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3)
여섯 번째 인물의 등장을 기원하는 기도 메타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말은 당장 루이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눈물이 절로 나올 것 같은 상황이네.
그래도 작은 희망 정도는 가질 수 있다. 이제 여섯 학기 중에 한 학기가 지났고, 아카데미 3년 중 1학년 1학기는 초반부에 불과하다. 이 개노답쇼를 다섯 학기나 더 직관해야 하는 내 입장과는 별개로 부원들에게는 아직 기회가 많이 남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작은 희망이다. 딱히 기대는 하지 않는다.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으면 실망도 하지 않는 법이니까.
‘원래 이랬나?’
문득 근원적인 의문에 도달했다. 사실 원작에서도 이랬는데 내가 실시간으로 보는 입장이라 답답한 게 아닐까? 독자 입장에서는 적당히 날짜가 스킵 되지만 나는 하루하루 지켜보는 입장이라 미칠 것 같은 게 아닐까?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다. 그러면 어떻게든 매년 1학기 감찰관을 내가 하고 2학기 감찰관은 다른 사람이 맡도록 노력했을 텐데. 그렇게 하면 반년 공백 동안 진전된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 답답한 것도 사라지겠지.
마음 깊은 곳에서 ‘그 머저리들은 반년 지나도 똑같아.’ 라는 속삭임이 들려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동아리실에서 밀가루 냄새가 아닌 잉크 냄새가 풍기는 기간이 돌아왔다. 한 학기의 마지막 일정인 기말시험이 다가왔다는 긍정적 신호.
‘이제 정말 끝이구나.’
미간을 찌푸리며 교과서 페이지를 이리저리 넘기고 펜을 사각거리는 녀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순간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원래 방학은 만인이 기대하며 기다리는 기간이지만 올해는 유독 심했다. 아카데미 교장이나 교감도 자기들 안마당인 아카데미에 높으신 분들이 어슬렁거리는 게 오죽 신경 쓰여야지. 그 높으신 분들이 귀국할 때가 된다고 하니 표정이 꽤 밝아졌다.
당연히 빌라르도 시간이 지날수록 밝은 분위기를 풍겼다. 학기 초에는 갈수록 초췌해졌는데, 지금은 눈 앞에 귀국이라는 오아시스가 보여 고통을 인내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 같더라고.
‘기쁜 일은 맞는데.’
분명 방학은 기쁜 일이다. 작은 흠집이라도 나면 모가지가 날아갈 수 있는 주요 인사들을 감시하고 수습하는 임무에서 잠시라도 해방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마종공 사건으로 제도에 소환당한 이후, 난 아카데미가 상대적으로 선녀라는 걸 깨달아버렸다. 제도로 돌아가면 바로 감찰부 업무에 치이고 언제 윗분들에게 소환당할지 모르는 하루살이 생활이다.
기쁜데 기뻐할 수 없는 미묘한 처지. 차라리 이걸 깨닫지 못했다면 기분 좋게 제도로 갔을 텐데, 난 이미 빨간약을 먹고 진실을 깨달아 버린 존재가 돼버렸다.
“루이제, 그거 그렇게 푸는 거 아니야.”
“아, 그러네.”
씁쓸한 현실에 마음으로 우는 사이 두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이제가 홍일점인 동아리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고마워 이리나!”
“옆에도 틀렸어.”
“앗.”
그 여성이 홍일점의 절친이라면 가능하다. 남6 여1이라는 궤멸적인 동아리실의 성비를 3:1까지 끌어올린 영웅은 이리나였다.
산사나무를 주고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이리나는 며칠 전부터 자연스레 제과 동아리실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하루 온 거면 모르겠는데 매일매일 오더라고. 너 다른 동아리 아니냐.
“곧 시험이라 모임은 안 하기로 했어요. 루이제랑 같이 공부하면 좋을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괜찮아. 편한 대로 해.”
그래서 물어보니 본인 동아리에 갈 필요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딱히 말릴 이유도 없어서 와도 된다고는 했지만.
‘모임 하던데.’
나도 명색이 동아리 고문 중 한 명이고 교감이라는 소통 창구가 있다 보니 나름 아카데미 상황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다른 동아리들은 동아리 시간에 모여서 자습을 할지언정, 아예 모이지 않는 경우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이리나의 동아리인 원예 동아리도 지금 이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모임을 쉰 적이 없었다. 심지어 이리나가 산사나무 묘목을 들고 찾아왔던 그 날에도.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지 않아도 내 눈치를 살피는 이리나다. 요즘은 감찰부의 오인 사격 때문이 아니라 선물을 떠보며 살피는 것이 특이한 점이지만.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너 왜 거짓말 하냐.’ 같은 말을 했다가는 정말 패닉에 빠져 도망갈지도 모른다. 그, 이미 나와 이리나 사이에는 조금 부끄러운 일이 있었으니 자극하기 미안하지.
지금도 루이제와 숙덕거리면서도 슬쩍슬쩍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그래. 그래놓고 정작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피하는 것도 웃기지만.
‘괜찮겠지.’
이리나를 자극하는 것도 꺼려지는 일이지만 애초에 뭐라고 탓할 일도 아니다. 본인 동아리를 땡땡이 치며 친구 동아리에 놀러 오는 것, -꼰-의 시야에서 보면 모를까 딱히 문제 되는 일은 아니니까.
아무리 품위를 지키는 귀족이어도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아이다. 빙의 전 기억을 떠올리면 한창 친구가 좋을 나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지.
“이것도 틀렸어.”
“히잉…”
사실 영 좋지 않은 루이제의 학습 능력을 보면 오히려 이리나의 존재가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다.
“이리나. 이것도 좀.”
“아, 그거?”
