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842)
로판 속 공무원 842화(843/945)
마살로 가문의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강하게 억눌렀다.
연회장과 가장 먼 방이라 방해꾼이 올 수 없는 거리. 방 안에 음식과 의복, 간단한 기호품과 욕조까지 마련해두어 사용인조차 올 이유를 차단한 작은 요새. 심지어 우리 부부가 돌봐야 할 페렌츠마저 마살로의 시녀장이 맡았으니, 이 정도면 피곤해도 없던 기력을 이끌어내야 할 수준이다. 이렇게 판이 깔렸는데 엎어버리는 건 도리가 아니야.
‘이게 이렇게 흘러가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머쓱히 웃음을 흘렸다.
나와 부인들에게는 전통 아닌 전통이 생겼다. 신혼여행을 가면 우리 둘만의 추억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도 담아오는 전통이. 몇 년 늦기는 했지만 일종의 허니문 베이비 같은 거지.
허나 에리와는 타국으로 장기간 여행을 간 것이 아니라 저택을 거점 삼아 당일치기 여행을 반복했다. 아침에 여행지로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걸 반복했으니, 다른 부인들과 달리 에리와는 오붓하게 밤을 보낼 시간이 부족했다.
그 아쉬움을 여기서 달래게 생겼다. 우리 둘밖에 없는 장소에서. 누구도 방해하지 않을 굳건한 요새에서.
“확실히 우리 페렌츠 동생을 만들 때가 되기는 했어요.”
나처럼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에리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마르는 율리아를 낳았고, 트릭시는 처음부터 세쌍둥이를 낳았고, 리제와 린도 각자의 둘째를 품고 있다. 패턴상 이번에는 에리 차례고, 다음에는 피네 차례다.
다만 그 아름다운 전통을 처가에서 이루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처가에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건 좀.
‘…괜찮나?’
하지만 고요한 처가에서 내가 먼저 폭주한 것도 아니고, 처가가 딸과 사위를 위해 먼저 판을 깔아뒀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처가가 아닌 우리들만의 공간이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괜히 점잔을 떨면 그게 더 문제 아닐까?
그래, 분명 그게 더 문제일 거다. 이는 마살로 가문의 가주인 장인어른의 뜻이고, 연회의 주인공인 조모님의 뜻이 분명하다.
“에리야.”
“넹?”
“하루 정도는 안 자도 상관없지?”
내일이나 모레부터는 다른 부인들도 있으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늘뿐이야.
그러니 최소 사흘 같은 하루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나도, 에리도, 페렌츠도, 장인어른도, 조모님도 기뻐할 결과가 나올 테니.
“물론이죠! 감찰부에서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하루가 아니라 열흘도 거뜬하죠!”
“열흘까지는 필요 없─”
“그리고 저도 그동안 열심히 단련했다고요! 저번처럼 픽 쓰러지지는 않아요!”
“오.”
자신만만한 에리의 대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뭐지, 이 근거라고는 티끌도 보이지 않는 미묘한 자신감은? 최약체가 단련해 봤자 약체로 진화하는 것이 고작일 텐데?
“그거 다행이네.”
물론 몇 시간 만에 밑천이 털릴 얄팍한 자신감이다. 굳이 반박하지 않아도 거품처럼 터져버릴 자신감.
그렇기에 일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가끔은 팩트 폭행보다 친절한 침묵이 더 중요한 법이지.
아침이 밝았다.
“자?”
“…….”
에리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무래도 시체인 것 같다.
“단련했다며. 숨쉬기 운동만 하면서 단련한 거야?”
자존심을 긁는 발언까지 했지만 이번에도 반응이 없었다. 제대로 기절한 모양이다.
애석한 노릇이다. 자신만만했던 걸 보면 실제로 단련을 하기는 한 것 같은데, 100m 1cm 하고 100m 2cm는 육안으로 구별하기 어렵잖아. 그 정도면 그냥 오차 범위다.
안타깝게도 에리의 단련도 딱 그 수준이었다. 체감하기 어렵고, 실제로도 별 의미가 없는 오차 범위. 없다고 취급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사소한 수치.
‘나름 자제한 건데.’
