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40)
로판 속 공무원 840화(841/945)
조모님의 90세 생신은 마살로 가문의 경사이니, 에리가 다른 귀족들의 주목을 받았으면 하는 부인들의 배려. 그 덕분에 연회 첫째 날은 나와 에리만 참석하기로 했다.
여섯 명 전원이 타일글레헨 백작부인으로서 내 옆에 있는 것보다 에리 단독으로 내 파트너 역할을 수행하는 게 돋보이니까. 6분의 1보다 1분의 1이 훨씬 많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진리다.
허나 부인들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에리가 내 유일 파트너로서 주목받는 일은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저 멀리 조모님, 페렌츠와 함께 히히 웃고 있는 에리를 바라봤다.
나와 에리는 졸지에 이산가족이 되어버렸다. 분명 같은 연회장에 있음에도 처량하게 갈라진 이산가족이.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연회 주인공인 조모님의 손녀사위로서, 현 마살로 가주인 장인어른의 사위로서 에리와 함께 연회장을 순례할 예정이었다. 연회에 참석해 준 귀족들에게 좋은 자리에 와줘서 감사하다고, 귀한 시간을 내준 은혜는 잊지 않겠다고 인사나 나누려고 했어.
하지만 페렌츠가 처음 보는 외증조할머니에게 극도의 관심을 보이자, 이 나약한 아비의 구상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나! 큰할무니! 가치!”
“우리 페렌츠가 이 큰할머니한테 벌써 효도를 하는구나.”
조모님 품에 안겨 똘망똘망하게 눈을 빛내던 페렌츠. 그런 페렌츠를 흡족하게 바라보며 자상하게 쓰다듬던 조모님.
그러니 어쩌겠나. 순순히 페렌츠를 조모님 품에 맡기고, 나는 나대로 연회장을 돌며 손님들과 인사를 하는 수밖에. 엄마인 에리는 페렌츠 곁을 떠날 수 없다며 내 곁을 떠났고.
“사위. 서운한가?”
그렇게 씁쓸히 할머니, 손녀, 외증손자 3대를 바라보고 있자, 나처럼 연회장을 배회 중이던 장인어른이 장난스레 물으셨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사실 서운한 걸로 따지면 에리가 더 심하겠죠. 저택에서는 제가 워낙 돌봐야 할 아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하긴, 그도 그렇군.”
에리의 친자식은 페렌츠 하나지만, 내 친자식은 페디부터 율리아까지 무려 아홉 명. 내가 아홉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돌보는 동안 알게 모르게 부인들을 서운하게 했을 수 있다.
그건 언제나 해맑은 에리도 마찬가지다. 에리도 사람인데 어찌 서운한 감정이 없을까. 그저 아이들과 관련된 일이니 이해하고 넘어간 거지. 이번에는 이해해야 할 사람이 에리에서 나로 바뀐 것뿐이다.
“그래도 저녁쯤에는 가족끼리 같이 있게나. 오늘이 아니면 에리랑 오붓하게 있을 기회도 없을 테니까.”
“페렌츠가 있으니 단둘은 힘들 것 같은데, 잠깐 장인어른께 맡겨도 되겠습니까?”
“하하, 그런 건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은 일이지. 언제든지 맡겨주게나.”
막내 외손자랑 놀아주는 상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장인어른의 표정은 급속도로 밝아졌다.
‘가족은 가족이구나.’
새삼 저기 계신 조모님도, 눈앞의 장인어른도, 나와 이산가족이 된 에리와 페렌츠도 마살로의 피를 공유하는 가족이라는 걸 절절히 느꼈다.
이게 따로따로 볼 때는 몰랐는데, 한자리에서 보니 웃는 얼굴이 묘하게 닮았어. 이게 핏줄의 힘인 건가?
“…으음.”
‘응?’
동네 인심 좋은 아저씨처럼 허허 웃던 장인어른의 표정이 빠른 속도로 굳었다.
마치 새 신발을 신고 가다가 흙탕물을 밟은 것처럼. 1000원을 들고 편의점에 갔더니 컵라면이 1050원인 걸 목격한 것처럼.
