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23)
로판 속 공무원 823화(824/945)
페렌츠가 직접 정해준 여행 장소. 자식이 정해준 장소로 신혼여행을 가는 부모.
남들은 겪고 싶어도 겪을 수 없는 진귀한 경험인지라, 황제의 양해를 구해 북부 하우젠츠로 가려고 했다. 훗날 페렌츠가 장성하면 ‘네가 아빠랑 엄마 신혼여행 장소 정해줬어.’ 같은 말을 할 수 있게.
하지만 아무래도 포기해야겠다. 통신구 너머로도 황제가 점점 미쳐가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눈에는 막 황태자로 책봉되었을 당시의 독기가 가득했고, 입꼬리는 멈출 기미 없이 요동쳤다.
기억난다. 황제가 저렇게 화끈한 반응을 보일 때마다 감찰부를 칼처럼 휘둘렀었지.
‘무르자.’
미안하다, 페렌츠. 아들이 정해준 소중한 장소지만, 이 아빠는 그 소중함을 지킬 수 없었어.
이러다 제국에 칼날 폭풍이 불 것 같으니까. 황실 직할령으로 평온하게 지내고 있던 북부 하우젠츠는 물론, 죽은 듯이 지내던 애실론도 갑자기 멱살 잡혀서 끌려 나올 기세야.
‘그건 안 된다.’
만약 2황자 시절 애실론이라면 황제가 명을 내리기 전에 내가 먼저 쥐어팼을 거다. 애실론은 죽어 마땅한 것들이니, 과연 어느 정도로 패야 황제 입에서 ‘그 정도만 해라.’ 라는 말이 나올까 기대하며 팼을 거다.
그러나 현재의 애실론은 당시의 애실론과 별개의 존재라고 봐도 무방하다. 귀족으로서의 작위와 영지, 재산을 물려받았기에 업보도 같이 물려받았지만, 현 애실론 가주는 전대 가주와 혈연적으로도 먼 관계잖아.
전대 가주와 소가주를 처리하여 졸지에 작위를 물려받은 현 가주. 애실론이기는 하나, 애실론의 만행과는 거리가 있던 존재.
‘내가 어떻게 찾아서 옹립했는데.’
순간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 지랄맞은 애실론 놈들 사이에서 얼마나 힘겹게 찾은 정상인이던가. 귀족들의 세계에서 그 귀하다는 눈치 좋고, 머리 회전 빠르고, 양심을 갖춘 존재가 현 애실론 가주다.
그런데 황제가 눈이 돌아가 애실론을 다시 팬다? 현 가주도 그 과정에서 날아가? 그러면 다음 가주가 누가 될지 두려울 정도다. 내 기억으로는 지금 가주의 자식은 10살도 안 됐어. 이 시기에 가주직이 공석이 되면 무조건 애실론의 잔재들이 너도나도 가주직을 노릴 터.
“폐하. 소신이 실언을 하였습니다. 하우젠츠는 드넓은 제국과 비교하면 티끌에 불과하옵니다. 어찌 그 티끌을 보고자 번거로운 발걸음을 하겠습니까.”
아찔한 참사를 막기 위해 황급히 말을 바꿨다. 북부 하우젠츠에는 시선도 보내지 않겠다고.
– …장관.
“예, 폐하.”
– 가게. 북부 하우젠츠는 북방을 제외하면 가장 최근에 직할령으로 편입된 곳이야. 그것도 제국이 정복한 새로운 영토가 아닌, 본래 귀족의 영지였던 곳을 직할령으로 삼은 곳이지.
싸늘한 황제의 목소리에 무심코 침을 삼켰다.
– 물론 직할령은 충성스러운 지방관들이 관리하고 있다네. 합당한 처벌을 받은 애실론이 감히 역심을 품었을 거라 생각되지도 않아.
“하오면─”
– 허나.
아까보다는 독기가 가라앉은 눈.
대신 독기 대신 짙은 살기와 냉기가 깃들어버린 눈이 나를 응시했다.
– 짐이 모든 것을 의심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애실론의 충심은 전적으로 신뢰할 것이 아니지.
아주 티끌만큼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애실론과 하우젠츠를 조사하라는 말과 함께.
