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41)
로판 속 공무원 841화(842/945)
외숙부, 외조부모님 정도를 제외하면 현명공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희대의 중흥 군주인 상황조차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었던 걸어 다니는 폭풍.살아있는 전설인 트릭시가 내 부인이 되자, 바로 조카며느리라며 말을 놓아버린 기적의 인물. 그런 인물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허나 오늘, 나는 기적을 보았다. 외숙부와 외조부모님 외의 다른 존재가 현명공의 공세를 막아내는 걸 직관하게 됐다.
“나 진쨔 한번만 아느면안대여? 나듀 빼랜쯔 자주못뽄단 말야!”
“앞으로 수십 년은 더 볼 수 있지 않으십니까. 저는 수십 년이 아니라 수십 일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진쨔 치사해!”
안절부절못하는 현명공과 덤덤히 고개를 내젓는 에리의 조모님. 실로 경이로운 광경이라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 광경을 바라봤다.
과연 연륜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상황이 화려하게 칼춤을 추던 시절에도, 리브노만 직계 말기 암군 라인 시절에도 살아남은 조모님이지 않나. 마치 살아남은 자가 강자라는 걸 입증하는 것처럼 공작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으셨다.
이걸 다르게 생각하면 나이 90 먹은 후작가 어르신 정도는 돼야 현명공을 막을 수 있다는 거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현명공의 대항마가 생겼다는 게 중요한 거지.
‘마살로가 후작가 1, 2위를 다투는 이유가 있었어.’
방심하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살로 가문이 살론 공작가의 뒤를 이은 서부의 거물인 것? 디고 후작가와의 경쟁에서 언제나 우위에 선 것? 라비르제 후작의 말처럼 조모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전대 이오네스 후작 시기부터 가문을 지탱한 위대한 영웅이 있어서야.
“죠카! 죠카가 때부인좀 설뜩해져! 나듀 뻬렌쯔 만질래!”
“이 연회는 대부인께서 주인공이시지 않습니까. 제가 비록 페렌츠의 아비기는 하나, 대부인도 외증조모님이시고요. 오늘은 포기하시죠.”
“이잉, 죠카너무해! 날 배신햇써!”
배신이라니. 애초에 같은 편인 적도 없었는데.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지만 겨우 참았다. 그 말을 내뱉었다면 현명공의 진심 주정과 마주했을 수 있으니.
“구럼 죠카! 연해 끗나면 죠카지브로 놀러갈깨! 그땐 뻬렌쯔랑 다른애들 쟌뜩 만져야지!”
“예?”
난데없는 재앙 예고에 흠칫 어깨를 떨고 말았다.
아니, 결론이 왜 그렇게 흘러가는 건데. 마살로 가문에서 생긴 서운함은 마살로에서 풀어야지, 왜 크라시우스에서 풀려는 거지?
“빼랜쯔도 죠치!?”
“우웅!”
허나 거부하기에는 페렌츠가 순식간에 포섭되고 말았다.
정말 기이하게도, 정말 놀랍게도 현명공은 우리 아이들에게 그럭저럭 인기가 좋다. 어른들 입장에서는 희대의 꽐라지만 어린아이들 시야에서는 재밌고 잘 놀아주는 어른이니까.
정작 현명공의 친자식인 누군가는 현명공을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현명공이 온갖 어그로를 끌어준 덕에 옆에 있던 나와 에리도 주목을 받았다.
원래 저녁 정도가 되면 에리와 연회장을 누비면서 존재감을 과시할 생각이었는데, 예정과 다른 방식으로 존재감을 뽐내고 말았다.
‘결과만 좋으면 되는 거지.’
그래도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 어떤 길로 가든 목적지에만 도착하면 그만 아니던가. 에리가 내 유일한 파트너로 있는 모습을, 우리 가족이 오붓하게 있는 모습을 귀족들에게 과시했다.
비록 가족에 현명공까지 낀 건 예상 외지만, 아무튼 ‘타일글레헨 백작부부는 여전히 애정이 넘친다.’ 라는 인식을 성공적으로 심는 데 성공했다. 그거면 충분해.
“장관님, 장관님.”
