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30)
로판 속 공무원 830화(831/945)
국내 신혼여행은 첫날의 소란을 제외하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감찰성 장관과 전 1과장이 여행 첫날부터 불법 도박장을 털어서 그런가, 방문하는 여행지마다 수석 지방관이나 영주들이 극도로 긴장하는 게 보이기는 했지. 허나 이를 반대로 얘기하면 나와 에리 눈에 들어올만한 사건은 수석 지방관, 영주 선에서 정리된다는 의미기도 하다.
덕분에 느긋하게 관광지를 돌아다니고, 유명한 음식을 맛보기도 하고, 페렌츠와 다른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바리바리 챙기며 느긋하게 돌아다녔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겪었던 신혼여행 중 가장 평온한 신혼여행이었다. 며칠에 걸쳐 소란이 일어났던 다른 여행들과 달리, 이번 여행은 첫날에만 난리였으니까.
“그럼 황궁에 좀 다녀올게.”
그렇게 에리와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다음 날. 황제의 요청에 따라 황궁에 방문할 준비를 했다.
“아, 저도 같이 가요!”
“어? 너도?”
“넹! 선배한테 줄 선물도 챙겼거든요!”
황후를 만나러 가겠다는 말에 바로 납득했다.
하긴. 에리와 황후는 친한 선후배 관계니 선물을 주고받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황후는 국모라는 입장으로 인해 황궁을 벗어나기 어려우니,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에리를 통해 온갖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터.
“그리고! 우리! 귀여운 조카들을 위한 선물도 준비했어요!”
위풍당당히 주머니를 꺼내드는 에리의 모습에 픽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에리가 많이 활발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지만, 그래도 가족이라고 여기는 사람들한테는 상냥하고 싹싹한 편이다. 친한 선배, 친한 선배의 아이들에게도 선물 공세를 준비할 정도니.
“이건 샤를로테 선물! 이건 카롤루스 선물! 이건 캐롤라인 선물!”
“다 인형이네?”
“원래 이런 건 같은 걸로 준비해야 돼요! 다른 거 준비하면 서로 싸워요!”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논리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녀, 황자, 황녀는 전부 같은 집에서 사는 남매다. 만약 다른 선물을 주게 되면 남의 선물이 더 커 보이고, 남의 선물을 탐내게 된다. 그러면 우애롭던 삼남매는 선물을 두고 다투는 용맹한 전사로 변하지 않겠나.
게다가 황녀는 올해 막 태어난 작고 가냘픈 아이. 까딱 잘못하면 반항 한 번 못 하고 선물을 빼앗길 수가 있다. 그건 안타까운 일이지.
‘인형이 가장 무난하기는 해.’
아무튼 인형은 요람에 누워있는 황녀도 옆에 베개처럼 둘 수 있는 물건.
자기 아들한테는 웨폰 마스터의 길로 유도하는 장난감을 선사했으면서, 정작 조카한테는 무난하고 제대로 된 걸 준비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기묘하다고 봐야 할지.
‘페렌츠가 좋아하니 상관없지만.’
장난감 단도를 들고 빵끗 웃던 페렌츠를 생각하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기는 하다.
인형이든 단도든 무슨 의미일까. 받는 사람이 좋아하면 그만인 것을.
황후궁으로 직행한 에리와 달리 나는 태양전으로 이동했으나, 정작 황제를 만나지는 못했다.
“폐하께서는 다른 장관들과 회의 중이십니다.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곧 오실 겁니다.”
“그런가.”
어지간하면 집무실에만 있는 황제가 드물게 집무실 바깥으로 나갔으니까.
‘하필 이럴 때.’
집무실 앞을 지키던 황실 기사의 말에 속으로 혀를 찼다. 평소에는 보기 싫어도 금방 보는 녀석인데, 하필 중요한 얘기를 논해야 할 때 사라지다니.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인지.
하지만 황제가 사적 이유도 아닌 업무 때문에 자리를 비운 것이니 뭐라 항의할 수도 없다. 애초에 항의를 해봤자 묵묵히 문을 지키던 황실 기사에게 소리치는 꼴인데, 장관이 직접 쪼면 이 기사도 얼마나 난처하겠나.
“그러면 들어가 있도록 하지. 수고하게.”
“예, 각하.”
허리를 숙이는 기사의 어깨를 토닥인 후, 아무도 없는 집무실에 들어가 적당히 자리에 앉았다.
생각해 보니 빈 집무실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다. 지금까지는 매번 황제가 반겨주는 곳이었는데 말이야. 황제를 만난다면 보통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어서 문제였을 뿐.
