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37)
로판 속 공무원 837화(838/945)
현재 살아있는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원은 전승공, 첫째 장인어른, 트릭시, 전대 궁내성 장관, 나. 이렇게 다섯 명이다.
솔직히 어디 가서 말하기 민망한 라인업이다. 황제의 장인이자 북방 정벌 1등 공신, 30년 전에 동부 왕국들을 제압한 전쟁 영웅, 존재 자체로도 전쟁 억지력을 지닌 마법의 정점, 상황과 함께 제국을 재건한 명신. 이 사이에 내 이름이 끼어 있는 건 좀 그렇잖아. 업적을 떠나서 연륜과 권위 차이가 극심하다.
허나 더욱 민망한 것은 나보다 먼저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원이 된 네 명조차 종자를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연장자도 종자가 없는데 가장 어린놈이 종자를 만들게 생겼어.
그것도 하나나 둘도 아닌 열하나를. 그것도 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열하나가 아니라 열둘인가?’
생각해 보니 성수들뿐만 아니라 리시안느도 종자로 삼아야 하지 않나? 리시안느는 성수들처럼 산책도 가고, 말도 할 수 있잖아. 성수들이 종자가 되면 리시안느도 종자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마왕군이네.’
덕분에 절로 실소가 나왔다. 전직 악신들과 전직 사왕으로 구성된 집단이라니. 진짜 마왕군도 이렇게 흉악한 구성을 자랑하지는 않을 거다.
아니, 그러면 마왕군보다 더한 것들을 종자로 삼게 될 난 뭐지? 대마신 같은 건가? 사실 이 세계의 최종 보스는 카간도 도르곤도 2황자도 아닌 나였나?
‘어쩌다 이 모양이 된 거냐.’
순간 악신들과 사왕을 제도에 흩뿌리며 시민들을 감시하는 대마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끔찍하다. 암살자가 내 심장에 성검을 꽂아도 올 게 왔구나─ 라는 마음으로 넘어가야 할 정도다.
“망할 소매치기범 새끼.”
착잡한 마음에 육성으로 원망을 내뱉고 말았다.
과할 정도로 편견 없는 새끼 때문에, 사람이 아니라 맹수도 노리는 개방적인 새끼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다. 그놈만 아니었어도 종자 같은 걸 만들 일은 없었을 텐데.
마음 같아서는 그 소매치기범에게 사형이라도 내리고 싶으나, 사적인 감정 때문에 경범죄를 중범죄 취급하는 건 잔혹한 일이지.
대신 그놈이 또 소매치기를 했다가 걸렸다는 말이 들리면 손목이나 잘라버리자. 그 정도는 가능할 거야.
“티티야.”
– 멍?
“잠깐 네 친구들 좀 불러줄래? 말하는 애들 전부.”
– 멍!
내 부탁에 개껌을 씹고 있던 티티가 쪼르르 문밖으로 나갔다.
오늘을 기점으로 내 이름은 또다시 역사에 남을 거다. 크펠로펜 제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어쩌면 모든 국가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짐승 종자’를 임명한 기사로서.
사실 아직도 착잡하다. 자기 애완동물에게 작위나 직책을 주는 행위? 이거 아무리 봐도 뒤틀린 심성의 권신이 자기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잖아. 난 내가 기르는 개새끼에게도 어마어마한 작위를 줄 수 있다, 대충 그런 거.
‘두렵다.’
내 사후가 두렵다. 황제의 압박 때문에 선택한 이 길이 내 사후에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 ‘타일글레헨 백작은 권력에 미친 권신이래요.’ 같은 평가를 받으면 저승에서도 통곡할 자신이 있다.
“주인. 우리를 불렀다고?”
지금부터라도 황제와 독대를 하며 나눴던 대화, 은밀하게 받았던 명령을 전부 기록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장생이가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방금 불렀는데 벌써 올 줄은 몰랐다. 저 녀석이 가출 사태 이후로 확실히 성실해졌어.
“어, 들어와. 할 말이 있어서 그래.”
“혹시 산책 관련인가?”
“산책 관련은 맞는데, 취소하는 건 아니니 걱정 말고.”
