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22)
로판 속 공무원 822화(823/945)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제국은 대륙 제일의 국가다.그것도 여러 강국들 중 가장 앞에 선 국가가 아닌, 강국들 위에 군림하는 초강대국이다. 국력 2위의 국가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수준을 넘어 위에서 굽어살필 수 있는 존재가 곧 제국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감히 제국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다. 대륙을 아우르고 모든 신민들을 이끌어야 할 제국이 고작 국가 하나조차 완벽하게 짓누르지 못한다? 그것은 황제의 제국이 아닌 패왕의 왕국에 불과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상황이 즉위하기 전인 환상적인 암군 라인 시절에도 제국은 어떻게든 제국으로 군림했다. 다른 왕국들이 ‘저 새끼 이제 옛날 같지 않은데?’ 라는 눈빛을 보냈어도, 크펠로펜이 제국이라는 것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암군들이 판을 쳐도 제국의 체급이 미쳤으니까. 인류가 가장 오랜 시간 개발한 대륙 서부. 그 알짜배기 지역을 전부 독식한 돼지가 제국이니까.
‘조국을 돼지로 표현하는 것도 이상하네.’
하지만 어쩌겠나. 그보다 정확한 표현을 찾기 어려운데.
대륙 역사상 제국으로 군림한 뮤노, 트리카, 아펠스는 전부 대륙 서부에 위치해 있었다. 새로운 제국이 기존 제국의 모가지를 따고 제국을 자처했기에 일어난 일.
최초의 제국이 대륙 서부에서 발흥했다는 건 당시에 대륙 서부가 가장 발전했다는 의미다. 그 뒤를 이어 군림한 제국들도 서부를 터전으로 삼았으니, 자연스레 대륙 서부는 인류의 중심이자 제일의 번영을 자랑하는 지역이 되었다.
‘체급이 압도적이면 머리가 맛이 가도 버틸 수 있었지.’
그것도 상황이라는 걸출한 중흥 군주가 등장하기 전까지 처절하게.
물론 카간과 2황자라는 외부, 내부의 재앙 때문에 ‘이거 진짜 좆됐다.’ 싶은 시절도 있었으나, 여차저차 잘 이겨내 다시금 영광을 되찾았다. 제국은 명실상부한 제국으로서 대륙을 아우르고 이끄는 리더가 되었다.
즉, 제국은 대륙의 모든 것이 모이는 중심이자 아쉬울 것 없는 국가라는 의미이며,
“선택지가 너무 많은데?”
“그러게요.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국내를 신혼여행 장소로 잡으면 갈 곳이 너무나 많은 국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드넓은 영토로 인한 독특한 지역 문화. 길고 긴 역사가 만들어낸 다양한 구경거리. 수많은 귀족들이 쌓아 올린 화려한 사치 문화. 억 단위 인구가 지탱하는 거대한 경제 등. 제국의 내수는 실로 웅장하고 위엄 넘쳤다.
이거 그냥 타국으로 여행을 가는 게 검소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실 공작령 하나가 어지간한 왕국급이기도 하고.’
보야르 공작령이 제레노 왕국과 무역 분쟁을 벌이던 것. 첫째 장인어른이 동부 왕국들을 두들겨 패던 것. 아무리 제국 소속이라는 명함이 있었어도 공작령의 체급이 국가급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래서 국내 지도를 펼치자마자 탄식이 절로 나왔다. 대체 어디를 가야 잘 갔다는 말을 들을까. 이건 다트를 던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
‘한두 번 던지는 걸로는 답이 안 나온다.’
일단 제국 동서남북 중 어디로 갈지 정하고, 그 내부에서는 어느 대영지로 갈지 정하고, 또 그 내부에서는 어느 중소영지로 갈지 정하고, 그 영지 안에서는 또 또 어디로 갈지 정하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이것이 대국이 짊어져야 할 숙명인가.
“어쩔 수 없나.”
“응?”
국토성 장관한테 좋은 관광지 없냐고 물어볼까 고민하는 사이, 에리가 진지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책상에 놓였던 지도를 바닥에 깔았다.
