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21)
로판 속 공무원 821화(822/945)
율리아가 태어난 이후로 진귀한 광경을 자주 보게 됐다.
크라시우스와 바렌티의 무재를 진하게 이어받았는지,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좋아하던 페디가 율리아의 요람을 몇 시간이나 지키고 있는 광경.
몇 년 전, 페디를 위해 선물해 주었던 동물 인형이 율리아의 요람 구석구석에 배치되는 광경.
“너 왜 여깄냐?”
“도련님이 시키셔서…”
그리고 페디의 전용 애마이자 충마인 친절이 율리아의 요람 옆에 앉아 경비를 서는 광경까지.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아이가 보이기에는 놀랍고도 귀여운 광경이라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다른 건 다 넘어갔는데 설마 친절에게 경비까지 세울 줄은 몰랐다.
‘벌써 용인술을 배운 건가.’
이 경우에는 인이 아니라 마지만,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부하를 파악하고 일을 맡기는 것. 그것이 용인술의 시작이자 끝 아니던가.
친절은 성수들 중에서도 페디에게 독보적으로 충성하는 녀석이다. 페디가 자신이 아닌 다른 말을 타게 될 위기에 처하자 울분을 터뜨리던 놈이잖아. 그러니 페디에게 있어 친절은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수족이고, 친절 역시 페디의 지시를 기꺼이 따를 녀석이다.
다만 그 지시를 자기 동복동생 호위를 위해 사용할 줄은 몰랐다. 아마 친절도 몰랐을 거다.
“좌천이냐?”
배를 깔고 엎드린 친절 옆에 주저앉으며 농담을 건넸다.
페디가 걷지 못하던 시절부터 페디의 충마로 맹활약한 친절이다. 그런데 갑작스레 보직이 변경되었으니, 페디의 명에 따르면서도 원통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조금은 달래줄 의향이 있다. 얘가 말을 더럽게 안 듣거나 성질 고약한 놈은 아니니까. 벌써 라인을 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페디에게 충성하는 녀석이니 그럭저럭 신경은 써줘야지.
“좌천이라뇨! 도련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는데! 이게 어떻게 좌천입니까!”
허나 위로를 위한 농담을 건네자, 친절은 울적해지기는커녕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도련님의 동생! 혈육을 맡기는 건 누구보다 믿는다는 뜻! 좌천이 아니라 승진입니다!”
“뭐, 그건 그렇지.”
부정할 수 없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의 말이 맞다. 권력자가 자신의 소중한 혈육이나 보물을 맡긴다는 건 그만큼 총애하는 신하라는 뜻. 페디가 율리아를 끔찍이 아낀다는 건 저택 사람과 동물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그렇게 티를 내고 다니는데 어떻게 모르겠어.
그 당연한 진실을 이 녀석도 알고 있었다. 혹시 혈육이고 뭐고 페디를 태울 수 없다는 점에 슬퍼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전직 악신이라 그런지 그 정도 머리는 돌아가는 모양이다.
…
‘전직 악신이 어쩌다.’
이 녀석들이 성수로 지낸 지도 몇 년이 지났거늘, 아직도 이 녀석들의 과거를 떠올리면 오묘한 기분을 억누를 수 없다. 한때 질투라 불리던 악신이 다섯 살 아이의 명을 받아 한 살 아이를 지킬 줄이야.
“아가씨가 기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자라면 도련님과 아가씨를 동시에 태우고 다닐 겁니다!”
“그래, 그랬으면 좋겠네.”
그러나 내 기분이 오묘하든 말든, 친절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호기롭게 외쳤다.
두 남매를 동시에 태우겠다는 야심 넘치는 발언. 과연 전직 악신다운 탐욕스러운 야심이라 실소가 절로 나왔다.
‘신성이 없어서 이 모양인 건가?’
