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2)
보던 작품을 뱉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냥 취향에 맞지 않아서, 그냥 전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냥 하루 보지 않았다가 그대로 보는 걸 잊어서, 그냥 봄바람이 따뜻해서. 아무튼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내가 이 세계의 원작을 뱉은 건 앞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볼 게 없어서 이것저것 뒤적이다 발견한 작품이라 딱히 취향도 아니고 전개도 서글펐으니까. 그 중에서도 전개 때문에 너무 놀랐다.
‘꼬마인 애한테 어떻게 그러지.’
만약 루이제가 빙의자나 환생자면 그러려니 한다. 껍데기만 어린 거지 내용물은 성인이라는 거니까. 백 번 양보해서 회귀자여도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루이제는 회빙환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은 순수한 꼬마였다.
원작 작가는 육체도 정신도 어린 8살 아이에게 너무 매운맛 시련을 줬다. 그걸 보고 ‘아, 이건 좀.’ 하고 빠르게 뱉었었지. 그때는 내 인생도 매운맛이 될 줄은 몰랐지만, 적어도 난 성인 때 굴렀으니까.
“네가 있지만 않았어도…”
루이제의 언니 되는 사람의 마지막 대사. 나이어드 자매의 관계는 클리셰라면 클리셰라고 할 수 있는 관계였다.
허약하게 태어나 집안의 관심을 받는 여동생, 몸이 약해도 늘 해맑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여동생, 본인도 그런 여동생을 좋아했지만 점점 자신에게 올 관심과 사랑도 쏠리자 질투를 품는 언니, 여동생만 신경 써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언니의 병.
뒤늦게 발견된 병 때문에 눈이 감기면서도 루이제를 원망스레 노려보는 눈은 정말 인상적이었지. 하필 작화도 좋아서 더 선명했다. 하얗게 질린 루이제의 얼굴도 잘 그렸고. 그런 건 딱히 고퀄로 보고 싶지 않았는데.
무심코 루이제에게 시선을 돌리자 부탁대로 마카롱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밝게 웃는 얼굴로.
‘대단하네.’
어린 나이에 그런 일을 겪고도 저렇게 밝을 수 있을까. 물론 루이제가 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 사이코패스인 건 아니다. 당시에도 큰 충격을 받고 우울해 했으니까. 마종공이 루이제를 만난 것도 그 정도 시기였고.
하지만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아니면 스스로 마음을 다잡은 건지는 몰라도 지금의 루이제는 겉으로는 밝고 상냥한 사람으로 자랐다. 솔직히 아카데미 첫날에 루이제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너무 자란 것도 있지만 인상이 밝아진 것도 있었을 정도니.
그런 일을 겪은 애가 저렇게 밝을 줄 어떻게 예상하냐고. 난 사람을 홀린다는 설정도 밝은 매력이 아니라 피폐나 그런 쪽 기반일 줄 알았지.
“다 됐어요!”
측은하게 루이제를 바라보기를 잠시, 완성 소식이 퍼지자 이번에도 하이에나들이 덤벼들었다.
이상하게 저번에도 그렇고 마카롱은 유독 잘 먹는 것 같다. 얘네 진짜 뭐지. 입맛 문제가 아니라 편식을 심하게 하는 거였나? 쿠키가 그렇게 싫더냐.
***
가족 얘기로 주제가 흘러가길래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가족에 대해 즐겁게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까.
그래도 불편한 티를 낼 수는 없다. 여기서 꺼리는 반응을 보이면 내가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홍보하는 꼴이잖아. 다른 사람들이 알 필요 없는 일이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야.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어차피 가볍게 지나가는 주제니 걱정할 필요 없어.
“나도 아파, 나도 아픈데 왜 너만!”
“네가 있지만 않았어도…”
언니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 떠오르자 살짝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수면 아래 잠잠히 있다가 갑자기 솟구치는 것처럼 언니의 말은 내 의도와 상관없이 떠오른다.
그 말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언니의 유언이기도 하고, 언니는 정말 나 때문에 죽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있지만 않았어도 언니는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야.
“힐다가 떠난 건 우리 잘못이란다. 우리가 미워서 떠난 거야. 루이제, 네 잘못이 아니야.”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니도 언니가 죽은 것에 몇 번이나 울면서도 나를 탓하지는 않으셨다. 하지만 딸을 탓하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책임을 나눈다면 내 지분이 가장 크다. 두 분의 관심과 사랑이 즐거워서, 가문 사람들이 보살펴주는 것에 기뻐서 더 어리광을 부렸으니까. 그걸로도 만족하지 못해 언니에게 갈 시선도 탐냈으니까.
‘그러면 안 됐어.’
내 잘못이다. 똑같이 받아야 할 가문의 사랑을 홀로 차지한 내 잘못이야. 내가 없었다면 언니는 온전히 사랑받고 행복하게 지냈을 테니. 사랑은 한 사람에게만 가는 게 아니라 공평하게 가야 하는 건데.
마음 속에서 고개를 드는 죄책감에 점점 고개가 숙여지려는 찰나, 오라버니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안돼, 어두운 모습을 보여드리면 안 되는데. 지금도 오라버니가 바로 시선을 돌리셨잖아. 안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서 실망하셨을 지도 몰라.