심지어 이곳은 내 저택도, 타지에서 빌린 숙소도 아닌 처가다. 아무리 처가에서 판을 깔아줬어도 진심을 내기는 민망해서 살짝 힘을 뺀 상태였지. 그럼에도 에리는 처절하게 패하고 말았다.
‘마법이라도 배우라고 해야 하나.’
트릭시랑 리제는 무인이 아니지만 마법의 힘 덕분에 훌륭한 분투를 하고 있다. 조만간 에리한테도 마법이나 배워보라고 권해야지.
마침 1과장직에서 물러난지라 백수나 마찬가지고, 대륙 제일의 대마법사가 같은 지붕 아래 있잖아. 진심으로 배우고자 한다면 에리보다 좋은 환경도 드물다.
“각하, 부인. 시녀장입니다. 기침하셨습니까?”
트릭시도 에리의 딱한 사정을 알면 성심성의껏 가르쳐 주지 않을까 기대하던 중. 노크 소리와 함께 시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인은 아직 자고 있다네. 기껏 아침부터 와줬는데, 괜한 발걸음을 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하군.”
여전히 기절 상태인 에리를 흘끗 바라본 후 조심스레 답했다. 에리가 어렸을 때부터 돌봐준 사람에게 ‘에리는 기절 중이야. 깨워도 안 일어나.’ 라고 하는 건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으니.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에리가 최약체기는 해도 회복력은 그럭저럭 괜찮다. 지금은 죽은 듯이 기절 중이어도 점심 전에는 눈을 뜰 거다.
아마도 그럴 거다. 얘가 최약체기는 하지만 객관적인 능력만 보면 기사 수준은 되니까.
“그렇, 습니까. 알겠습니다. 부인께서도 기침하신다면 탁자에 있는 통신구로 찾아주십시오.”
“그러도록 하지.”
아무튼 내 대답에 시녀장은 밤중에 있었던 일을 직감한 것인지, 아주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민망하다. 이게 다 에리가 약해서 생긴 문제야. 나처럼 깨어있었다면 이럴 일도 없잖아.
“헌데 시녀장. 페렌츠는 잘 있나?”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낯을 가리지 않으셔서, 아무 문제 없이 도련님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른 시녀가 주무시고 계신 도련님 옆에 있습니다.”
“그런가.”
우리가 옆에 없어도 곤히 자고 있다는 말에 안도와 섭섭함을 동시에 느꼈다.
당연히 우리 페렌츠가 아빠랑 엄마 보고 싶다며 우는 것보다는 낫지만, 없어도 상관없다는 듯 자고 있다면 좀.
‘그만큼 피곤했다는 거지.’
물론 섭섭함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현 시각은 이른 아침도 아닌 다소 늦은 아침. 아침 일찍부터 놀기 바쁜 페렌츠가 아직도 숙면 중이라면, 그만큼 어제 있었던 연회가 피곤했다는 뜻이다.
“페렌츠가 일어나면 이 방으로 보내주게. 밤 동안 대신 돌봐주느라 수고가 많았어.”
“수고라니요. 귀여운 도련님과 함께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어찌 수고라고 하겠습니까.”
심적으로 매우 공감이 가는 말이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시녀장은 문밖에 있어서 나를 보지 못함에도 말이다.
“다음에 올 때는 페렌츠처럼 귀여운 아이를 한 명 더 데려오도록 하지.”
사소하게나마 심적 동질감을 느껴서 그런지, 시녀장에게 슬쩍 진심 섞인 농담을 건넸다.
페렌츠처럼 귀여운 아이. 단순히 내 아이가 아니라, 페렌츠처럼 마살로의 피를 이은 새로운 아이.
“참으로 감사한 말씀입니다.”
내 농담을 이해한 시녀장도 아까보다 온화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쩌면 당장 장인어른에게 달려가 ‘백작이 둘째 만든대요!’ 같은 소식을 전할지도 모르겠다.
***
날이 밝자 기쁜 소식이 연이어 들려왔다.
첫 번째 경사는 사위의 부인들이 성으로 찾아왔다는 점. 사위의 부인들 중에는 새로운 울켄 공작인 여명공의 막냇동생이 있고, 현 세르베트 공작이신 마종공께서도 계시다. 두 공작가의 인물이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친히 찾아와 준 것이다.
