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29)
로판 속 공무원 829화(830/945)
내 마음을 담은 외침은 황제에게 깊은 울림을 준 것 같다.
평소라면 내가 퇴직의 ‘ㅌ’이라도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면 개소리 말고 꺼지라고 할 놈인데, 일단 신혼여행부터 끝내고 오라는 유예 발언을 하지 않았던가.
이건 먹혔다. 황제가 생각하기에도 내 처지가 가엽고도 딱하여 마음이 기운 것이다.
‘네가 아직 사람이기는 하구나.’
감동의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매번 짐승과 인간 언저리를 왔다 갔다 하던 놈이었는데, 아주 간헐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보일 때가 있지.그 간헐적 시기가 마침 지금인 것 같다.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어.
그리고 만약, 만약 일이 잘 풀려서 일시적으로나마 장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에 성공하면? 감찰성 장관 칼이 아닌 야인 칼이 된다면?
‘1년만 버티면 돼.’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심호흡을 했다.
내년이면 트릭시가 세르베트 공작위에서 물러나고, 나는 공작 대리가 된다. 1년만 버티면 무려 공작 대리 명함을 가지게 되는 거다.
그 명함만 확보하면 내 승리다. 공작 대리가 다시 장관으로 복귀하면 형평성 문제가 나올 것이고, 공작 대리를 제국의회에 넣을 수도 없잖아. 어차피 짊어져야 하는 공작 대리 직함을 명분으로 삼아, 그 외의 모든 직함을 털어낼 수 있다.
비겁한 방법이라는 건 나도 안다. 사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치졸한 생각은 티끌만큼도 하지 않았다.
‘나 정도면 치졸해도 되잖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신혼여행 중에도 황실과 제국, 대륙을 위해 열심히 굴러다녔다. 일할 필요가 없음에도 정신 나간 헌신을 보였으니, 이제 그 헌신에서 완전히 해방될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 1년이다. 감찰성 장관 자리에서 1년만 내려오면 만사형통이다. 그 뒤로는 장관직에서 물러나려는 나의 투쟁이 아닌, 어떻게든 나를 복직시키려는 황제의 투쟁이 될 터. 실로 완벽한 공수 전환이다.
‘고생해 봐라, 망할 놈.’
상상만 해도 설렌다. 내가 온갖 명분으로 복직을 거부하면 황제의 속은 얼마나 타들어갈까. 내가 퇴직을 갈망하며 느낀 고통을 그대로 느끼게 될 거야.
물론 공수가 전환되려면 장관직에서 임시 퇴직하는 게 우선이다만, 황제가 유예 발언을 한 걸 보면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황제의 역린인 북부 하우젠츠에서 불법 도박장을 적발한 공훈도 있으니, 황제도 심적 부담감을 가지고 있지 않겠나. 신혼여행 중인 부하가 자신이 역린을 깨끗하게 정돈해 주면 얼마나 고맙고 미안하겠어.
분명 그럴 거다. 그놈의 가냘프고 처량한, 희미하고 연약한 인성을 믿자.
다행히 북부 하우젠츠 이후에 방문한 신혼여행지는 전부 평온하고 조용했다.
이게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황실 직할령은 황실의 녹을 받는 지방관들이, 영지는 가문 대대로 그 지역을 관리한 영주들이 담당하지 않던가. 만일 담당 지역에 문제가 생기면 자신들의 지갑이나 안위에 적신호가 생길 테니, 내 눈에 들어오기 전에 본인들 선에서 처리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우젠츠 서클에서 발견한 불법 도박장은 애실론의 잔재라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다. 아무리 기괴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도 ‘애실론’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그럭저럭 설득력을 가지게 되니까.
“장관님! 이거 어때요!?”
그렇게 느긋한 마음으로 새로운 여행지, 새로운 관광지를 누비던 중. 에리가 어디선가 기괴한 물건을 가져왔다.
“진짜 칼은 아니지?”
“장난감이에요!”
얼핏 보면 진검으로 보일 만큼 리얼하고 거대한 장난감 칼을.