그리고 다른 부원들도 이리나의 존재를 꺼리지 않는 상황이고.
루이제를 둔 자신들의 싸움터에 다른 존재가 있는 것이 거슬릴 수도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부원들이 이리나를 배척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루이제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적대감을 보여서 쟁탈전에 극심한 페널티를 자처할 머저리는 없긴 하지. 아니, 머저리들이 맞기는 한데 그 정도로 처참한 머저리는 아니다. 얘네가 그냥 눈치가 부족한 거지 사람은 맞으니까.
“이리나 영애가 있어서 다행이군요. 모르는 게 나와도 아는 사람이 없던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황송하…”
“하하, 편하게 대하세요. 같은 학우가 아닙니까?”
“아, 네.”
이리나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인 같은 국적의 황자도 온화하게 대하니 말 다 했지. 이러면 느그 나라 왕자들도 이리나를 밀어낼 명분이 없다.
“정말─ 이리나가 있어서 너무 좋아.”
“간지러워.”
이리나에게 폭 안기는 루이제와 살풋 웃으며 루이제의 머리를 쓰다듬는 이리나. 가끔 보면 친구가 아니라 연년생 자매 같기도 한데. 아무튼 보기 흐뭇한 모습이기는 하다.
저 뒤에서 이리나가 부럽다는 듯 보는 머저리들만 빼면.
***
계기는 사소했다.
“오늘부터 공부에 집중하려고.”
의욕을 다지는 루이제의 말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과 동아리가 시험 공부로 동아리 일을 멈춘다면, 원예 동아리가 그래도 이상한 건 아니지 않을까?
물론 원예 동아리 모임이 멈춘 적은 아카데미 개교 이래로 한 번도 없었지만, 아카데미에 처음 온 오빠라면 모르지 않을까?
‘기회다.’
처음에는 오빠를 보기 부끄러워 가지 않았지만 진정 되고 나니 명분이 없어 가지 못했다. 아무리 선배는 다녀와도 괜찮다고 했지만 매일 동아리가 쉰다고 할 수는 없잖아. 하루 이틀이면 모를까, 계속 이어지면 이상하게 볼 거야.
하지만 시험을 대비해서 동아리 모임이 멈췄다고 말하면 명분으로는 충분하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친한 친구와 함께 공부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루이제를 이용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지만…
“그으, 루이제? 괜찮다면 나하고 같이 공부 할래?”
“정말? 그래도 괜찮아?”
“응, 어차피 갈 곳도 없어서.”
“좋아!”
루이제도 괜찮다고 하니까. 응, 어디까지나 루이제도 원한 일이야. 이용하는 게 아니야.
‘미안해.’
스스로 그렇게 되새겼지만 해맑은 루이제의 표정을 보니 죄책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루이제도 원하기는 무슨, 우정에 기댄 비겁한 행동이면서.
“어, 오랜만이네. 어서 와.”
그러면서도 오빠의 말에 죄책감이 옅어지는 내가 조금은 미웠다.
“선물 고마워. 덕분에 부실 분위기가 확 살더라.”
“다행이에요.”
그리고 정말 꽃말에 대해 모르는 것 같은 오빠는 더 미웠다. 다행이긴 한데, 몰라서 정말 다행이기는 한데…
‘너무해.’
안도감과 섭섭함이 공존했다. 어쩜 레이디의 선물에 저렇게 무심할 수가. 혼자 고민한 나만 바보가 된 것 같잖아.
만약 산사나무 꽃말이 유, 유일… 한 사랑… 이 아니라, 관용과 용서가 유명했어도 오빠는 몰랐을 거라 생각하니 서운했다. 난 정말 큰 마음 먹고 한 선물이었는데.
“오라버니가 열심히 키우시더라.”
옆에서 속삭이는 루이제의 말에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
제과 동아리 여섯과 원예 동아리 탈주자 하나의 조합은 매일매일 머리를 맞대며 시험을 준비했다.
“시험 과목이 왜 이리 많지.”
“실기도 아니니 적당히 해도 무방할 것 같은데.”
대표적 육체파인 에리히와 류티스의 푸념이 동아리실에 울려 퍼졌다. 날이 갈수록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이제 공부에 대한 원망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시험이 학생을 미치게 하는 건 어느 세계나 같구나.
“그래도 이틀만 지나면 방학이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힘냅시다.”
푹 늘어져 있던 에리히는 아인테르의 말에 꿈지럭거리며 펜을 들었다.
“그래, 힘내야지. 집에는 기분 좋게 돌아가야지.”
“아, 집에 돌아가나?”
“왜 너는 안 가는 것처럼 말하냐.”
“난 안 간다.”
덤덤한 류티스의 말에 쿠키를 씹던 내 입이 멈췄다.
“어? 안 간다고?”
류티스의 말은 에리히에게도 의외였는지 의문을 담아 물었다. 그래 이 새끼야. 안 가긴 어딜 안 가.
“제국에서 아르메인이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어차피 두 달 후면 돌아올 텐데 아카데미에 있는 게 낫지.”
“텔레포트 쓰면 되잖아.”
“그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마법사는 할 일이 많으니까.”
이 개같은 놈이, 왜 그럴 때만 애민 정신이야.
“동감이다. 마침 같은 생각을 했군.”
조용히 무언가를 끄적이던 라테르도 류티스의 말에 힘을 보탰다. 너도, 안 간다고?
혹시나 싶은 마음에 살며시 시선을 돌리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타니안이 보였다. 야, 아니지? 넌 아니지?
“생각하는 건 다 똑같군요. 하하, 그동안 지내면서 마음이 통했나 봅니다.”
순간 머리 속에서 오열하며 땅을 내려치는 빌라르의 모습이 상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