“가정사는 이 정도로 끝내지. 이러다 왕실 기밀을 듣게 되면 귀라도 잘라야 한다.”
하지만 내 걱정과 달리 오라버니는 오히려 대화를 멈추게 하셨다. 내 표정을 보고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배려해 주셨다. 그리고 뜬금없이 마카롱을 만들어 달라 부탁하셨고.
누가 들어도 노골적인 배려였다. 마카롱이 괜찮았으니 더 만들어줬으면 한다고? 정작 오라버니는 별로 드시지도 않았다. 애초에 맛도… 거의 느끼지 못하는 분이다.
‘당황하셨구나.’
그래서 이상한 핑계로 분위기를 바꾸려 하신 것 같다. 슬쩍 오라버니의 눈치를 살피니 아니나 다를까, 평소와는 달리 눈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웃음이 나올 뻔했다. 동시에 눈물도 나올 뻔했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 아니면 실망할 수도 있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신경 써주시는 게 너무 고마웠다.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모르실 텐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실 텐데. 그냥 표정만 보고도 이렇게 걱정해 주시고.
‘고마워요.’
입 밖으로 낼 수는 없기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상황에서 난데없이 고맙다는 말을 해봤자 다른 애들만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다 됐어요!”
그러니 평소처럼 밝게 외쳤다. 오라버니의 배려를 받아 마음을 다잡는 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보답이니까.
“맛있군요, 루이제 영애. 정말 잘 만드는 것 같습니다.”
아인테르의 말에 뒤늦게 아차 싶었다. 약재 넣는 걸 깜빡했다.
오라버니는 맛을 못 느끼셔서 몸에 좋은 거라도 넣어드려야 하는데. 얘들도 평소에 단 걸 많이 먹을 테니 나라도 몸에 좋은 걸로 챙겨줘야 할 텐데.
…응. 뭐,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
다행히 동아리가 끝날 때까지 루이제는 밝게 웃고 있었다. 물론 속내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애초에 루이제가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어떻게 대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완전히 극복을 했을 수도 있지만 아직 속에 품으며 앓고 있을 수도 있는 상황. 평소 해맑길래 전자인가 싶었지만 오늘 표정을 보니 아닌 것 같고.
‘어쩔 수 없지.’
걱정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딱 오늘 한 배려 수준이다. 울적해 보이면 달래주고, 좋지 않은 주제가 나오면 판을 접어주는 것.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나는 공식적으로 루이제의 과거를 모르는 사람이니까. 루이제가 나에게 과거를 털어놓지도 않았는데 내가 과거 일을 알고 조언이나 걱정을 해준다?
“…칼 오라버니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아마 이런 반응이 나오겠지. 그 자리에서 미친 스토커가 되는 거다. 심지어 내가 감찰부장이다보니 단순히 ‘기분 나쁜 미친 스토커’에서 ‘가문과 자신의 과거를 턴 흉악한 감찰부장’으로 진화해 버린다.
그건 아무리 루이제여도 기겁하고 도망칠 문제지. 이리나와 사이가 회복된 대신 루이제와의 사이가 파탄나겠네. 등가교환 미쳤냐고.
어쨌든 루이제의 트라우마는 속에 품은 응어리를 누군가에게 말해줘야 건드릴 수 있는 문제다. 지금까지 홀로 해결하지 못했다면 믿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도 방법이니까.
‘어린 게 입만 무거워서.’
나한테는 고민이 있으면 말하라던 녀석이 정작 자기 고민은 입 꾹 닫고 있네.
조금은 괘씸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커서 루이제를 보면 묘하게 잘 대해주게 된다. 불쌍한 소녀 가장을 보면 느끼는 측은지심 같은 건가. 이 아이가 행복이라는 걸 알까요?
“답 없는 것들.”
답답한 심정에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사실 루이제가 응어리를 털어놓고 싶어도 털어놓을 상대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부원 다섯 중 하나라도 루이제와 친밀한 관계가 되면 어련히 말해주겠지. 그런데 서로 삽질과 견제만 난무해서.
부모의 사랑을 자기 혼자만 받아 언니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루이제다. 그 여파인지 자신이 친구 중 하나를 선택하여 더 가까워진다는 발상 자체가 막혀있는 것 같고. 그래서 하나만 편애하는 상황을 꺼리는 상태다.
그러니 루이제가 아니라 부원 중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하는데, 이 지능 퇴화범 새끼들은 한 학기가 끝나가도 답이 없네. 루이제의 트라우마를 풀어야 루이제가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텐데 트라우마 자체가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아.
‘영애님도 사랑이 하고 싶을 텐데.’
영애님은 사랑하고 싶어.
이 세계에서 나만 알고 있는 제목을 떠올렸다. 빙의 직후에는 생각나지 않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원작 제목. 물론 원작 내용도 아니고 제목 따위는 알아도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루이제의 사정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짠한 제목이다. 얘들아, 루이제도 사랑이라는 걸 하고 싶단다. 그러니까 제발 진도 좀 나가자.
‘기대도 안되네.’
마음으로는 제발 진도를 나갔으면 하지만 머리는 이미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차라리 여섯 번째 인물이 튀어나오기를 기도하는 게 더 효과적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