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16)
로판 속 공무원 816화(817/945)
황제와 장관 셋이 머리를 맞댄 결과, 답이 보이지 않았던 난제도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었다.
트릭시가 세르베트 공작위에서 물러날 시기는 내년으로 정했다. 이미 올해는 첫째 장인어른이 은퇴하여 새로운 공작이 등극한 빅-이벤트가 터졌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100년이 넘게 군림한 트릭시까지 연이어 물러난다? 제국이 여러 의미로 소란스러워지는 건 당연하고, 기껏 여명공이 된 형님은 순식간에 묻힐 거다.
아무리 형님이 난데없는 공작위 양도에 씁쓸해 하더라도 주목과 관심을 압수하는 건 너무한 일. 그러니 카토반 공작가는 1년 동안 비밀을 지키며 침묵할 것이다.
“마탑주 직위는 마종공이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지. 이건 후임을 구하는 것도 문제지만, 대륙 각지에서 마법사들이 난리를 칠 거야.”
“예. 트릭시에게도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물론 1년 후에 내려놓는 것은 세르베트 공작위를 포함한 일체의 작위들로 한정 지었다. 마탑주 직위까지 타인에게 넘기면 대륙 단위로 불타오를 게 뻔하니.
“카토반 공작가의 가신 중에서도 이왕이면 집사장이나 시종장 같은 주요 가신들만 알아두는 게 좋겠군.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자네들도 함구하게.”
“예, 폐하.”
“이곳에서 있던 일은 이곳에 두고 나가겠습니다.”
황제의 함구 요청에 궁내성 장관과 사법성 장관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입 하나 관수하지 못하여 대형 사고를 칠 양반들은 아니다. 심지어 황제 앞에서 맹세했으니 책임감은 더욱 늘어났을 터. 보안 문제는 우려할 필요가 없다.
“장관. 크라시우스 내에서는 누가 이 일을 알고 있나?”
“소신과 트릭시를 제외하면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하다가 우뚝 입을 멈추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공작위 계승을 논한 자리에 나와 트릭시만 있던 건 아니었다.
“장관?”
내가 입을 다물자 황제는 불안하다는 듯 재촉했다.
너 왜 갑자기 멈추냐고. 대체 어디까지 정보가 퍼진 거냐고 따지듯이.
“그, 소신의 세 딸들이 함께 있기는 했습니다.”
마리아, 세실리아, 카틀레아. 장생이와 놀고 있던 세쌍둥이를 지켜보던 중, 트릭시와 공작위에 대해 논했었다. 딱히 멀리서 논한 것도 아니고 바로 옆에서.
게다가 엘프의 특징 중 하나가 예민한 청력인지, 세쌍둥이는 우리 아이들 중 유독 귀가 밝았다. 멀리서 불러도 금방 반응하고, 작게 속삭여도 귀신같이 알아챘지.덕분에 우리 저택에서 공작위 계승에 대해 아는 건 나와 트릭시, 세쌍둥이다. 하나 더 쳐주면 장생이까지 총 여섯.
“딸들이라.”
그리고 내 대답에 황제는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옵니다. 공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물려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겠지요. 또한 소신과 트릭시가 1년 동안 잘 돌볼 터이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장관이 그렇다면야. 알겠네.”
그래도 부모가 확실히 돌볼 것이라 다짐하자 황제도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100% 납득했다기보다는 괜찮을 거라 믿고 싶은 것 같지만, 아무튼 고개는 끄덕였으니 됐다. 구두 동의도 동의는 동의니까.
“핫.”
“폐하?”
“왜 그러시옵니까?”
갑작스러운 황제의 웃음에 두 장관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제국의 다섯 기둥인 공작위를 논하는 자리다. 분명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던 황제가 그런 자리에서 웃음을 흘렸으니, 두 장관 입장에서는 황제가 맛이 간 건가 우려스러울 터.