“장관님, 잠시만 기다려요!”
“어, 응.”
순식간에 사라지는 에리를 보며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하다. 그동안의 경험상 에리가 무언가 결단을 내린다면 절대 평범한 결단이 아니었다. 일반인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무언가가 튀어나오니까.
“다시 왔어요!”
“왓-서-”
지금이라도 말릴까 잠시 고민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페렌츠를 품에 안은 에리가 돌아왔다.
더욱 불안해졌다. 갑자기 페렌츠는 왜 데려온 건데.
“자, 페렌츠! 이걸로 아무 곳이나 찍어봐!”
“찌거?”
“그래! 이걸로 콱!”
작은 장난감 칼을 페렌츠 손에 쥐여주고, 살며시 바닥에 내려준 에리. 졸지에 장난감 칼을 든 채 지도 앞에 선 페렌츠.
“너 설마.”
“저희가 못 정하면 페렌츠한테 정하게 하면 되죠! 아이가 정해주는 신혼여행! 얼마나 좋아요!”
당당한 발언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런가?’
동시에 저 논리에 납득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굳이 두 번, 세 번, 네 번 다트를 던져서 정할 바에는, 우리 사랑스러운 페렌츠한테 정해 달라고 하는 게 더 의미 있지 않을까? 둘 다 랜덤이지만 후자는 페렌츠가 우리에게 준 선물 같으니까.
“페렌츠. 엄마 말대로 아무 데나 찍으렴.”
눈만 깜빡이고 있던 페렌츠 앞에 쪼그려 앉아 부드럽게 말했다.
아들이 정해주는 부모의 신혼여행. 뭔가 기괴한 문장이지만 뜻깊은 여행이 될 거라는 건 확실하다. 에리 머리에서 나온 거치고는 정상적이고 훈훈한 아이디어야.
“우웅…”
그렇게 엄마와 아빠가 연이어 요구하니, 페렌츠도 아장아장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기!”
이윽고 지도 위를 위풍당당히 걸어 다니던 페렌츠는 영지 하나를 장난감 칼로 찍었다.
“아.”
“어? 저기 거기 아니에요?”
페렌츠가 정해준 지역을 보자마자 나도, 에리도 살짝 동요했다.
페렌츠의 칼날이 닿은 곳은 제국 남부에 위치한 황실 직할령. 그것도 몇 년 전에는 어느 명문가의 영지였으나, 여러 사건이 겹치며 황실 직할령이 되어버린 땅.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때 후작령의 일부였지만, 황실의 미움을 크게 받아 뜯겨져 나간 땅.
‘하우젠츠잖아.’
애실론 후작가가 백작가로 강등되며 겸사겸사 같이 압수된 영토. 하우젠츠 후작령에서 황실 직할령으로 명의 이전이 된 땅.
그곳이 우리 페렌츠가 점지한 첫 번째 국내 신혼여행 장소였다.
“어… 이거 괜찮나요?”
“더 아래로 갔으면 조금 곤란했겠지만, 직할령이니 괜찮겠지.”
한때 애실론의 땅이었던 곳을 강제로 명의 이전한지라, 당연하게도 이 직할령은 현 애실론 백작가의 영지와 붙어있다. 페렌츠의 칼이 조금만 아래로 기울었으면 졸지에 애실론 백작가의 영지로 여행을 가야 했다.
아무리 내가 당당해도 대가리를 깨부순 가문의 영지로 가는 건 곤란하지. 괜히 갔다가 애실론 사람이나 그곳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을 만나면 어색하잖아.
게다가 내가 애실론으로 가면 남들은 티배깅을 하러 간 줄 알 거다. 후작가를 백작가로 강등시킨 주제에 몇 년이 지나서 다시 순찰하러 가는 미친 장관으로 볼 수도 있고.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페렌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다, 우리 아들. 이 아비의 평판을 네가 지켜줬어.
현재는 백작령으로 강등되고 남북으로 분리된 하우젠츠 지역.