“오랜만에 보는구려, 이오네스 후작.”
‘아.’
허나 의문은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덕에 금방 풀렸다.
몇 년 전 북방 정벌 때, 매년 신년하례식 때 들었던 목소리. 자주 만나기는커녕 어쩌다 인사 정도만 나누는 사이지만, 상대의 신분 덕에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
마살로 가문의 라이벌인 디고 후작가의 가주. 제국 서부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라비르제 후작.
“오랜만은 무슨. 몇 주 전에도 통신구로 대화하지 않았나.”
장인어른이 퉁명스레 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등장했다.
“통신구가 편하기는 해도 직접 보는 것만은 못하지.”
“마종공의 부군이 앞에 있는데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
그 말에 작게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후작이 뒤에 있는 걸 알면서도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건 큰 무례이니.
“라비르제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타일글레헨 백작도 오랜만이오. 신년하례식 이후로는 처음인가?”
“예. 평소에는 각하를 뵐 일이 드물지 않습니까. 그래도 각하의 외손녀는 종종 보니 기쁠 따름입니다.”
앙리에타를 언급하자 라비르제 후작의 얼굴이 급속도로 밝아졌다.
장인어른 입장에서 라비르제 후작은 애증 가득한 숙적이겠지만, 나에게 있어 후작은 페디 친구의 외할아버지다. 장인어른처럼 막 대할 수는 없지.
“쯧.”
그러니 언짢다는 듯 혀를 차는 건 참아주셨으면 좋겠다. 아무리 그래도 후작 사이에 끼이는 건 조금 부담스러워.
“앙리에타도 백작의 저택에서 놀고 올 때마다 눈에 띄게 기뻐했지. 또래 친구가 없어서 걱정이 많았는데, 백작 덕에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었어. 정말 고맙네.”
“과찬이십니다.”
“자네도 훈훈한 분위기 망치지 말고 인상 풀게. 거 가족 일로도 틱틱거리기 있는가?”
라비르제 후작의 말에 살며시 고개를 돌리자, 평온한 표정의 장인어른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가족이라는 만능 단어 덕분에 언짢은 감정을 가라앉히신 모양이다.
확실히 화를 내기에는 민망한 상황이지. 자기 가족의 생일을 기념하는 연회장에서, 남의 가족을 홀대하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인다? 보통 인성으로는 할 수 없는 짓이다.
“아무튼 대부인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그분의 훌륭한 내조 덕분에 오늘날 마살로 가문이 있는 것이니, 앞으로 수십 년은 속이 쓰리겠지만.”
게다가 라비르제 후작은 조모님의 만수무강과 수십 년 추가 장수까지 기원했다. 이러면 이 자리에서만큼은 라비르제 후작을 라이벌이 아닌 순수한 손님으로 대하는 것이 도리.
“어쩌겠나. 우리 아버지께서 부인 복이 좋으셨던 것을. 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물론 손님으로 받아들여도 은근한 도발과 견제를 날리는 건 포기할 수 없는 모양이다.
“고, 공작 각하!”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응?’
그렇게 두 후작이 악수를 나누며 임시 휴전을 맺는 사이, 연회장 입구 쪽에서 우렁찬 인사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공작?’
의외의 단어인지라 절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공작이라니, 설마 트릭시가 온 건가? 아니야. 다른 부인들은 내일이나 모레에 오기로 했잖아. 트릭시가 약속을 어기고 독단적인 행동을 할 성격은 아니다.
…
‘설마.’
이윽고 본능적으로 떠오른 결론에 무심코 침을 삼켰다.
트릭시는 아니고, 형님은 공작 등극 연회를 준비 중이라 바쁘고, 전승공은 말할 것도 없고, 황금공은 어지간한 일이 아닌 이상 영지에만 머무르고.
다섯 공작 중에서 하나하나 소거하다 보니 자연스레 한 명만 남았다. 가장 아니었으면 하는 사람이.
“흐히히! 다들 오래앤-마니야! 몃딸만애 보눈거지!?”
‘아.’
익숙하고도 요란한 목소리 덕에 침통히 눈을 감고 말았다.
