은 헛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맞는 말이다. 감찰성 장관은 행정부 내에서도 7위인 존재. 제국 전체로 따지면 은근히 뒤로 밀리는 입장이나, 이제 공작 대리가 된다면 제국에서도 공식적인 앞쪽 서열이 된다.
행정부의 수장이나 마찬가지인 궁내성 장관보다도.
‘암묵적인 서열이 공식화된 것인가.’
이미 장관을 제국의 2인자로 여기는 자들이 많았으나, 이제 그게 현실화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