내 말에 장생이는 평온한 표정을 지은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와중에 산책부터 걱정하는 걸 보면 이번 산책 허용 정책이 성수들에게 빛이자 소금이었던 모양이다. 진즉에 허용해 줄 걸 너무 늦게 풀어줬어.
“주인. 우리도 왔다.”
“불렀… 어…?”
“무슨 일입니까? 설마 산책이 취소되는 건 아니죠?”
이윽고 다른 성수들도 왁자지껄 떠들며 방으로 들어왔다.
빠른 집합이라 만족스러웠다. 빨리 모인 만큼 빨리 용무를 끝낼 수 있으니까. 이 녀석들을 종자로 삼았다는 보고를 황제에게 올리면 이 기묘한 업무도 끝나니까.
“아빠. 우리도 왓서.”
“우리도, 우리도!”
“가치 놀래!”
‘아.’
다만 성수들, 리시안느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같이 몰려온 건 예상외의 사태다.
‘어쩌지 이거.’
생각해 보니 아이들과 놀아주던 녀석들을 하나씩 부르는 게 아니라 동시에 부르면, 당연히 아이들도 우르르 몰려올 것이 뻔했다. 이 당연한 결과를 예상치 못하다니.
곤란하다. 기껏 아빠랑 놀 생각에 달려온 아이들을 그냥 보낼 수도 없고, 성수들을 도로 반송할 수도 없다.
진짜 어쩌지. 아이들 앞에서 종자 임명식이라도 해야 하나? 그런데 아이들 앞에서 ‘칭호: 짐승을 종자로 임명한’ 같은 걸 얻기는 싫은데.
“다들 돌아가라. 우리는 주인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일이 끝나면 우리가 알아서 가겠다.”
‘오.’
허나 내 걱정을 눈치챈 듯, 장생이가 아이들에게 당당히 입을 열었다.
감동했다. 이 주인을 생각해서 대변인 역할까지 해주는 애완동물. 이 얼마나 멋진 녀석인가.
“실어! 가치 잇슬거야!”
“쟝생이 납빠! 우리랑 안놀려구!”
“그아아아아앗!”
물론 멋진 것과 도움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장생이가 아이들 앞에 나서봤자 자기를 쥐어짜달라는 과시밖에 더 될까.
그래도 고맙다. 너의 헌신과 희생은 내가 기억할 거야.
***
아빠가 말하는애들을 전부 불럿다.
아빠가 우리 몰래 말하는 애들이랑 놀려는거 같아서 우리두 따라갓다. 우리두 아빠랑 말하는애들이랑 같이 놀고시퍼.
“얘들아. 아빠가 성수들이랑 중요한 걸 하려고 하는데, 조용히 보기만 해야 한다?”
“웅! 조용히 잇슬게!”
“조용히! 조용히!”
“조용히~”
“그래. 그럼 됐어.”
나랑 동생들 머리를 만져준 아빠가 이번애는 말하는애들을 만졋다.
“내가 하는 말에 적당히 맞장구만 치고.”
“주인. 일단 뭘 하려는 건지는 알려줘야지”
“나도 말하기 복잡해서. 그냥 대답만 해.”
다시 쟝생이를 만진 아빠는 벽애 잇던 검을 들엇다.
나, 저거 알아! 아빠껀데 엄쳥 무겁고 위험한거랫서! 그래서 나두 동생들두 누나두 못만져! 아빠만 만질쑤잇서!
“주, 주인?”
“본작은 에넨의 자비와 대제의 보우 아래, 하늘과 초목의 은총 아래 이 세상 만물의 지배권을 가지신 황제 폐하의 종. 명예로운 제국의회를 구성하는 의원이자 타일글레헨, 위리디아 등의 영주. 리시자리우네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허락받은 자이며, 크라시우스의 주인.”
“우와아…”
아빠가 뭔가 멋찌게 말해서 말해버렷어.
안대. 압빠가 조용히 잇스라구 햇잖아. 지금은 조용히 잇서야대!
“본작에게 허락된 무수한 영광 중, 황송하옵게도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원으로서의 권리를 사용할지니. 본작,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은 그대를 나의 충복, 나의 방패, 나의 검으로 삼을지어다.”
‘우와아아아.’