신성은 신의 정체성이자 근원. 그 신성을 영원한 푸른 하늘에게 뜯겼으니, 악신이었던 과거가 빠르게 세탁돼도 이상하지 않다. 악신에서 악도 뜯기고 신도 사라졌는데 과거와 똑같으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이잖아.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차기 성자에게 이름까지 받았다. 악신이라는 정체성 대신 성수라는 정체성이 확립되는 건 당연한 수순.
‘그럴듯한데?’
즉흥적으로 생각한 논리지만 상당히 설득력이 넘친다.
원래 이름이라는 것은 그 존재를 상징하는 간판이자 뿌리니까 이름에도 힘이 있는 법이지.흉악한 악마도 진명을 불리면 움찔하는 것처럼.
“우- 아-”
율리아도 내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 짧게 옹알이를 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조용히 있겠습니다!”
정작 친절은 율리아의 옹알이를 불쾌함으로 인식했는지, 빠르게 바닥에 엎드리며 침묵 상태에 돌입했다.
벌써 율리아도 호위 대상이 아닌 제2의 충성 대상으로 여기는 것 같다. 라인 타는 솜씨도 이 정도면 예술이야.
‘저러다 둘 다 크면 어떻게 하려고.’
페디도 율리아도 장성해서 도저히 둘이 한 말을 타지 못하는 단계. 그 단계에 이르면 친절은 어떤 선택을 할까.
제1주인인 페디에게 충성할까, 아니면 페디가 아끼는 제2주인에게 충성할까. 아니면 난 죽음을 택하겠다며 저 멀리 탈주해 버릴까.
상상만 해도 두근거린다. 어째서 자신은 분신술을 쓰지 못하는 거냐며 통곡할 수도 있다.
‘힘내라.’
10년도 더 남은 일이지만 지금부터 고민해야 할 거다.
율리아의 탄생은 기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나, 곤란한 점이 딱 하나 동반됐다.
바로 막 태어난 아이가 생겼으니 신혼여행을 일시 중단해야 한다는 점. 아직 초점도 제대로 맞지 않는 아이를 두고 해외로 떠나는 못난 아비가 될 수는 없다.
메리가 태어났을 때도 별생각 없이 제레노로 갔다가 메리를 펑펑 울게 만들었으니까. 한 번은 실수라고 쳐도 두 번은 무능이다. 아비로서 자식을 울게 만드는 무능.
‘율리아가 아빠를 찾으면서 울면 페디가 무슨 생각을 할까.’
게다가 지금은 페디가 율리아에게 흠뻑 빠진 시기다. 이 시기에 율리아가 대성통곡(사유: 아빠)을 일으키면 페디의 분노와 원망, 슬픔이 나에게 향하겠지. 한 번의 여행으로 둘의 원한을 사는 기적의 가성비다.
“그래서 여행은 다음에 가야겠다.”
그렇기에 에리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무래도 신혼여행은 몇 달 후에 가야겠다고. 지금 가면 가정의 평화가 여러 의미로 위태로워질 거라고.
“타국 여행만 아니면 되지 않아요? 타국에 몇 주 동안 머물러서 문제지, 텔레포트로 국내 여행만 다니면 당장 가도 괜찮지 않아요?”
“어?”
허나 에리는 예상치 못한 논리로 반박을 했다.
굳이 국경 너머에서 몇 날 며칠을 보내지 말고, 저택을 거점 삼아 가고 싶은 곳을 그때그때 가는 여행 방식.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하는 업무식 신혼여행을 주장했다.
“그래도 되겠어? 다들 타국에서 추억을 쌓았는데, 혼자 국내에 있는 건 좀.”
“다들 국경 바깥을 노릴 때 혼자 안을 노리는 거죠!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택하는 게 성공의 지름길!”
“아니, 뭐 이런 걸로 성공 실패를 따져.”
부부의 오붓한 여행이니 다 같은 성공이잖아.
하지만 에리의 말도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해외 여행 속 홀로 국내 여행이라면 돋보이기는 할 테니까. 게다가 나도 아카데미 수학여행을 제외하면 딱히 국내를 여행 삼아 돌아다닌 적이 없다.