그러한 상징적인 이유 외에도 에리의 가족들이 기꺼이 마살로 가문의 행사에 와줬으니, 에리의 아비로서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다. 에리가 다른 부인들과도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어머니에게 과시할 수 있는 기회지.
“각하와 부인께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신 것 같습니다.”
“아주 좋군.”
두 번째 경사는 시녀장이 막 가져다준 따끈따끈한 소식. 바로 사위와 에리가 우리의 바람대로 움직여줬다는 소식이었다.
사실 첫 번째 경사보다 이게 더 기쁘다. 에리가 가족들과 잘 지낸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상수이나, 페렌츠의 동복동생이 생기는 건 당연히 일어나는 일상이 아니다. 이렇게 부부가 노력을 해야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이 아이의 존재다.
내가 막내 외손주 탄생에 기여했다니 그보다 기쁠 수는 없다. 아마 어머니도 이 소식을 들으면 무엇보다 좋은 선물이라며 흐뭇해하시겠지.
“그리고 각하. 크라시우스에서 오신 귀빈들께서 대부인께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합니다.”
“아, 안내해 드리게. 어머니도 에리의 가족들을 꼭 보고 싶어 하셨지.”
“예. 그럼 바로─”
“내가 가도록 하지. 시녀장은 우리 외손자를 돌봐주게나.”
“…알겠습니다.”
내 말에 잠시 망설이던 시녀장이었으나 이윽고 허리를 숙이며 수긍했다.
솔직히 안내해야 할 귀빈 중에 마종공이 끼어있다면 시녀장이라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나마 나는 마종공과 사위를 사이에 둔 가족이고, 후작이라 그럭저럭 평범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지.
‘마라멘토 녀석. 속 좀 꽤나 쓰리겠어.’
귀빈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던 중, 문득 라비르제 후작이 떠올라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현명공이 연회에 참석한 것은 ‘서부 귀족 가문의 경사’ 라고 취급할 수 있다. 디고 후작가에서 비슷한 일이 있으면 그때도 현명공이 참석했을 거다.
허나 여명공의 막냇동생, 마종공이 참석한 것은 다름 아닌 마살로 가문의 경사여서다. 디고 후작가에서 비슷한 일이 생겨도 절대, 절대 오지 않을 귀빈들.
‘이게 혈연 차이다, 2인자 놈.’
네가 십 년, 백 년을 노력해도 결코 좁힐 수 없는 격차.
넌 평생 서부의 2인자로─ 아니, 현명공까지 포함하면 3인자로 살아야 할 팔자야.
귀빈들과 함께 어머니가 계신 방으로 이동했다.
“어머니, 접니다. 어머니를 뵙고 싶다는 분들이 계시는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 주무시고 계신 걸까요? 그럼 저희는 다음에 인사드려도 괜찮아요.”
여명공의 막냇동생, 1부인의 말에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는 분명 아까 전에 아침 식사를 마치셨다. 식사를 하고 다시 주무실 분은 아니니 분명 깨어있으실 터.
“못 들으신 걸 수도 있다. 연세가 있으셔서 간혹 소리를 놓치시는 경우가 있지.”
그 말과 함께 다시 두드렸지만 이번에도 반응이 없었다.
…
‘설마.’
순간 소름이 돋아 어머니의 허락 없이 문을 열었다.
설마, 설마 아닐 거다. 하필 오늘 같은 경사에 그러지는 않을 거야.
‘아.’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의자에 앉으신 채 고요히 눈을 감고 계신 어머니였다.
마치 평온한 잠에 빠지신 것처럼. 영원한 잠에 빠지신 것처럼.
“어머니!”
다급하게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못난 아들이 된 것 같아 속이 뜨겁게 타올랐,
“시끄럽다 이놈아.”
?
“뭘 그렇게 소란스럽게 구는 거냐. 이 어미가 죽은 줄 알았어?”
“아니, 저, 그게…”
“오랜만에 겪는 연회라 잠시 눈 좀 붙인 거다. 90 먹은 노인이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멀쩡할 줄 알았느냐.”
그렇게 말씀하신 어머니는 강하게 내 등을 내리치셨다.
“어, 어머니!”
“이놈 새끼. 이 건방진 새끼. 가만 보면 내가 죽기를 가장 바라는 건 너 같아.”
어머니의 손은 아직 영면은 멀었다고 과시하듯, 매우 강렬하게 따가웠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