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31)
로판 속 공무원 831화(832/945)
오늘 당장이라도 장관직을 해제하겠다는 황제의 장담은 거짓이 아니었다.
“자, 천천히 읽어보게. 짧은 계약서니 장난칠 구석도 없지만, 그래도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앉은 자리에서 쓱쓱 계약서를 작성한 황제는 곧바로 나에게 계약서와 만년필을 건넸다. 보고 마음에 들면 바로 서명하라는 것처럼.
[ 1. 감찰성 장관,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의 신혼 및 육아 휴가가 진행되는 동안 감찰성 장관직을 일시 해제한다. 신혼 및 육아 휴가가 마무리되는 시점은 차후 논하도록 한다.2.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은 황제의 부름에 무조건적으로 복직해야 하며, 이는 1회에 한한다.
3.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은 1회의 복직 이후, 황제의 동의 없이 장관직에서 물러날 수 없다. ]
‘오…’
그리고 계약서는 황제의 말처럼 장난친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명확한 장관직 해제 조건, 해제 이후 군말 없이 복직하라는 약속, 복직까지 완료되면 그 이후는 서로 골머리 앓을 필요가 없다는 정리까지. 고작 3가지 조항이 작성된 계약서지만 필요한 건 다 들어가 있었다.
이런 계약서라면 서명할 수 있다. 일단 장관직에서 물러난다는 목적은 달성했고, 무조건 복직도 1회로 제한되지 않았나. 내가 70세나 80세에 은퇴한 이후, 갑자기 황제가 이 계약서를 꺼내 들어 ‘무조건 복직한다고 했지?’ 같은 미친 명령을 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최고의 결과는 복직을 명령했을 때 배째라 버티는 거지만, 애석하게도 황제는 진짜로 배를 쨀 수 있다는 걸 과시했다. 그러면 더 이상 욕심부리지 말고 넘어가야지.
물론 신혼 및 육아 휴가 마무리 시점을 차후 논한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나, 논한다는 표현을 썼으니 황제가 일방적으로 통보하지는 않을 거다. 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복직 시점도 내가 조절할 수 있다는 뜻.
“서명하겠습니다.”
빠르게 서명을 하고 계약서를 돌려주자, 황제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서를 받았다.
“당분간은 장관이 아니라 제국백이라고 불러야겠군. 아니, 대부라고 부르는 게 나으려나?”
“그러면 소신이 폐하의 대부인 것 같지 않습니까. 실로 황공한 일이옵니다.”
“그럼 편히 타일글레헨이라고 부르겠네.”
타일글레헨보다는 제국백이나 백작이 더 편한 것 같지만, 존엄하신 황제께서 타일글레헨으로 부르신다니 그러려니 했다.
그깟 칭호에 무슨 의미가 있으랴. 중요한 것은 내가 장관직에서 탈출했다는 것인데.
“그리고 감찰성은 한동안 장관 비서의 권한 대행 체제로 가고, 비서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짐이 보고를 받는 것으로 하지. 어떤가?”
“폐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거 참. 초대 장관이 감찰성 창립부터 휴가 중인 것도 우스운 일인데, 이제는 아예 공석이라. 역사상 이런 일이 어디 있었을까.”
픽 웃음을 흘리는 황제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나도 내 입장이 독특하고 기묘하다는 건 알고 있다. 초대 장관이라면 그 어떠한 장관보다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부하들을 이끌어야 하는데, 나는 분기에 한 번 얼굴을 비칠까 말까 하고 있잖아. 그러던 놈이 이제는 아예 장관 자리에서 내려온다고 한다.
비록 휴가가 끝나면 다시 복직한다는 조건이나, 아무튼 해직은 해직. 감찰성을 포함하여 온 행정부가 당혹감에 빠져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불특정 다수의 당혹감보다는 내 행복이 더 중요해.
‘솔직히 휴가 기간 동안 열심히 일하기도 했잖아.’
내 첫 결혼부터 지금까지. 행정부 전체가 세운 공로보다 나 혼자서 세운 공로가 더 클 수도 있다. 이러면 일시 해임이 아니라 영구 퇴직을 해도 무죄가 아닐까?
애석하게도 영구 퇴직은 저 계약서에 서명을 하면서 물 건너 갔지만.
“참, 백작. 황후가 선물 고맙다고 하더군.”
그 와중에 타일글레헨이라 부른다던 황제는 자연스레 백작이라는 칭호를 입에 담았다.