“짐이 즉위한 지도 이제야 5년이 되어간다네. 헌데 그 5년 동안 온갖 일들이 생기더니, 이제는 마종이라는 이름이 물러난다고 하지 않나. 대제께서 짐에게 거는 기대가 크신 모양이야. 그러니 이런 놀랍고도 기묘한 일들이 연달아 생기는 것이겠지.”
그 말에 나도, 궁내성 장관도, 사법성 장관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제 5년이었나.’
상황의 양위부터 지금까지 약 5년. 그 사이에 터진 일들을 떠올리려다 빠르게 포기했다. 애석하게도 하나하나 나열하기에는 너무 많고 화려했으니까.
“왜들 그러나. 웃게. 웃자고 한 농담인데 이리 숙연해지면 짐도 민망해.”
“하, 하하. 그렇지요. 대제께서 폐하를 총애하시어 굽어살피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궁내성 장관의 말이 맞습니다. 대제의 보우 아래 폐하의 업적과 위용은 불멸할 것입니다.”
전설로만 전해지는 ‘분위기 망치지 말고 웃어.’에 장관들도 부장 앞의 대리처럼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잔인한 놈. 장관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흉악한 짓을.
“장관은 안 웃나?”
“앞으로 폐하께서 더욱 쌓아가실 위업을 생각하니, 너무도 감동적이어서 잠시 목이 멨습니다…”
황제의 지목에 반사적으로 아부성 덕담을 쏟아냈다.
고작 5년의 재위기간이 화려한 건 내 지분이 절반 이상이지 않나. 양심상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승리하고 돌아온 남편은 아내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다.
“작위 계승은 무리지만, 마리아가 바로 작위를 물려받는 건 막을 수 있겠어.”
그것이 절반의 승리라도 아무튼 승리는 승리. 심지어 전략적으로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했기에 절반을 넘어 80%라고 할 수 있다.
“대리인이라는 제도를 쓰면 된다더라.”
“대리인?”
내 말에 세쌍둥이와 놀아주던 트릭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검공께서도 대리인을 세운 적이 있다던데? 2대 공작이 될 후계자가 장성할 때까지, 대리인이 7년 정도 세르베트 공작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더라고.”
“아.”
구체적인 설명에 트릭시의 눈이 크게 떠졌다.
“대리, 맞아.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듣기는 했단다. 하지만 당연히 집사장 같은 가신들이 임시로 영지를 이끌어나간 거라 생각했는데, 아예 대리인을 따로 지목하신 거였구나.”
생각도 못 했다는 듯 중얼거리는 트릭시를 보니 새삼 사법성 장관의 유능함이 돋보였다. 설검공의 후손인 트릭시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전례를, 카토반 가문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법성 장관이 알고 있었다.
그것도 약 300년 전의 전례잖아. 대체 어떻게 안 건지 의문일 정도다.
“올해는 형님이 울켄 공작이 되셨으니 넘어가고, 내년에 진행할 예정이야.”
“내년…”
구체적인 시기도 언급하자 트릭시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고맙구나. 그리고 미안해. 내 고집 때문에 이런 짐을 짊어지게 해서…”
그러고는 내 손을 잡으며 미미하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기는. 나도 필요한 일이라 생각해서 폐하를 설득한 건데.”
그런 트릭시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술을 댔다.
첫 의견은 트릭시가 냈어도, 그것이 타당하다 여기며 동의한 것은 나다. 그럼에도 트릭시를 탓하는 건 치졸하고 추한 행동이다.
“게다가 진짜 공작이 되는 것도 아니고 대리잖아. 아주 잠시 딸에게 줄 선물을 열심히 다듬는 건데, 짐이라고 할 게 어딨어.”
죽을 때까지도 아니고 마리아가 장성할 때까지다.
물론 17살이 되자마자 물려줄 생각은 없다. 우리 마리아는 꼭 아카데미에 입학해야지.
그렇다고 졸업하자마자 물려주는 건 정이 없다. 학창 생활을 마친 후, 하고 싶은 걸 해보고 지내야 하지 않나. 그러니 대충 30살 정도에 물려줄까 싶다.
…
‘잠시는 아닌가?’
