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38)
로판 속 공무원 838화(839/945)
생일은 몇 번을 맞이해도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 귀중한 날이다.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난 날,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 그런 날을 어찌 홀대할 수 있을까.
물론 아무리 귀중한 날이라도 계속 겪으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상징성이 희미해지기 마련. 아이들의 생일을 격하게 챙기는 것과 달리, 헌나라 어른이들의 생일은 적당히 박수와 덕담 정도로 넘어가는 것이 그 예다.
허나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던가. 수십 번의 생일을 맞이한 어른도 일정 나이에 도달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린아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 이상으로 늙은 어른의 생일도 축하해야 한다.
‘빅토리아 마살로 님의… 90번째 생신을… 축하… 하며…’
그렇기에 정성을 담아 예식용 검날에 글씨를 적었다. 어린아이의 생일 이상으로 축하해야 하는 어르신. 그 어르신이 처가 쪽 어르신이라면 정성이 아니라 영혼도 담아야 하니까.
본디 인간의 수명은 인간이 쟁취하는 게 아니라 신이 주는 것. 보통 신이 하사한 수명은 70에서 80 정도다. 이조차도 건강하게 살아왔다는 전제로 얻는 수명이며, 사실상 일반인이 70만 넘어도 잘 살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90세라고? 70대나 80대도 아닌 90? 심지어 그 주인공이 기사나 마법사 같은 존재도 아니야?
‘나이 자체로도 하나의 신분이 되는 거지.’
만약 평민이라도 90세까지 살아남았다면 황제의 선물을 받을 것이며, 거주지를 다스리는 영주나 지방관이 여는 축하연에 초대받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90세에 도달한 주인공이 일개 평민이 아닌 후작의 어머니다? 더 이상 가문의 경사가 아닌 제국의 경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마살로 가문과 직간접적으로 엮인 모든 가문에서 반응을 보일 테니까. 그리고 후작가와 얽힌 가문이 한둘이겠냐.
“…이거 정말 괜찮은 건가.”
예식용 검을 바라보다가 작게 혀를 찼다.
에리가 검이면 된다고 해서 검에다 덕담을 적기는 했는데, 과연 90세에 도달한 어르신에게 이런 선물을 드리는 것이 맞는 걸까. 검처럼 흉흉한 선물이 아니라 보석이나 의복 같은 부드러운 선물을 드리는 게 맞지 않을까?
찝찝하다. 어르신에게 날카로운 걸 드리다니. 뭔가 ‘오래 사셨으니 이제 명줄이 잘려도 괜찮죠?’ 라고 도발하는 느낌이야.
‘에리가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에리가 요구한 선물이니 무슨 문제가 생겨도 에리가 수습하겠지. 게다가 가족에게 은근히 약한 에리가 자기 할머니에게 이상한 선물을 줄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모르겠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에리의 조모님에게는 검이 적당한 선물일 거다. 마살로 가문의 손녀인 에리를 믿자.
이오네스 후작령에는 나와 에리, 페렌츠. 이렇게 셋만 가기로 했다.
처가 중 하나의 경사기에 가족들이 전부 갈 예정이었으나, 부인들끼리 무언가 수군거리더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
“저희도 직접 축하드리고 싶지만, 마살로 가문의 경사니 에리 언니만 주목받는 게 맞아요. 다른 부인들도 같이 있으면 에리 언니가 가져야 할 관심이 분산될걸요?”
“그건 그렇지.”
심지어 불참 사유가 에리를 위한 배려인지라 더 이상 권하기도 애매했다.
마살로 가문의 어르신을 위해 마살로 가문의 영지에서 열리는 연회다. 당연히 마살로 가문과 엮인 가문들이 참석할 테고, 마살로의 일원들에게 이목이 집중될 터. 그런 상황에서 에리가 아닌 다른 부인들이 참석하면 마르 말처럼 관심이 분산된다.
물론 부인이 여섯이니 관심도 6등분인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번 행사는 크라시우스 가문의 행사나 제국에서 주최하는 행사가 아닌 마살로의 행사잖아. 그럼 마살로에게 관심을 몰아주는 것이 옳다.
“난 같이 가도 상관없는뎅.”
“아니에요. 대부인께서 손녀와 외증손자를 보는 자리잖아요. 저희가 끼어있으면 곤란해요.”
에리의 작은 투정에 마르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대부인께서는 아직 페렌츠를 보지 못하셨죠? 아쉽게 언니의 결혼식 때도 오지 못하셨고요. 그 대신이라고 생각하면서 즐기세요. 언니가 주인공인 결혼식처럼, 이번 생신 연회도 언니가 주인공이 될 수 있게요.”
그 말에 에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이윽고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딱 하루만 즐길게! 연회는 하루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니까 두 번째 날에는 오는 거다?”
“네?”
“결혼식은 하루니 연회도 하루만 즐겨야지! 할머니도 손님이 많으면 좋아하실 거야!”
그러자 마르의 눈동자가 나에게 향했다. 이거 어떻게 반응하면 좋겠냐는 듯이.
“좋은 생각 같은데?”
그리고 에리가 드물게도 맞는 말을 한지라 바로 에리의 의견을 지지했다.
무려 후작가 어르신의 90세 생신 기념 연회다. 당일치기로 진행할 사이즈가 아니니, 최소한 닷새 정도는 연회가 이어지지 않겠나. 그렇다면 첫날은 에리가 손님들의 관심을 받고, 그 후로는 부인들이 같이 돌아다니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다.
“그, 그래도 될까요?”
“사실 이런 행사에는 가족 전부가 참여하는 게 정석이기는 해. 괜히 에리랑 페렌츠만 오면 대부인이 오해하실 수도 있어.”