아니, 저게 어딜 봐서 장난감인데. 기사들이 훈련하는 곳에 슬쩍 던져두면 기사들도 착각하겠다. 직접 들어보기 전까지는 진품인지 장난감인지 못 알아보겠어.
‘어른의 장난감인가.’
아무래도 저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장난감은 아닌 것 같다. 동심을 간직한 일부 어른이들을 위한 물건이야.
어쩌면 재능과 환경 문제로 기사의 길을 포기했지만, 여전히 검을 동경하는 지망생들의 물건일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아이들 전용은 절대 아니다.
“환불하고 와.”
“왜요! 페렌츠한테 멋진 선물 사 오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에요! 이거만큼 멋진 게 어딨어요!”
허나 에리는 이미 저 어른이용 장난감에 홀렸는지, 검을 끌어안으며 바락바락 항의했다.
나도 그건 안다. 페렌츠가 우리에게 신혼여행 장소를 정해줬으니, 자식을 두고 여행을 간 부모로서 좋은 선물을 챙겨줘야지. 이건 자식을 향한 사랑을 넘어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 수준이다.
그래도 저건 아니다. 과장 좀 보태면 페렌츠보다 큰 검인데, 저걸 선물이랍시고 주면 페렌츠가 잘도 가지고 놀겠어.
“페렌츠가 검에 깔리는 거 보고 싶어? 환불하고 와.”
“애, 애들은 금방 자라잖아요! 페디도 그렇게 쪼그맣던 애가 무럭무럭 자랐고! 1년만 지나도 잘 가지고 놀 수 있어요!”
“그럼 그때 사야지. 지금 못 쓰는 걸 뭐 하러 벌써─”
“이거 한정 판매예요! 오늘 아니면 못 사요!”
그 말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한정 판매라는 말에 홀리는 건 빙의 전 세계나 이 세계나 다를 게 없구나. 심지어 구매자가 후작가의 혈통이라도.
“아, 이건 덤으로 받았어요! 안목이 좋은 사람이니 특별히 주는 거라던데요?”
그렇게 말한 에리는 주머니에서 작은 단도를 하나 꺼냈다. 당연하게도, 단도 역시상당한 퀄리티를 자랑하는 장난감이었다.
…
‘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관광지의 상인들이 덤이라는 걸 주는 존재였던가? 오히려 가격을 불리면 불렸지, 이유 없이 공짜를 줄 사람들은 아닌데.
‘혹시.’
무심코 에리가 들고 있는 장난감 검을 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대충 알 것 같다. 관광지라는 환경, 사랑하는 아들에게 좋은 걸 줘야 한다는 엄마의 마음, 돈은 그저 숫자에 불과한 후작가의 혈통. 이 세 가지가 결합되어 저 장난감의 시세는 미친 듯이 치솟았을 터.
그런 귀하고도 무거운 걸 흔쾌히 사 갔으니, 덤이라는 이름으로 단도도 넘긴 거겠지. 어차피 검과 단도의 원가를 합쳐봤자 에리가 낸 가격의 절반도 되지 않을 테니까.
“검은 적당히 보관하다가 페렌츠가 크면 줘. 지금은 단도만 가지고 놀게 하고.”
“넹!”
그래서인지 해맑은 에리를 더 만류할 수 없었다.
그래, 엄마가 자식 선물 사겠다는데 어떻게 말리겠어. 게다가 페렌츠도 크라시우스의 피를 이은 아이. 장난감 검에 큰 흥미를 가질 수 있다. 실제로 에리가 신혼여행지를 고르라며 잠시 쥐여줬던 장난감에도 애정을 보였잖아.
그냥 지금 페렌츠의 덩치로는 다루기 어려우니, 클 때까지만 창고에 박아두자.
“아예 창도 사갈까요?”
“장난감에 애정 붙일 시간은 줘야 하지 않을까? 한 번에 많이 주면 금방 질릴 것 같은데.”
“그렇겠죠? 그럼 오늘은 이것만 가져가요!”
히히 웃는 에리를 보니, 문득 페렌츠는 검사가 아니라 웨폰 마스터로 자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첫째 장인어른처럼 모든 무구에 능통한 무인으로.