“응?”
“슬슬 방에서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슬쩍 테라스 쪽을 바라보니, 불그스름했던 하늘이 어느새 까맣게 변한 상태였다.
“그러네. 이제 재워야겠어.”
어른들에게 있어 연회의 밤은 쉬어야 할 시간이 아닌 한창 놀아야 할 시간이지만, 우리에게는 작고 소중한 페렌츠가 있다. 늦은 시간까지 품에 안고 있기에는 곤란하지.
물론 아이들이 어른과 비교하면 무한한 체력을 자랑하기는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해가 떠있을 때나 놀고 있을 때에 국한되는 이야기다. 해도 지고, 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눈을 떠봤자 페렌츠만 피곤한 일. 페렌츠의 건강과 활기찬 내일을 위해서라도 슬슬 재워야 한다.
“대부인.”
그렇기에 여전히 페렌츠를 안고 계시던 조모님에게 다가갔다.
“시간이 조금 늦어서─”
“데려가게. 아이는 이제 잘 시간이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페렌츠를 내 품에 안겨주셨다.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납득했다. 육아 경력을 따지면 나보다 조모님이 더 길지 않나. 내가 걱정하는 문제를 조모님이 모르실 일은 없다.
“아까부터 피곤한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네. 편하게 침대에 눕혀야 곤히 잘 수 있을 거야.”
“죄송합니다. 제가 진즉에 재웠어야 했는데.”
“죄송하기는. 외증손자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오히려 즐거웠어.”
살포시 미소를 지은 조모님은 조심스레 페렌츠를 쓰다듬으셨다.
몇 시간 동안 붙어있던 외증조할머니가 만져주는 것임에도 눈만 깜빡이는 페렌츠. 확실히 졸리기는 한 모양이다. 평소였다면 빵끗 웃으면서 팔을 허우적거렸을 텐데.
“연회장과 가장 먼 방을 준비해 뒀으니, 거기로 가면 될 게야. 마침 방 안에 작은방이 하나 더 있어서 아이를 돌보기도 딱이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네 장인에게 하거라. 이 늙은이는 성 안에 뭐가 있는지도 가물가물해서 말이야. 준비는 그 녀석이 다 했어.”
말도 안 되는 말씀인지라 픽 웃음을 흘렸다. 조모님 스스로는나이 때문에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하셨으나, 아직 조모님의 기억력은 누구보다 정정하시다.
조모님에게 인사를 하러 온 귀족들을 바로 알아보고, 그 귀족들의 가족 관계나 근황을 주제로 덕담까지 던지셨으니까. 그런 분의 기억력이 안 좋은 것이라면 누군들 기억력이 멀쩡한 걸까.
“그럼 먼저 물러나보겠습니다.”
“그래, 내일 보세나.”
조모님의 배웅을 뒤로하고 슬쩍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다행히 귀족들과 인사도 다 나누었고, 현명공이라는 미친 존재감이 연회장을 누비고 있으니 셋이 사라져봤자 티도 안 난다.
고맙습니다, 현명공. 술의 지배자 아니랄까 봐 연회 때는 누구보다 든든하기 짝이 없어. 평소에는 든든이 아니라 막막이지만.
“압빠. 나 졸려어.”
“응, 이제 코 잘 거야. 옷 갈아입고 자야 하니까 조금만 참자?”
“우웅…”
페렌츠의 투정 아닌 투정에 등을 토닥여줬다.
우리 페렌츠, 조금만 참자. 지금 잠들면 지금 입고 있는 옷 그대로 침대에 누워야 돼. 외출복 입고 자는 것만큼 불편한 것도 없어.
“많이 피곤하기는 한가 봐요. 이렇게 하품 많이 한 적이 있었나?”
“처음 보는 어른들이 잔뜩 있었는데, 아무래도 피곤할 수밖에 없지. 게다가 늘 있던 장소가 아니라 처음 오는 장소기도 했고.”
“하긴. 낯선 환경이니 평소보다 긴장했겠죠.”
페렌츠의 볼을 콕콕 찌르던 에리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아들이 자는 걸 막으려고 애꿎은 볼을 찌르다니. 이게 부모로서 적절한 행동인 걸까.
