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39)
로판 속 공무원 839화(840/945)
마살로 가문은 제국 내에서도 순위권에 위치한 명문 가문이다. 황가와 공작가라는 부동의 서열을 제외하면 세 손가락 안에도 들어갈 명문가.
그래서인지 마살로 가문의 일원들은 빈틈없는 품위와 지성을 지니고 있으며, 권위에 걸맞은 능력 또한 자랑한다. 아무리 애실론이 몰락했다지만 순식간에 후작가 1, 2위 수준까지 치고 올라왔잖아. 그만한 저력이 있었다는 거지.
허나 조금 유감스럽게도 에리는 마살로 내에서 돌연변이로 태어난 존재다. 능력은 마살로 가문의 일원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나, 품위와 지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존재. 그게 에리였다.
그리고 오늘. 사실 에리는 돌연변이가 아니라 격세유전이 아니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정정하시네…’
90세의 나이임에도 맹렬하게 뛰어오는 어르신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거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솔직히 50세, 60세만 돼도 뛰기 싫은 것이 사람이다. 정말 절박한 상황이면 중년도 뛰게 만들지만, 어지간한 일이 아닌 이상 뛰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하지만 60을 가뿐히 넘은 어르신께서, 무려 90세에 도달한 어르신께서 건장한 청년처럼 달려오셨다. 지팡이 없이 걸어도 정정하다는 말을 들은 연세임에도, 걸음을 잘못 내디디면 그대로 뼈가 부러지지는 않을까 우려되는 연세임에도.
‘꿈인가?’
잠깐 현실을 부정했다. 최근 성수들과 종자 임명식을 하면서 심적 피로감이 심했지. 그래서 잠시 헛것을 보는 걸 수도 있다.
어쩌면 저기 달려오는 어르신은 어르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곱게 말아올린 백발은 세월의 흐름을 짊어진 백발이 아닌, 에리처럼 타고난 백발일 수도 있다.
“할머니!”
‘아니네.’
물론 현실 부정은 언제나 부질없게 끝나는 법. 에리의 확인 사살 덕에 저기 달려오는 어르신은 조모님이 맞는다는 결론이 나왔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무인도, 마법사도 아닌 일반인이 저렇게 정정할 수 있지? 90세 생신을 맞이한 것도 놀라운데, 거동이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 달리기가 가능하다고?
‘영약이라도 드신 건가.’
상당히 그럴듯한 추론이다. 사실 이 세계는 로맨스 판타지가 아니라 무협 세계가 아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하늘을 가르는 역천자도 존재했잖아. 그럼 무협이 맞는 것 같기도 해. 빌어먹을 천마 새끼.
“할머니! 제가 갈게요! 위험하니까 뛰지 마!”
아무튼 활짝 미소를 지은 에리는 조모님을 향해 달려갔다.
할머니를 사랑하는 손녀의 모습이라 절로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에리가 남들보다 독특하고 활기가 넘치기는 해도, 자기 가족한테는 약한 편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남한테 냉혹하면 뭐 어떤가. 자기 가족한테 잘 하면 그만이지.
“이 녀석아. 평소에 자주 놀러 왔으면 할미가 뛸 일도 없었을 거다. 이 할미는 하루하루 수명과 기싸움을 하는 중인데, 갑자기 픽 쓰러지면 어쩌려고 이제야 오는 게야.”
“할머니 또 그런다! 무서우니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나도 조모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다가가자, 에리와 조모님의 숨 막히는 대화가 들렸다.
어르신이 자신의 수명을 담보로 한 구박. 그 어마어마하고 파괴적인 구박은 누구도 막거나 피할 수 없는 공격이다. 나도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잖아.
“그리고 쓰러지기는 왜 쓰러져! 할머니, 외증손주 결혼하는 거 보기 전에는 절대 안 쓰러진다고 했잖아요!”
“하여간 자기 유리한 거는 절대 안 잊고. 대체 누구를 닮은 건지.”
“당연히 할머니 닮았지!”