노골적인 명령이라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애실론은 믿을 수 없다. 다르게 말하면 ‘애실론을 조사할 너는 믿을 수 있다.’는 말이지 않나. 황제의 발작 버튼과 신뢰가 동시에 작동했으니 무시할 수 없다.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제국에 있다면 이 얼마나 참담하고 통탄스러울 일이겠습니까. 폐하의 종으로서 마땅히 역심을 살피겠습니다.”
– 그래. 장관이라면 제아무리 은밀한 곳에 숨은 역심이라도 능히 찾을 터. 믿겠네.
그 말을 끝으로 황제의 얼굴이 사라졌다. 졸지에 신혼여행 허가를 받으려다가 공식적인 명령을 받아버렸다.
‘제대로 미쳤네.’
빛을 잃은 통신구를 보며 혀를 찼다. 저렇게 맛이 가버린 황제가 명령을 내리면 신하로서 거부할 수 없다.
거부하면 황제의 폭주는 더욱 거세질 것이고, 재수가 없으면 황제의 의심이 나에게도 뻗칠 수 있다. 아무리 가능성이 낮은 일이라도 귀찮아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피하는 게 맞지.
“황후 폐하.”
– 어머나, 장관?
물론 신하로서 거부할 수 없다는 거지, 순순히 따르겠다는 뜻은 아니다.
“직접 찾아뵙지 못하고 통신구로 인사를 드리는 무례를 용서하소서. 소신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결례를 무릅쓰고 연락을 드렸나이다.”
내 힘으로 막을 수 없다면 황제와 대등한, 혹은 우위인 존재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황제의 폭주를 잠재울만한 유일한 카드를 내세우면 된다.
‘어딜 감히 신혼여행을 가는 사람한테 일을 시켜.’
우연히 여행지에 갔다가 일거리가 생기는 건 용납할 수 있다. 실로 서글픈 우연이지만 어디까지나 우연이지 않나. 내 팔자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거지.
그러나 여행을 가기도 전, 공식적인 명령을 받는 건 별개의 문제다. 나는 여행을 가는 거지 일하러 가는 게 아니니까.
– 편히 말하세요. 장관은 황실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어찌 결례라고 할 게 있겠습니까.
황후의 부드러운 대답에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황제 이 새끼. 일방적으로 명령할 때는 좋았지. 어디 너도 윗사람한테 쪼여 봐라.
3시간 정도 후에 황제의 연락이 왔다.
– 짐이 다소 흥분하여 사리에 맞지 않는 명을 내렸더군. 미안하네, 아까 전에 했던 말은 잊게나.
“황송하옵나이다.”
– 하우젠츠도 편할 때 가거나, 아니면 가지 않아도 상관없다네. 장관의 신혼여행인데 어찌 짐이 개입할까. 오롯이 장관의 결정에 맡겨야지.
강제로 분노 조절을 당한 황제는 어느 때보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역시 황후야. 효과 확실해.
***
작은 소란이 있었던 것 같지만, 아무튼 나랑 장관님의 신혼여행지는 북부 하우젠츠로 정해졌다.
우리 페렌츠가 정해준 소중한 여행지!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못할 거야! 엄마한테 소중한 추억을 줘서 고마워!
“돌아올 때 선물 사 올게!”
“우웅!”
그래서 장관님과 여행을 가기 전, 페렌츠의 볼에 마구 뽀뽀를 하며 약속했다.
꼭, 꼭 페렌츠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사가자. 장난감이든 인형이든 뭐든, 아이가 좋아할 만한 건 꼭!
‘뭐 하나쯤은 있을 거야!’
북부 하우젠츠는 직할령이 되기 전, 후작가 제일의 위세를 자랑하던 가문의 영지였다. 그런 지역이라면 아이한테 줄 선물 정도는 많을 거야!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해!
만약에 없다면 건물이나 농장이라도 살까? 영지 수준은 무리더라도 작은 땅 정도는 가능할 것 같은데.
‘그래도 장난감이 제일 좋겠지?’
여전히 장난감 칼을 쥐고 있는 페렌츠를 보다가 다시 뽀뽀를 했다.
우리 페렌츠,아빠를 닮아서 벌써 무기에 관심을 보이다니! 이 엄마는 기뻐!