“백작 각하, 부인.”
“응? 시녀장?”
홀로 볼 찌르기의 정당성을 고민하던 중, 마살로 가문의 시녀장이 다가왔다.
“도련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두 분은 편히 쉬시지요.”
“괜찮아! 어차피 금방 잠들 것 같은데 우리가 해도 돼!”
“언제 다시 깨실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두 분도 저희에게는 귀중한 손님이시니, 부디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시녀장이 허리까지 숙이자, 에리는 끙끙거리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럼 오늘만 부탁할게!”
“예, 부인.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물론 마살로 가문의 시녀장이면 에리에게도 유년 시절을 함께 한 귀중한 지인.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각하. 저에게.”
“잘 부탁하네. 페렌츠가 낯을 가리는 성격은 아니니, 불편함은 없을 거야.”
“부인을 닮으셨다면 당연히 그렇겠군요.”
시녀장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내 말에 유년 시절의 에리가 떠오른 모양이다.
***
어머니 근처가 한산해진 틈을 타 슬그머니 다가갔다.
“어머니. 계획대로 됐다고 합니다.”
그러자 샴페인을 들고 계시던 어머니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소싯적의 어머니를 보는 기분이라 픽 웃음이 나왔다. 후작부인 시절의 어머니도 이렇게 이런저런 음모를 꾸미셨지. 아버지가 대외적 활동에 집중하는 동안, 어머니는 은밀하게 내부를 관리하셨어.
“내년에는 새로운 막내를 볼 수 있겠구나.”
다만 소싯적의 음모가 딸과 사위에게 향할 줄은 몰랐다.
“욕심도 많으십니다. 오늘 막내 외증손주를 봤는데, 벌써 다른 외증손주를 원하시는 겁니까?”
“오늘 봤으니까 더 간절한 거지. 저렇게 귀여운 아이가 둘이면 얼마나 좋겠느냐.”
부정하기 어려운 말이라 머쓱하게 수염을 매만졌다.
“게다가 지금 준비해도 내년이야. 내년에는 내가 살아있을지 아닐지─”
“적어도 생신 때는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듣는 사람 가슴이 다 철렁합니다.”
“10년은 들었으면서 엄살은.”
10년이나 하셨으면 이제 멈추실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우리 아가는 잘 돌보고 있겠지?”
“시녀장이 직접 맡았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우리 아이들도 시녀장 손에서 자라지 않았습니까.”
“그럼 에리랑 손녀사위는 둘만 있겠고.”
“방 안에 이것저것 많이 넣어뒀답니다.”
어머니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밖에서 문이라도 잠그고 싶은데…”
“어휴, 그래봤자 소용없습니다. 대륙 제일 검이 작정하면 이 성도 갈라 버릴 텐데요.”
말로는 소용없다고 했지만 사실 나도 아쉽다. 사위가 조금만 약했더라면 어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내가 잠가버렸을 테니까.
‘둘째를 만들기 전에는 못 나오는 방인 거지.’
어머니의 야심. 나의 야심. 마살로 가문의 야심.
바로 에리와 사위가 마살로 가문의 성에 온 김에 귀엽고 귀여운 둘째를 만드는 것. 그것을 위해 우리 페렌츠를 잠시 시녀장에게 맡기고, 에리와 사위는 철저하게 꾸민 방으로 몰아넣었다.
안에 기력에 도움이 되는 음식, 분위기를 띄우는 향과 촛불, 간단하게 씻을 수 있는 욕조까지 준비해뒀지. 분명 둘도 만족할 거다.
‘연회장에서 가장 먼 곳이니 다른 사람이 방해할 일도 없다.’
그러니 부디 좋은 밤을 보내기를.
어머니의 90번째 생신 선물로 무엇보다 아름다운 선물을 만들어내기를.
***
시녀장이 알려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실소를 흘렸다.
“오옹…”
에리도 나와 같은 심정인지 나지막한 탄성을 흘렸다.
아무래도 들어올 때는 둘이지만 나갈 때는 셋이 돼서 나가야 하는 방에 들어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