이번애는 조용히 놀랏다.
아빠, 멋쪄! 원래 멋쪄지만 이번앤 더 멋져!
‘본작!’
잘 모르겟지만 본작이란 말! 대단한거 같아!
추웅-복? 방패? 검? 그것두 죠아!
“그대는 본작의 검으로서 제국의 적을 응징하고, 본작의 방패로서 신민을 위협하는 자들을 막아내겠는가?”
“…그러겠다.”
“좋다. 그대는 이제부터 장생, 경… 일지니.”
쟝생 경! 그것도 멋쪄!
***
종자 임명식을 마치고 나니 급격한 피로감과 자괴감이 몰려왔다.
짐승을 상대로 종자 임명식을 하다니. 그나마 리시안느는 짐승이 아닌 사람 형태라지만, 인형 크기라서 오히려 더 비참했어.
‘빌어먹을 인생.’
그보다 짐승과 인형을 상대로 검까지 꺼내며 임명식을 진행하는 귀족이라. 내 나이가 27살이 아니라 7살이라면 모를까, 도저히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성수들을 따라 쪼르르 몰려왔던 아이들이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는데. 단순히 ‘너네 오늘부터 종자니까 힘내라. 파이팅.’ 같은 말만 하고 돌려보내면 아이들이 실망할 것 같았어.
그 증거라고 해야 할지, 실제로 종자 임명식을 진행하는 동안 페디의 눈이 유독 반짝거렸다. 모든 아이들이 처음 보는 행위에 호기심을 가졌지만 페디는 호기심을 넘어 동경의 눈빛에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임명식 중 실수를 하고 말았다. 정식 기사도 아닌 일개 종자에게 경이라는 칭호를 붙일 필요는 없었는데.
‘상관없나?’
사실 정석대로 따지려면 짐승을 종자로 임명한 것부터 글러먹었기는 해.
그래, 그러니 그냥 경으로 지내자. 사람들은 짐승이 종자라는 것에 주목하지, 종자가 경이라 불리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테니.
“장관님!”
“응?”
임명식 중 사용한 검을 멍하니 매만지던 중, 에리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장관님, 혹시 시간 있어요!?”
“나야 요즘은 넘치는 게 시간이지.”
바로 본론에 돌입하길래 나 또한 직설적으로 대답했다.
비록 편견 없는 소매치기범 하나 때문에 작은 이벤트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많은 건 사실이다. 단순히 휴가를 넘어 장관직까지 해제된 상태니까.
“그럼 저랑 이오네스에 가요!”
“엉?”
갑작스러운 요구인지라 절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이오네스. 제국 서부에 위치한 에리의 고향이자 다섯째 장인어른이 다스리는 땅. 애실론의 몰락 이후, 후작가 1, 2위를 다투는 가문의 영지인지라 상당한 번영을 자랑하는 곳.
물론 거창한 수식어를 다 떼고, 오직 에리의 고향이라는 것 자체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에리가 갑자기 이오네스에 가자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
“아니, 여행 때 안 가고 왜 이제야.”
하지만 시기가 다소 오묘했다. 얼마 전까지 신나게 국내 여행을 즐겼잖아. 그때 안 간 고향을 왜 이제야 가자는 건지 모르겠,
“며칠 후에 할머니가 90세 생신을 맞이하셔서요! 생신 기념 연회 연대요!”
“당장 가자.”
그런 이유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서 가야지.기사나 마법사도 90세까지 산 거면 장수한 편인데, 에리의 할머니는 기사도 마법사도 아닌 평범한 귀부인이다. 그런 분이 90세에 도달했다면 손녀사위로서 마땅히 참석해야 한다.
“아, 이왕이면 페렌츠도 같이 와달라고 하셨는데.”
“당연히 같이 가야지.”
마살로 후작가의 경사인데 페렌츠가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나. 비록 페렌츠의 성은 크라시우스지만, 몸속에 흐르는 피 절반은 마살로다.
외증조할머니의 90세 생신에 외증손자가 불참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지금이 아니면 언제 뵐지 모른다.’
매우 불경한 생각이지만, 올해를 놓치면 언제 페렌츠가 자기 외증조할머니를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