“응?”
그렇게 조금은 신기한 마음으로 집무실을 둘러보던 중, 책상 앞에 서류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칠칠치 못한 새끼. 황제라는 놈이 자기한테 올라온 보고서를 바닥에 떨어뜨리다니. 황제의 결재가 필요한 사안이면 절대 가벼운 서류는 아닐 텐, 데…?
‘뭐야.’
서류를 줍자마자 그대로 몸이 굳고 말았다.
[ 국무총괄장관 신설 논의.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문장이 적혀있었으니까.
‘국무, 총괄?’
뭐지? 이 흉흉하기 짝이 없는 글자는? 이 대륙에 이런 흉측하고도 기괴한 글자가 존재할 수 있는 건가?
이해할 수 없다. 국무를 총괄한다는 미친 글자도, 그러한 업무를 책임지는 장관이 있다는 것도, 그 장관직을 새로 신설하겠다는 것도 전부 이해할 수 없다.
‘이게 어딜 봐서 장관이야.’
아니, 애초에 국무를 총괄하는 거면 총리잖아. 어딜 감히 장관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후려치려고 해?
게다가 왜, 왜 내가 감찰성 장관직에서 물러나려고 할 때 이런 걸 구상하는 거지? 누가 봐도 나를 염두에 두고 논의하는 신설직 아니야?
‘이 미친 새끼.’
어느새 서류를 잡은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 정신 나간 놈은 내가 감찰성 장관직에서 물러나는 대신, 그보다 더한 직책을 던져주려고 하고 있다. 공작 대리라는 명함에 맞게 기존 장관직들을 능가하는 직책을 만들려고 한다.
공작 대리는 공작에 준하는 존재. 제국 의전 서열로 따지면 궁내성 장관보다도 위인 존재. 그러니 궁내성 장관보다 위인 직책을 만들어서, 공작 대리의 권위 운운하는 걸 차단하려는 거─
‘아니야.’
미친 듯이 요동치는 혈압을 겨우 억누르며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블러핑이다.’
이건 블러핑이다. 황제가 제정신이라면 이런 미친 수단을 동원할 리가 없어.
행정부 서열 1위인 궁내성 장관조차 장관들 중 가장 앞에 선 존재지, 장관들 위에 선 존재가 아니잖아.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보좌하는 궁내성 장관도 제국의 명확한 2인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만큼 제국은 2인자의 출현을 경계했다. 특정 인물이 공로를 쓸어 담고 황제의 총애를 받아 2인자 행세를 할 수는 있지만, 2인자 ‘직책’을 공식적으로 만들 일은 결코 없다. 그렇다면 제국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2인자라는 게 존재할 테니까.
‘그렇다고 궁내성 장관보다 아래인 직책으로 만들면 국무총괄이라는 의미가 없지.’
국무를 총괄한다면서 일개 장관보다 아래에 있다? 시작부터 권위를 세우기는커녕 비웃음만 당할 직책이다. 행정력은 행정력대로 소모하고, 실속은 실속대로 놓치는 미친 결과다.
그러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국무총괄장관 신설은 일종의 협박이다. 아마 바닥에 떨어뜨린 것도 내가 관심을 가지게 고의로 떨어뜨린 것일 터.
‘환장하겠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그냥 입 다물고 감찰성 장관으로 지낼지, 아니면 국무총괄이라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름을 짊어질지. 네가 편한 거로 선택하라는 협박.
물론 실행할 가능성이 낮은 협박은 무시하면 그만이다. 모른 척하고 감찰성 장관직에서 내려올 수 있다.
그런데, 이 협박이 정말로 실행된다면? 황제가 무조건 이성적인 결정만 내릴 거라고 확신할 수 있나? 지금 그 미친놈의 이성에 내 명운을 걸라고?
‘안 돼.’
그럴 수는 없다. 내 명운을 다른 놈도 아닌 그 새끼한테 맡길 수는 없어.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은 거냐…
***
장관들의 보고를 들은 뒤, 느긋하게 집무실로 복귀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음, 수고하는군. 짐이 없는 동안 찾아온 사람이 있나?”
“감찰성 장관이 안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딱 원하는 대답이 돌아와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신의 퇴직이 걸린 문제니 장관이 먼저 와있을 거라는 건 예상했다. 또한 장관의 성격상 바닥에 떨어진 서류에 바로 시선을 보낼 게 뻔하니, 국무총괄장관에 대한 안건도 보지 않았겠나.
지금쯤이면 내 최종 제안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장관도 마음의 결정을 했을 터. 이제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가면 된다.