그래, 다섯 글자보다는 당연히 두 글자가 편하지. 결국 이렇게 될 거면서 뭐 하러 타일글레헨 운운한 건지.
“소신이 아닌 부인이 심사숙고하여 고른 선물입니다. 소신이 받을 감사가 아니오니, 부디 말씀을 거두어주소서.”
“백작이 에르제베트와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절대 사오지 않았을 선물이라고 했네. 에르제베트의 오랜 친우이기도 한 황후의 생각이니, 백작이 이해하고 넘어가게나.”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이라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없었다면 에리가 국내 여행이라는 느긋한 활동을 했을까? 여행이 아닌 업무 중이었다면 조카들의 선물을 바리바리 챙겼을까?
‘그럴 리 없지.’
이건 황후의 말이 맞다. 선물을 산 건 에리지만 그 계기는 나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백작. 계약서에는 미처 적지 못한 내용이네만, 백작의 해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을 걸세.”
“예?”
“일단 주먹부터 풀게. 백작이 그러면 짐도 무서워.”
그 말에 황급히 주먹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내 정신 좀 봐. 예민한 문제다 보니 반사적으로 주먹이 튀쳐나갈 준비를 했다.
“백작이 워낙 부인 복과 자식 복이 많아서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이 긴 휴가를 즐기고 있으나, 일단 휴가 중인 건 변함이 없지 않나. 헌데 휴가 중인 관료를 직위 해제한다는 전례가 생겨보게. 관료들이 마음 놓고 혼인을 하겠나? 자식은 또 어떻게 낳고.”
“아.”
“그러니 백작은 공식적으로 계속 장관이어야 하네. 다른 관료들에게 혼인을 하고 돌아오니 자리가 사라져 있고, 자식을 낳고 돌아오니 해임 당했다─ 라는 선례가 생기지 않게.”
“이해했습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라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감탄했다. 나는 내 목에 묶인 족쇄를 푸는 걸로도 벅차지만, 황제는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며 일을 처리해야 하는구나. 신혼 휴가와 육아 휴가가 악용될 거라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동시에 조금 미안했다. 드물게도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황제에게 명치빵을 날릴 뻔했으니.
“…저, 하온데 폐하.”
“말하게.”
“공식적으로 소인이 장관이라면, 어찌 사건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내 의문에 황제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원래 휴가 중인 관료는 무슨 광경을 보든 그냥 지나간다네, 백작. 백작은 그냥 마음의 짐만 내려놓으면 돼.”
바로 납득하고 말았다.
승전보를 들고 저택에 복귀했다.
“장관직에서, 해임됐다고요?”
“응. 나 이제 백수야.”
그리고 이 기쁜 승전보를 가족들에게 알려줬다. 공식적인 해임도 아니고 영구적인 해임도 아니나, 아무튼 장관직에서 물러났다고.
“이제 휴가 중에 마음 졸일 필요 없어. 아무 직책도 없는 백수가 일할 필요는 없잖아? 폐하도 내 심정을 헤아려주셔서, 휴가가 끝나기 전까지는 백수로 지내는 거야.”
“저, 그러면 공식적인 발표가 없다는 건…?”
“내가 이 시기에 공식 해임되면 휴가 중에 자리가 사라지는 거니까. 그런 선례가 생기는 걸 막기 위해 쉬쉬 넘어가는 거지.”
친절한 부연 설명에 마르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휴가 중에 고생하는 신하를 챙겨주고, 훗날 신하들에게 악용될 소지가 있는 선례를 저지했다. 이 얼마나 완벽하고 깔끔한 조치란 말인가. 마르도 황제의 보기 드문 현명함과 자비에 놀랐을 거다.
사실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나다. ‘일시’라는 딱지가 붙었지만, 내 오랜 꿈이었던 퇴직을 이루어냈으니까.
‘부디 휴가가 영원하기를.’
양심 없는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진심이다. 내 휴가가 영원하다면 백수 생활도 영원할 터.
“아빠.”
“응, 페디야. 왜?”
“해임이 모야? 조은거야?”
순수함이 가득한 페디의 물음에 순간 입이 닫히고 말았다. 지금 닫지 않으면 내 이성과 별개로 ‘당연히 좋지.’ 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건 곤란한 일이다. 해임이 좋은 일인 건 맞지만, 아직 어린 페디에게 보편적인 상식과 어긋나는 지식을 심어줄 수는 없다.