히히 웃으며 조모님에게 팔짱을 끼는 에리. 조모님도 애교 넘치는 에리가 기꺼운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에리의 팔뚝을 후려치셨다.
“아파!”
“아프라고 때린 거니 당연하지.”
경쾌한 찰싹 소리에 흠칫 어깨를 떨고 말았다.
우리 조모님, 달리기만 잘 하시는 게 아니라 힘도 좋으시구나. 90세가 아니라 45세라고 해도 믿겠어.
“그럼 할미가 죽기 전에야 아슬아슬하게 온 손녀는 넘어가고.”
에리가 건 팔짱을 푼 조모님은 나에게 시선을 돌리시더니, 살짝 고개를 숙이셨다.
“이 늙은이를 가엽게 여기신 주께서 지상에 내려보낸 천사님. 이제야 얼굴을 보는군요.”
“대, 대부인! 고개를 들어주십시오! 어찌 대부인께서 일개 손녀사위에게 고개를 숙이십니까!”
예상치 못한 퍼포먼스라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내 품에 페렌츠가 안긴 상태만 아니라면 손까지 내저었을 거다.
신이 지상에 내려보낸 천사라니. 상당히 낯부끄러운 칭호인 건 둘째치더라도, 아내의 조모님에게 들을 말은 절대 아니다. 완전히 상급자를 대하는 것 같은 발언이잖아.
“하마터면 이 늙은이가 150살까지 살 뻔한 위기를 천사님이 해결해 주셨습니다. 사람이라면 응당 감사를 표하는 게 마땅하지요.”
그렇게 말씀하신 조모님이 고개를 들자, 마치 에리를 보는 것 같은 미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모습에 긴장이 풀리고 실소가 터졌다. 듣는 사람이 송구스러워지던 감사는 어디까지나 농담이라는 뜻이니.
‘격세유전 맞네.’
에리는 돌연변이가 아니라 조모님을 닮은 거였다. 조모님의 가치관을 이어 받은 거였어.
“물론 천사라도 지상에 내려왔으면 지상의 법도를 따라야지. 나나 자네, 둘 중 하나가 죽기 전까지는 손녀사위로서 대하겠네.”
“감사한 말씀입니다…”
눈물이 절로 나올 것 같은 말씀이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손녀사위로 대한다는 말이 이렇게 감동적인 말이었던가. 혹여나 조모님 생신 연회 기간 동안 조모님에게 존대를 듣는 미친 사위가 될까 봐 두려웠다.
“압빠. 누우-구?”
그 와중에 내 품에 가만히 안겨 있던 페렌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한 반응이다. 엄마는 처음 보는 어르신에게 찰싹 얻어 맞고, 아빠는 고개까지 숙였지 않나. 페렌츠 입장에서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거다.
“페렌츠, 인사드려. 페렌츠 외증조할머니야.”
“애… 증주… 할무니?”
허나 외증조할머니는 어린아이가 입에 담기에 너무도 어려운 단어. 덕분에 페렌츠는 떠듬떠듬 파편적으로나마 외증조할머니를 불렀다.
“편하게 큰할머니라고 부르려무나.”
“큰할무니!”
“옳지. 잘 하는구나.”
물론 외증조할머니든 애증주할무니든 딱히 달라지는 건 없다. 처음으로 외증손자를 본 외증조할머니는 어떤 말을 들어도 웃을 수 있을 테니까.
실제로 페렌츠를 향한 조모님의 얼굴은 태양과 비견될 정도로 밝았다. 에리와 나를 놀리면서도 웃고 계셨지만, 지금은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밝았다.
“어머니! 안에 계시지, 밖에 나오시면 어떡합니까!”
‘아.’
이윽고 조모님이 달려오셨던 방향에서 장인어른의 처절한 외침이 들렸다.
아무래도 90세 어르신의 전력 질주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조모님은 장인어른의 눈물겨운 설득 덕분에 다시 성으로 들어가셨다.
들어가시기 직전, 살아있는 동안 바깥바람 좀 쐬두는 게 죄냐는 푸념이 들렸지만 애써 못 들은 척했다. 같이 성으로 들어간 에리가 알아서 말동무라도 해주겠지.