엄마가 종류 별로 사 올게! 장난감 칼도! 창도! 활도! 도끼도! 저어어언부!
“페렌츠 그만 괴롭히고 놔줘. 답답하겠다.”
“답답하다뇨! 우리 페렌츠가 엄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치?”
“우웅. 죠아.”
“거봐요!”
장관님을 향해 당당히 항의하자, 장관님은 픽 웃으며 페렌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 페렌츠. 아빠도 좋지?”
그러고는 양팔을 벌렸다. 페렌츠에게 어서 안기라는 것처럼.
“웅!”
“앗.”
이윽고 내 품에 안겨있던 페렌츠가 바닥으로 내려가더니, 쪼르르 장관님에게 달려갔다.
분하다…! 너무 오래 안고 있어서 엄마한테 질렸나 봐! 조금 덜 안았으면 아빠가 아닌 엄마를 택했을 텐데!
“페렌츠도 무럭무럭 자라면, 그때는 아빠랑 엄마랑 같이 여행 가자. 알겠지?”
“죠아!”
“그래. 아빠도 좋아.”
그래도 장관님이랑 페렌츠가 같이 있는 걸 보면 귀여우니까 됐어!내가 이번만 봐주는 거야!
***
북 하우젠츠는 황실의 관심을 받는 요충지다.
북쪽으로는 티라프 왕령과 접해있으며, 동쪽으로는 두 왕령을 잇는 후작령과 붙어있고, 남쪽에는 황제 폐하의 역린이나 다름없는 애실론 가문이 존재한다. 정치적, 경제적, 지리적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지역이다.
‘왕령을 제외하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직할령이지.’
그런 요충지의 수석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다는 건 실로 기쁜 일이다. 내 능력과 충심이 인정받았다는 뜻이지 않나.
다만 기쁨과 별개로 부담감은 어쩔 수 없다. 이 북 하우젠츠 자체도 한때는 역적이라 부르기 마땅한 자들의 땅이었고, 남쪽에는 그 역적들이 버티고 있다. 어찌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겠는가.
‘작은 소란이라도 터지면 바로 주목을 받는다.’
다른 지역이라면 평범하게 넘어갈 일도 폐하의 주목을 끌게 된다. 가벼운 경고로 넘어갈 일이 무거운 징계로 끝날 수 있다.
그것이 이 북 하우젠츠다. 거대한 권리와 명예, 그와 비례하는 막중한 의무와 부담이 따라오는 곳이다.
물론 수석 지방관으로서 관료 생활을 끝내려면 적당히 일을 봐도 된다. 정말 대형 사고를 치지만 않으면 적당히 퇴직을 하고, 적당히 노후 생활을 즐길 수 있다.
허나 보다 높은 곳을 꿈 꾼다면 몸과 영혼을 갈아바쳐야 한다. 예를 들면 서민원이나 서민원이나 서민원을 노리는 경우. 이럴 경우에는 이 요충지를 완벽히 관리하고 폐하께 칭찬을 받아야 한다.
‘지금까지는 버텼지.’
에넨과 대제께서 보우하심인지, 실로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는 무난하게 버텼다. 오히려 북 하우젠츠에서 황실로 보내는 세금도 유의미한 상승폭을 보였다.
그러니 이대로 몇 년만 더 버티면 서민원에 입성할 수 있을 거라고, 감히 꿈에도 그리지 못했던 의원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누가, 오신다고?”
“타일글레헨 백작 각하와! 5부인께서 오십니다!”
북 하우젠츠에서 화산이 터지거나 지진이 나는 것보다 흉악한 일이 터지고 말았다.
감찰성 장관인 타일글레헨 백작 각하. 감찰성이 부였던 시절에 1과의 과장이었던 5부인. 그 둘이 북 하우젠츠에 강림한다고 한다.
‘어째서?’
손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어째서 감찰성의 머리가 이곳에 오는 거지?
설마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북 하우젠츠에 암약하고 있었나? 수석 지방관이 모르는 일을 감찰성이 파악했어?
그리고,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휴가 중인 장관이 직접 오는 거고?
‘아.’
순간 눈앞이 새하얘졌다.
누군가 내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으면 좋겠다. 두 달 정도 기절했다가 일어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