“해임이라는 걸 하게 되면 시간이 많아지거든? 그래서 아빠가 우리 페디랑 더 많이 놀아줄 수 있어.”
그렇기에 잠시 고민하다가 적절한 대답을 내놓았다.
좋냐는 질문에는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고, 그저 해임의 결과만 말하는 답변. 이 아빠가 시간이 많아져서 페디와 놀 시간도 많아졌다는 기쁜 답변.
당장은 이 정도 답변으로도 충분하다. 페디에게 중요한 건 해임의 구체적 정의나 사유, 여파가 아니라 아빠와의 시간일─
“해임이면 나랑 놀 시간 만아지는거!?”
페디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쟝생이! 쟝생이 어딧써!”
이윽고 시간이 많아진 아빠를 매정히 무시한 채, 저택 어딘가에 있을 장생이를 찾아 나섰다.
“무슨 일이냐. 잠깐 눈 붙이고 있었는…”
“쟝생이! 오늘 해임이야!”
“뭐?”
다행히 장생이는 멀지 않은 곳에서 휴식 중이었는지, 페디의 난데없는 해고 선언이 울려 퍼졌다.
곤란하다. 아무래도 페디한테 해임의 의미를 잘못 설명한 것 같아. 좀 복잡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제대로 설명해야 했는데.
“…분명 해임이라고 했지! 그 말, 무르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쟈, 쟝생이! 어디가!”
뒤이어 페디와 장생이의 목소리가 들린 방향에서 장생이가 우다다다 달려왔다.
저 짧은 다리로 어떻게 저런 속도가 나오는 건지 의문이나, 그래봤자 짐승의 질주에 불과하다.
“페디 두고 어디 가.”
“주인! 주인도 들었지 않나! 난 해임 통보를 받았다! 난 자유야!”
정신없이 달려가던 장생이를 붙잡자 기괴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어. 개처럼 생겼다고 진짜 개소리를 하면 어떡해.
“네 고용자는 페디가 아니라 나야.”
“크흣…!”
단호한 정정에 장생이는 분하다는 듯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실로 추한 모습이다. 아이들과 노는 걸 진심으로 피하기 위해, 본인도 억지라는 걸 알면서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 발악하는 꼴이라니. 한때 악신이자 현재 성수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안타깝고 딱하지 않나.
‘설마 나도 이런 모습인가?’
문득 불안해졌다. 내가 장생이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과 남들이 나를 보며 느끼는 감정. 그 두 감정이 비슷하다면 어떡하지? 나도 해임이 걸리면 미친개처럼 달려드는 타입이기는 한데.
…
‘아니겠지.’
고민은 짧았다. 설마 이족보행 인간인 내가 사족보행 개보다 못할까.
적어도 내가 이 정도까지는 아닐 거다.
***
장생이를 페디에게 넘겨주는 칼을 보며 조용히 입술을 우물거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참아야 한다. 기껏 기분 좋게 돌아온 칼을 슬프게 할 수는 없으니까.
“이제 휴가 중에 마음 졸일 필요 없어. 아무 직책도 없는 백수가 일할 필요는 없잖아? 폐하도 내 심정을 헤아려주셔서, 휴가가 끝나기 전까지는 백수로 지내는 거야.”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거품처럼 사라질 희망. 그 가녀린 희망을 내 손으로 없앨 수는 없으니까.
‘조만간 아르메인에도 갈 텐데.’
라테르 왕자와 차기 성자 타니안의 결혼식에 참석한 칼. 그렇다면 류티스 왕자의 결혼식에도 참석하는 건 사실상 확정이다.
헌데 아르메인에 간 칼이, 류티스 왕자에게 국보급 검을 선물한 칼이 아르메인에서 아무 소란 없이 지낼 수 있을까? 절대 그럴 리 없다.
칼은 장관이라서 바쁜 게 아니다. 온갖 공로와 인맥을 쌓은 칼, 그 자체라서 바쁜 것뿐이다. 칼이 장관직에서 물러나도 칼의 기대처럼 마음 편히 지낼 수는 없다.
‘참자.’
그러나 그 잔혹한 진실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어차피 알게 될 진실이라면 그전에 조금이라도 기뻐하는 게 좋으니.
“마르? 무슨 생각 해?”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그, 폐하께서 참 사려 깊으시다 싶어서요.”
칼이 장관직에서 물러나도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고 계실 텐데. 굳이 칼에게 그런 진실을 알려주지 않은 마음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