20년에서 30년이면 잠시라고 하기 애매하긴 해.
***
홀로 남은 집무실에서 앉아 멍하니 대제의 초상화를 바라봤다.
“미천한 후예가 근간을 지켰습니다.”
초상화를 보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뉘렌 공작가의 하블렘 공작위. 바렌티 공작가의 울켄 공작위. 오시덴 공작가의 보야르 공작위. 살론 공작가의 체네스 공작위. 카토반 공작가의 세르베트 공작위.
이 다섯 작위 외에 새로운 공작위가 생기는 것도, 다섯 공작가가 아닌 다른 가문의 사람이 공작위를 차지하는 것도 막았다. 대제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못난 후예가 되는 건 피했다.
‘대리인이라.’
다만 그 대가로 사례가 적은 전례를 끄집어내야 했으나, 없던 전례를 만든 것도 아니지 않나. 공작위가 위태로워질 바에는 다소 옛날 전례를 동원하는 것이 옳다.
‘욕심 때문에 움직이는 거면 목이라도 잘랐을 텐데.’
이윽고 픽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 장관이 욕심에 눈이 멀어 공작위를 탐내는 거였다면 무리해서라도 장관을 옭아매고 타격했을 거다. 황실과 제국에 필요한 것은 충신이지, 역신이 아니기에.
‘고집이라도 부렸으면 원망스럽기라도 할 텐데.’
내가 단호히 거절했을 때 계속 공작위를 요구했다면 나도 강하게 나섰을 거다. 장관도 자신의 딸을 위한 결단이나, 그것이 제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결단이라면 황제로서 좌시할 수 없기에.
그러나 장관은 욕심을 부리지도,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다. 자신의 딸을 위해 그렇게나 피해 다니던 짐을 자처해서 들고자 했고, 내가 황태녀를 위해 근간을 지키려 하자 납득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어쩌겠나. 먼저 물러선 장관을 위해 최대한 둘 다 이기는 방법을 찾아야지. 사실 차기 세르베트 공작이 될 마리아 공녀가 마종공의 그림자에 가려져 문제가 생기면, 그건 당대 황제가 골치 아파질 문제기도 하니까.
‘차라리 잘됐다.’
다시 바닥을 열며 마시다 남은 보드카를 집어넣었다.
그래,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다. 마종공은 100년이 넘게 공작으로 군림하였다. 덕분에 공작 중 가장 앞에 선 수준을 넘어, 공작들의 위에 선 공작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제와 공작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존재였다.
그런 마종공이 스스로 물러난다고 한다. 물론 마탑주의 직위는 여전히 유지할 것이나, 적어도 공작 위의 공작이라는 자리에서 내려와 존경받는 원로로 지낼 것이다.
‘2인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대신, 기존 2인자를 내려보낸다라.’
기묘한 상황이다. 작위상 2인자인 마종공이 내려오고, 실질적 2인자인 장관이 대리로나마 공작의 자리에 올랐다.
그래도 2인자가 둘인 것보다는 하나인 게 낫지. 그렇게 생각하자.
“대리인은 그 작위에 대하여 최소한의 권한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다 문득 사법성 장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최소한의 권한. 최소한일지언정 공작으로 대우는 받는다는 뜻.
‘1년 동안 좋은 이름을 생각해 봐야겠어.’
공작에게 이름이 붙는 건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장관이 최소한이나마 공작의 권한을 누릴 수 있다면 마땅히 이름을 붙여야 하지 않겠나.
다만 정식 공작이 아닌 대리인이기에 나 또한 정식으로 이름을 하사하지는 않을 거다. 그저 사석에서 은근슬쩍 장관의 공작명을 흘릴 것이다. 처음에는 가족들, 그다음에는 장인어른, 또 그다음에는 장관들과 의원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남들이 부르는 건 막을 수 없지.’
황제가 공식 선포를 하지 않아도 온 사람들이 그리 여긴다면 그것이 정답인 법.
1년 후, 칼 세르베트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이 될 장관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참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