자기 손녀와 외증손자가 크라시우스 가문 내에서 따돌림을 받는 게 아닌가─ 라는 오해를. 안 그래도 연로하신 분이 괜한 걱정을 하는 건 좀.
“조만간 바렌티에서도 공작 등극 기념 연회를 열 텐데, 그때 마르 혼자만 가면 이상하잖아. 그런 거야.”
“아.”
바렌티 공작가에서 연회를 열면 혼자 참석할 거냐, 라는 말을 하자 마르도 납득한 듯 탄성을 냈다.
그 모습에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1부인으로서 다른 부인들을 배려하는 건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너무 상대에만 신경 쓰다가 정작 자신은 돌보지 못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게다가 대부인께서 에리 걱정을 많이 하셨다 하더라고. 이제 걱정하시지 않게 사이좋은 모습을 잔뜩 보여드려야지.”
과연 결혼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던 손녀가 자식을 낳고, 다른 부인들과도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
이보다 더한 생신 선물이 어디 있을까 싶다.
***
기사도 마법사도 아닌 어머니가 70세에 이르렀을 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어머니께서는 일반인치고 건강한 분인 것 같아서.
어머니가 80세에 이르렀을 때는 에넨께 기도드렸다. 어머니에게 이토록 많은 시간을 허락해 주신 것에 감사를 담아서.
그 이후로 어머니의 연세가 81세, 82세, 83세가 될수록 기쁘면서도 불안했다. 어머니가 언제 하늘로 돌아가실지 알 수 없기에. 언제 우리 곁을 떠날지 알 수 없기에.
아닐 거라고, 어머니는 응당 100세까지는 사실 거라고 스스로 다독여도 이성은 냉정하게 외쳤다. 어머니의 연세를 생각하면 당장 내일 눈을 감으셔도 이상하지 않다고.
‘그렇게 10년이 흘렀군.’
그렇게 불안에 떨며 세월을 보내니, 80세였던 어머니가 어느덧 90세에 이른 상황.
이쯤 되면 불안감보다 막연한 기대가 솟구쳤다. 이거 어머니시라면 정말 100세에 도달하시지 않을까? 어쩌면 그 이상도 노릴 수 있지 않을까?
“난 내 외증손주가 결혼하는 거 보기 전까지는 절대 눈 못 감는다.”
혹은 어머니의 탐욕스러운 다짐 덕분에 버티신 걸 수도 있다.
에리의 결혼조차도 장담할 수 없었던 과거. 어머니는 그때부터 에리의 결혼도 아닌, 외증손주의 결혼을 부르짖으셨다. 가족끼리 농담 삼아 ‘어머니가 불사하시려나 보다.’ 라는 말을 했던 다짐이었지.
지금 생각하면 다행인 일이다. 만약 어머니께서 에리의 결혼을 목표로 삼으셨다면 위험했다. 목표를 잃은 자는 열정이 빠르게 식는 법이니.
‘페렌츠한테 늦게 결혼해 달라고 해야 하나.’
외할아버지로서 너무도 추한 생각이라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건 안될 일이지. 외할아버지가 외손자의 앞날을 막는 것도 기이한 일이고, 내가 그런 부탁을 했다는 것을 들키면 어머니에게 호된 꾸중을 들을 터.
그러니 우리 페렌츠의 결혼은 페렌츠에게 맡기자. 혹시 아나. 그때가 되면 어머니의 다짐이 ‘우리 페렌츠가 자식 낳는 거 보기 전에는 절대 눈 못 감는다.로 변할지.
“각하. 에르제베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오.’
절묘한 타이밍이라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침 페렌츠에 대한 생각을 할 때 에르제베트가 오다니.
“집사장. 그 아이도 어엿한 귀족가의 부인이거늘, 어찌 아가씨라고 부르는가. 타일글레헨 백작부인이 왔다고 하게.”
그러나 애써 감정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시집보낸 아이인데 아직도 아가씨라고 부르는가. 타일글레헨 백작부인이라는 훌륭한 호칭이 있으니,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에리를 백작부인이라 부를 것이다.
“죄송합니다, 각하.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집사장도 내 단호한 정정을 이해한 듯,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타일글레헨 백작과 타일글레헨 백작부인, 페렌츠 영식이 왔습니다.”
가문의 아가씨가 아닌 다른 가문의 귀빈이 온 것처럼 말하는 집사장. 그런 집사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대문에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저 백발과 흑발은 잊을 수가 없지.
“셋만 온 건가?”
“다른 분들은 연회 둘째 날에 방문한다고 합니다.”
“그렇군.”
사위의 배려에 다시 입꼬리가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부인들을 공평하게 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위다. 그런 사위가 다른 귀족들도 모이는 자리에서 에리만 대동했다라. 이는 마살로 가문을 위한 사위의 마음이겠지.
물론 연회 기간 내내 에리와 동행하는 것이 아닌 하루에 불과하나, 그 하루만 해도 어디인가. 단 하루에 불과해도 우리 에리가 사위와 단둘이 있는 모습을 과시할 수 있는데.
아니지. 단둘이 아니라 페렌츠까지 셋이지. 오붓한 부모와 자식의 모습이야.
‘…음?’
슬슬 1층으로 내려가 사위를 반길 준비를 하려던 찰나, 대문 쪽으로 매우 익숙한 형체가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
어머니다.
늙으면 서있는 것도 힘들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시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대문으로 전력 질주를 하고 계신다.
‘이게 무슨.’
순간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저 연세에 저런 속도를 내시는 거지? 내가 전력으로 달리는 것보다 빠른 것 같은데?
‘외증손주의 힘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 기적을 설명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