저 알코올 가득한 목소리는 분명 현명공이다. 제국 서부의 맹주이자 관리자인 체네스 공작, 현명공.
‘당연한 걸 잊고 있었다.’
마살로 가문은 제국 서부의 유력자. 그런 만큼 서부의 맹주인 현명공이 마살로 가문의 경사에 얼굴을 비치는 건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제국 서부는 현명공의 영역이나 마찬가지인데, 자기 영역에서 90세까지 장수한 어르신이 등장했잖아. 아무리 알코올 중독 영지 히키코모리인 현명공이라도 행차하는 수밖에 없다. 이건 공작의 권위와 리더십이 걸린 문제니까.
“이오내쓰 후쟉! 어딧써!? 나 선물 쟌뜩가져왓는대!”
“사위. 내가 부탁이 하나 있네만.”
“외숙모께서 많이 요란하시기는 하지만 남을 해할 분은 아닙니다. 염려치 말고 가시지요.”
무슨 부탁을 할지 알 것 같아 빠르게 손절을 했다.
죄송하지만 한 명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한 명은 살아야지. 현명공의 관심은 장인어른에게 몰아두고, 나는 그사이에 슬쩍 빠지면─
“차잣따!”
‘뭐야.’
아니, 뭐야. 분명 막 연회장에 들어왔잖아. 언제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으잉? 죠오-까랑 라비르재 후쟉도 잇썼네!?”
해맑기 그지없는 목소리였지만 나에게는 사신의 목소리로 들렸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갑자기 등장한 현명공. 이보다 두렵고 끔찍한 일이 얼마나 있을까.
“역씨 연회눈 꼬박꼬박 챰석해야대! 이러케죠은 사람두리 잔뜩! 잇짜나!”
“실로 과분한 말씀입니다, 각하.”
“에잉! 가죡끼리 그런말하는거 아냐! 나랑 후쟈근조카랑 이어진 가죡이자나!”
현명공의 말에 슬며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가 아니었어도 현명공은 연회에 참석했겠지만, 어째 나 때문에 왔다는 말로 들렸으니.
현명공의 등장으로 연회의 분위기가 180도 돌변했다. 훈훈하고 온화한 연회에서 시끄럽고 난리법석인 연회로.
“때부인! 생신 진쨔진쨔 추카드려요! 아프로 100쌀! 110쌀! 120쌀까지도건강하새요!”
“이런. 130살은 무리인 겁니까?”
“이이잉! 그런뜻 아닌거 알면서!”
그래도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현명공은 단순히 시끄럽기만 할 뿐 딱히 무례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조모님도 현명공의 축하에 그저 미소를 지으셨고.
역시 인생의 절반 이상을 꽐라로 살아온 사람, 90년 동안 연륜을 쌓아온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도저히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 성향인데도 그럭저럭 대화가 이어지잖아. 전자는 길고 긴 꽐라 경험을 토대로 선을 조절할 수 있고, 후자는 어떤 사람이라도 웃으며 대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 같다.
“죠카며누리도 안뇽안뇽!”
“외숙모님도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히히, 나야 어어어어엄쳥! 잘지냇찌!”
“저도요! 좋은 자리에서 좋은 분을 뵈니 더 좋아요!”
“우리 죠카며누리, 말도얘뿌게 잘해!”
에리는 뭐, 평상시의 에리니 넘어가자.
“그러어엄~ 이번애는 기엽꼬 기여운 뻬렌쯔를─!”
“각하. 이 연회는 이 늙은이를 위한 연회니, 늙은이의 즐거움을 빼앗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으에?”
아무튼 태풍처럼 인사를 나누던 현명공의 마수가 페렌츠에게도 닿으려던 찰나, 페렌츠를 안고 있던 조모님이 정중하고도 단호하게 손길을 막았다.
놀랐다. 설마 페렌츠를 위해 공작의 행보도 막으시다니.
“이 늙은이는 앞으로 얼마나 이 아이를 만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양보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방패를 내세우면서.
“이잉, 치사해!”
현명공도 수명 앞에서는 답이 없는지, 투정만 부리며 손을 거두었다.
대단하다, 조모님. 역시 원조 에리는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