“미안하네, 사위. 자네는 어머니를 처음 뵙는 거였지? 첫 대면부터 많이 놀랐겠어.”
그리고 몇 분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되어버린 장인어른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제야 인사드리는 못난 손녀사위에게 친밀히 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런 장인어른에게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조모님의 호의에 감사한 것은 진심이다. 나를 좋게 보지 않으셨다면 수명을 담보로 한 구박도, 듣는 사람 심장이 위태로운 농담도 하지 않으셨겠지.
이 또한 조모님 나름의 호의이자 애정이라고 생각하면 기꺼이 감수할 일이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사실 어머니께서 사위를 은인처럼 생각 중이셔서 말이야. 만약 사위가 어머니를 꺼려 한다면 많이 슬퍼하셨을 걸세.”
“저에게… 말입니까?”
“에리의 독특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 사람이지 않나. 당연히 은인처럼 보이지.”
차마 부정할 수 없는 말이라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에리가 마살로 가문의, 남부러울 것 없는 이오네스 후작의 아픈 손가락이라는 건 알 사람은 다 아는 비밀. 그 아픈 손가락은 조모님도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을 닮은 듯한 손녀기에 더더욱 아팠을 수도 있다. 나를 똑빼닮은 혈육이라 더 귀엽게 보이는데, 오히려 빼닮은 점 때문에 결혼이 힘들다? 그보다 억장 무너지는 일은 없다.
‘…조모님은 어떻게 하신 거지?’
문득 근원적인 의문에 도달했다. 원조 에리인 조모님은 멀쩡히 결혼하셔서 자식, 손주, 증손주까지 보셨잖아. 전대 이오네스 후작이 나 같은 사람이었나?
“어머니는 소싯적만 해도 전형적인 귀부인이셨지. 내가 후작위를 물려받은 이후로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셨는지, 저렇게 독특한 분이 되셨지만.”
내 의문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장인어른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민망하다. 졸지에 ‘장인어른의 어머니는 어떻게 결혼하신 거예요?’ 라고 물은 꼴이 됐어.
‘미친 사위…’
나 자신이 미워졌다.
***
90번째 생일이니 뭐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굳이 연회까지 열 필요가 있었나 싶다.
매년 겪는 생일이고, 매년 축하받는 생일이다. 몇 년 전부터는 매년이 아니라 매일 살아있다는 것에 축하받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번 생일 연회는 넘어가도 된다고, 하다못해 간소하게 하자고 몇 번이나 말했다. 물론 자식이란 것들은 이 늙은 어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지만.
‘기대도 안 했다.’
언짢지만 동시에 뿌듯했다. 그래도 내가 자식들을 제대로 키운 것 같아서. 내가 자식들을 망나니처럼 길렀다면 90세 생일 연회는커녕 70 전에 화병으로 죽었을 테니.
‘많이도 모였군.’
그래서 조금은 흡족한 마음으로 연회장을 둘러보니, 작년보다 몇 배나 많은 손님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사람들도 참 할 일 없는 사람들이다. 연회 중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리다니. 그냥 통신구로 축하 인사만 전하면 충분한데.
“할머니, 무슨 생각 하세요?”
“에리야. 이 할미가 100살까지 살면 이 연회장으로도 충분할까?”
역으로 질문을 하자 에리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100세 기념이면 황궁이라도 빌려야 하지 않을까요?”
“예끼, 이 녀석아.”
“으엑!”
참으로 불충스러운 말을 한 에리의 등을 내리쳤다. 어찌 일개 귀족의 생일을 축하하고자 고귀한 황궁을 사용한단 말인가.
“우리 아가. 너는 엄마 말고 아빠를 닮거라. 어찌 나이를 먹고도 이리 철이 없는지.”
“우웅.”
뒤이어 에리의 품에 있던 우리 외증손주를 가볍게 토닥였다.
아빠는 진중하고 성실한 사람이니, 부디 너는 아빠를 닮거라. 나나 에리를 닮지는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