“장관. 오래 기다렸나?”
위풍당당히 문을 열자, 의자에 축 늘어진 채 앉아있는 장관이 보였다.
‘저런.’
절로 숙연해지는 모습이라 마음이 아팠다. 아무래도 정신적 충격이 컸던 모양이야.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앉아있게. 뭘 굳이 일어서서 그러나.”
정신적 충격이 클 장관을 빠르게 달래기 위하여 상석에 앉았다. 장관을 이 상태로 오래 방치하면 눈이 제대로 뒤집힐 수도 있다. 그건 곤란한 일이지.
“봤나?”
“송구하오나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우리 사이에 번거롭게 돌려 말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말하세. 그거 봤냐고.”
손가락으로 서류를 가리키자 장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면서 굳이 다시 묻다니. 사람 귀찮게 하고 있어.
“국무총괄장관. 공작도 다섯 명인 제국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직책이지. 어찌 일개 개인이 제국의 2인자로 군림하며, 모든 귀족들과 관료들을 아우르겠나.”
“실로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허나 장관의 공로와 능력, 충성심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국무총괄장관은 딱 장관을 위해 임시직으로 신설하고, 이후에는 폐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 말에 장관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물론, 짐도 일시적으로나마 2인자인 직책을 만드는 건 원치 않네. 그저 장관이 내년이면 공작 대리가 되니, 권위에 맞는 직책을 고민하다가 잠시 떠올린 것에 불과하지.”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전승공도 명목상으로는 전쟁성 장관의 휘하인 부사령관입니다. 허나 이 제국에서 그 누가 전승공의 권위를 의심하겠습니까.”
‘호오.’
속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이놈, 그사이에 나름의 반박을 준비했어.
“장관의 말이 옳다. 그렇기에 짐도 국무총괄장관이라는 이례적 직책이 아닌 기존의 직책을 장관에게 하사하는 걸 고려했지.”
“예?”
“뒷면을 보라.”
그제야 장관은 황급히 서류의 뒷면을 살폈다.
그 처절한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국무총괄장관이라는 단어에 혼이 나갔으면 뒷면을 살필 생각도 못 했을까.
“제국의회, 의장?”
“정확히는 종신 의장일세. 제국백인 의원들 위에 서는 의장. 공작 대리라면 마땅히 그 정도는 해야지. 공작이 제국백들과 대등한 자리에 설 수는 없지 않나?”
장관의 눈동자가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국무총괄장관이라는 신설직을 맡기, 제국의회 종신 의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짐을 짊어지기. 과연 장관은 무엇을 선택할까.
“장관.”
“…하명하소서.”
“둘 다 싫지?”
물론 나는 둘 다 장관에게 떠넘길 생각이 없다.
“폐하, 께옵서 하사하시는 직책이라면, 소신이 어찌, 거부하겠나이까.”
그 와중에 어떻게든 정중히 말하는 장관의 인내심에 감탄했다.
동시에 이 이상 압박하면 참사가 터질 거라는 것을 느꼈다. 이제 진짜 목적을 꺼내야겠어.
“우리 계약서 하나 쓰지. 짐이 장관에게 감찰성 장관직 복직을 명하면, 군말 없이 복직하겠다는 계약서 말일세.”
“폐, 폐하?”
“그것만 쓰면 오늘 당장이라도 장관직을 해제하도록 하지. 어떤가?”
사실 이게 진짜 목적이었다. 장관의 눈앞에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재앙을 두 개나 흔들고, 그 뒤에 받아들일 수 있는 시련을 강요하는 것.
‘내가 이 정도는 양보해야지.’
처음에는 아예 감찰성 장관직 해제도 없던 일로 하려고 했으나, 장관에게 과한 정신적 충격을 주고 그냥 넘어가면 후환이 두렵다.
과도하게 놀렸다면 그에 맞는 보상을 주는 것. 그래야 장관도 오래오래 제국을 위하여 헌신하지 않겠나.
‘어차피 장관 성격이면 야인인 상태에서도 일하게 돼있어.’
결정적으로 장관이라면 감찰성 장관직이 해제된 상태에서도 온갖 업무를 찾아다닐 거다. 본인만 모르는 거지, 장관의 성실함은 직책 때문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 때문이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좋다. 이제 장관이 엄한 곳에서 엄한 일을 해도 나를 원망하지는 못한다. 나는 분명 장관직 해제라는 큰 양보를 해줬음에도, 장관이 자발적으로 일을 한 것이니.
“폐하의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뭘 은혜까지야.”
내가 더 고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