물론 이곳저곳 돌아다닌 적은 있으나, 놀기 위해서가 아닌 업무를 위해서였지. 남쪽 바다부터 북방 초원까지 전부 업무 목적 방문이었어.
‘괜찮나?’
그래서 오랜만에 에리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텔레포트로 이동했다가 저녁에 텔레포트로 복귀하는 여행. 그 정도라면 율리아와 잠시 떨어져 있어도 큰 문제는 없다. 만일, 만일 그 당일치기 여행 중에 율리아가 아빠를 애타게 찾아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 해외에 있다면 국경을 넘어야 하는 절차 때문에 바로 텔레포트를 쓰기 난감하나, 국내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쓸 수 있다.
“정말 괜찮겠어?”
“넹! 대신 다른 애들처럼 몇 주 동안 하는 거예요! 하루 같이 놀고 끝내지 말기!”
“그거야 당연한 거고.”
논할 가치도 없이 당연한 일이라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가 해외 대신 국내를 택하는 양보를 보였는데, 여행 날짜도 대폭 축소하는 건 에리에게 못할 짓이다. 서서히 피 냄새가 빠져가던 에리가 다시 지하실의 에리로 각성할지도 몰라.
“그럼 1주 후부터 시작할까? 어디 갈지는 내가 고민해 볼─”
“지도 펼쳐서 그날그날 즉흥적으로 정해요!”
“…아예 다트 던져서 정하는 건 어때?”
“와! 그거 재밌겠다! 그렇게 해요!”
희희낙락하는 에리를 보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조금 독특한 과정이지만 이 또한 여행의 일부. 에리가 좋아한다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과정이다.
***
확답을 받자마자 방으로 돌아갔다.
“야호!”
그리고 침대에 몸을 던져 환호성을 내질렀다.
됐어! 혹시 장관님이 미안하다면서 거절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원하는 대로 됐어!
‘아주 뺑뺑 돌아야지!’
히죽히죽 웃으며 천장을 바라봤다. 난 타국에서 노는 것보다 편하게 국내에서 노는 게 더 좋아. 대륙의 모든 물자는 결국 제국으로 모이고, 나는 후작가 귀족이잖아. 괜히 번거롭게 타국까지 갈 바에는 제국에서 손가락만 까딱거리는 게 훨씬 좋지!
결정적으로 귀족들의 인식과 내 평판을 위해서라도 국내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게 낫다. 더 이상 감찰성의 과장 에르제베트가 아닌, 타일글레헨 백작의 부인인 에르제베트로 보여야 한다.
그걸 위한 국내 여행이다. 국내에서도 주요 귀족들의 영지, 중요한 황실 직할령, 온갖 인파가 모이는 관광지만 골라서 가는 거야! 나랑 장관님이 부부라는 걸, 내가 귀부인이라는 걸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
그리고 내 사랑스러운 보물, 내 최고의 보물인 페렌츠를 위해!
“엄마아.”
“우리 아들! 엄마 보고 싶어서 왔어!?”
때마침 문밖에서 들리는 페렌츠의 목소리에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우리 페렌츠에게는 좋은 것만 줄 거야! 엄마가 감찰 시절에 알아줬다는 평판보다, 황태녀궁의 유. 능. 한. 시녀라는 평판이 페렌츠에게도 더 좋겠지!
그러니 이번 여행 동안 감찰 시절 평판은 전부 없애자! 열심히 돌아다니면 충분히 할 수 있어!
‘국내를 단둘이 돌아다닌 부인은 나뿐이니까.’
공교롭게도 장관님과 단둘이 국내 여행을 한 부인은 없다. 전부 국경 바깥으로 나가서 소중한 추억을 쌓았지만, 정작 국내에서 귀족들에게 과시한 부인은 없어.
이 기회! 내가 잘 사용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