사실 나도 검 말고 이것저것 다루는 편이기는 한데, 그래도 주무기는 검이고 나머지는 교양 수준이다. 반면 장인어른은 주먹부터 검, 창, 활, 도끼 등등, 모든 무구를 내가 검 다루듯이 다루는 분이지.
‘크면 울켄으로 보낼까?’
만약 페렌츠가 이 기묘한 조기 교육으로 인해 웨폰 마스터의 길을 꿈꾸면 울켄에 유학이라도 보내 보자. 제국을 넘어 대륙 제일의 웨폰 마스터가 울켄에 있으니까.
공작위에서도 물러난 분을 귀찮게 하는 것 같아 죄송스럽지만, 사위의 아들인데 기본 정도는 봐주시겠지. 약간 후계를 양성하는 느낌으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페렌츠가 장난감 단도를 받아 기뻐하고, 율리아가 아빠를 빤히 바라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국내 신혼여행도 막바지에 이를 만큼 시간이 지났다.
들리는 얘기로는 우리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동안 하우젠츠 서클의 도박장이 다시 개장했다고 하더라. 다음 달부터는 도박장 수입도 내 지갑에 꽂히겠어.
‘이건 모았다가 페렌츠가 크면 줘야지.’
어떻게 보면 페렌츠가 북부 하우젠츠를 골랐기에 발견한 부정이고, 부정을 발견하였기에 얻게 된 소득이다. 그렇다면 그 계기인 페렌츠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하니 기특하기 짝이 없다. 이제 겨우 세 살인 아이가 자기 능력으로 수익을 창출했잖아. 신동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이다.
어쩌면 우리 페렌츠, 온갖 무기에 관심을 갖는 무인이자 제국의 부정을 찾아다니는 인텔리가 될 수도 있다. 이게 문무겸비라고 하는 거겠지.
‘음?’
페렌츠의 찬란한 미래를 상상하며 마지막 여행을 준비하는 사이. 통신구가 짧게 진동했다.
[ 여행이 끝나면 그다음 날 황궁으로 오게. 전에 하던 얘기는 그때 마저 하도록 하지. ]‘오.’
황제가 보낸 문자를 보자마자 감동하고 말았다.
단호한 거절이 아닌 유예. 은근슬쩍 피하는 게 아니라 먼저 나를 찾는 과감함.
점점 희망이 짙어진다. 역시 황제도 내 처지를 딱하게 생각하고 있던 거였어.
‘내가 공작 대리로는 열심히 지낼게.’
그렇기에 속으로 다짐했다. 공작위가 공석인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할게.
아, 특별히 감찰성 장관 복귀도 상황에 따라 복귀하는 걸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건설적인 논의를 통해서 할지 말지 고려하는 게 좋겠다. 황제가 한 발 물러났으니 나도 한 발 물러나는 걸 검토할 필요가 있지.
‘이게 제국이지.’
황제와 신하가 서로 최고의 합의점을 만들어나가는 것.
이 아름다운 과정이 무엇보다 제국스러운 모습일 거다.
***
애석하게도 장관이 신혼여행을 다니는 동안, 장관의 주장을 깔끔하게 박살 낼 논리는 찾지 못했다.
정확히는 장관의 위태로운 정신을 다독이면서 박살 낼 논리를 찾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억지로 주장을 반박했다가는 장관이 주먹을 휘두를 수도 있어.
그건 곤란한 일이다. 장관의 주먹에 맞으면 불충이니 뭐니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니까. 물론 즉사만 아니면 회복할 수 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장관의 힘을 한 번이라도 버틸 것 같지는 않다.
‘그럼 장관이 스스로 물러나게 해야지.’
장관이 감찰성 장관이라는 직함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게. 차라리 감찰성 장관으로 지내는 것이 행복하게.
[ 국무총괄장관 신설 논의. ]더 뜨거운 지옥보다는 차라리 덜 뜨거운 지옥을 택할 수 있게.
“국무총괄장관.”
괜히 서류에 적힌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국무를 총괄하는 장관.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이란 말인가. 분명 장관도 감동하여 눈물을 터뜨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