그러나 애실론 가문이 후작가라 불리던 시절, 하우젠츠는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번영을 누리던 지역이었다. 황제의 처가이자 후작가 중 1위로 군림하는 가문의 영지니 필연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황실이 뜯어간 하우젠츠 북부 지역은 제법 부유한 지역이고, 지금까지도 그럭저럭 괜찮은 수입을 자랑하는 곳이다. 이는 여행을 가면 볼거리도 많다는 뜻. 구 애실론 가문의 영역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적절한 여행지다.
‘여길 다시 갈 줄이야.’
장난감 칼이 마음에 들었는지 꺄르르 웃는 페렌츠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기껏 페렌츠가 정해준 여행지를 억지로 바꿀 생각은 없다. 애초에 애실론은 죄의 대가를 치른 것이지, 무고하게 피를 본 것도 아니잖아. 내가 꺼릴지언정 고의로 피해 다닐 이유는 없다.
대신 다른 곳도 아닌 애실론의 땅이었던 곳이니, 양해를 구해야 할 사람은 있다.
– 장관? 무슨 일인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황실 직할령의 주인이자 나보다 애실론에 대한 원한이 깊은 사람.
전대 애실론 가주와 소가주를 날려버린 이후로 칼춤은 멈추었지만, 그래도 애실론에 대한 기억은 간직하고 있을 사람.
– 긴히라는 말은 쓰지 말게. 괜히 불안하지 않나.
“송구하옵니다.”
– 뭐, 그래도 중요한 일이니 직접 연락한 거겠지. 말하게.
“소신과 부인이 제국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겪고자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데, 아무래도 북부 하우젠츠 지역에 방문하게 될 것 같습니다.
– 뭣.
바로 황제.2황자를 앞세운 애실론 가문에게 목숨이 간당간당했던 황제.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에게는 사태를 설명하고 가야 한다.
만약에 말없이 갔다가 황제가 뒤늦게 사태를 알게 된다? 그곳이 현재 황실 직할령이든 뭐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 높은 확률로 PTSD가 발현되어 눈이 뒤집힐 거다. 막 황태자가 되었을 시점의 미친놈으로 복귀하는 거야.
그건 곤란한 일이다. 겨우 평화를 되찾은 황실과 제국에 다시 피가 흐르게 할 수는 없다.
– 아니, 거길, 왜…
실제로 내 보고에 황제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 자발적 보고를 했음에도 이 정도라니. 무단으로 여행을 갔다가 들켰으면 어땠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소인의 아들인 페렌츠에게 여행 장소를 고르게 하였는데, 장난감 칼로 북부 하우젠츠 지역을 찔렀─”
– 칼로 찔렀다고?
“아니, 그, 에리가 막대기 대신으로 준 건데─”
– 같이 여행을 갈 부인이 에르제베트인가? 과장급 인력과 하우젠츠에 방문한다고?
틀렸다. 이미 이 새끼 눈이 반쯤 뒤집혔다.
황제의 머릿속에는 신혼여행이 아닌 ‘감찰성 장관과 전 1과장의 하우젠츠 지역 방문’ 밖에 남지 않았을 거다.
‘돌아버리겠네.’
이거 지금이라도 다른 곳을 정해야 하나…?
***
장관이 과장급 인력과 하우젠츠 지역을 방문한다고? 그것도 심문을 담당하던 1과의 과장과?
왜? 어째서? 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
혹시 북부 하우젠츠 지역에서 반역의 움직임이 있는 건가? 애실론을 잊지 못하고 꿈틀거리는 역도들이 있는 건가?
감히, 감히 황실과 제국을 능멸한 놈들을 추종하는 역도가 남아있다고? 다른 곳도 아닌 황실 직할령에?
‘용납할 수 없다.’
역도는 용서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북부 하우젠츠는 오롯이 황실을 위한 땅이어야 한다.
– 폐하. 소신이 하우젠츠로 가려는 건 그저 우연─
통신구 너머에서 장관이 무어라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장관이 아닌 하우젠츠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